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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21)화 (2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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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시선에서 그날의 기억을 보는 건 묘한 감이 있었다.

제냐는 몰아치는 먼지바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왕을 보며 눈을 좁혔다.

마왕의 군대에 한 마을이나 나라가 파괴되는 것이 놀라운 일도 아닌 시기였다. 하지만 신전이 이런 식으로 박살이 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도 마을에 자리한 조그만 신전에는 흠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신전은 언제나 마족의 손아귀를 피해 갔었으니까.

[지옥에나 떨어져라, 마왕!]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성기사가 의미 없는 저주를 남기며 마왕을 공격했다가 쓰러졌다.

성기사의 마지막 일격은 마왕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마왕은 멀쩡한 얼굴로 자기 손등에 난 상처를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 앞에 겁에 잔뜩 질린 어린 제냐, 아스트리아가 서 있었다.

‘기억과 다르진 않은데…….’

느낌이 조금 달랐다.

과거의 일이기 때문일까? 이번 기억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심장이 좀 빠르게 뛰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아니, 조금 화가 났을지도.

하지만 그 분노 역시 기억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겪는 이 상황에 대한 감상이었다. 제냐가 두 마족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 건 다 마왕 때문이었으니까.

‘왜 나한테 이딴 업무를 맡긴 거야?’

삐딱하게 선 제냐가 무너진 신전을 배경으로 한껏 폼을 잡고 있는 마왕을 노려봤다.

못마땅함을 가득 품고, 어린 그녀를 내려다보는 마왕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조심스러운 손길이 다가왔다.

제냐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손목을 약하게 붙잡은 용사를 쳐다봤다.

“왜요?”

왠지 오늘따라 청량해 보이는 푸른 눈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제냐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튀어나온 말.

“없애 줄까요?”

“네?”

“처리해 줄 수 있어요.”

힐끗, 푸른 눈이 기억 속 마왕에게 닿는 순간 냉기가 어렸다.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용사의 말에 제냐는 입을 뻐끔거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용사니까, 자기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그는 분명 저 기억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괜히 환상을 건드렸다가 거울의 마법이 변형되면 문제가 더 커질지 몰랐다.

그래도…….

“그게 가능해요?”

말끝이 형편없이 튀었다. 제냐는 혀끝을 깨물며 침착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위험할지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가 현실에서도 마왕을 처리해 주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제냐가 주먹을 세게 쥐며 눈을 깜빡였다. 눈치채지 못한 새 숨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가능해요.”

그간 가지고 있던 일말의 불신을 잠재우는 확신에 찬 목소리.

얼른 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콱 막힌 것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제냐의 몸 전체를 두드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입술에 낯선 엄지손가락이 닿았다.

뭉근하게 아랫입술을 문지르는 손길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손의 주인을 쳐다보자 용사가 달래듯 말했다.

“자국이 남아요. 그리고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다시 한번 입술을 누른 용사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살피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사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거거든요.”

제냐는 용사를 따라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스트리아에게 손을 뻗는 마왕을 발견했다.

저 뒤에 이어질 기억은 너무나 생생했다. 지금 그녀의 삶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친 일이니 잊을 수 없었다.

아스트리아는 성력을 이용해 나름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하지만 그건 마왕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하고, 되레 그녀의 특별한 힘을 들키게 했다.

‘그리고 납치당하겠지.’

하지만 그녀의 앞에 보이는 건,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힘을 쏟아 내고 쓰러진 아스트리아를 감싸 안는 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뻗어지는 마왕의 손으로 향하는 붉게 형상화된 힘.

‘검?’

그 검처럼 생긴 붉은 힘이 마왕을 베어 내자 거짓말처럼 마왕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제냐는 아스트리아를 품에 안고 마왕을 없앤 사내를 가만히 쳐다봤다.

용사.

간절히 바라긴 했지만 분명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이였다. 그러니까 저건 현실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당신은 용사구나.’

새삼스레 그의 존재가 상기됐다.

마왕이 흩어진 것처럼 품 안의 아스트리아가 사라지자 용사가 다시 제냐에게 다가왔다.

제냐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용사를, 그녀에게 다가오며 입꼬리를 올리는 남자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봤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을 때.

“제냐, 괜찮…….”

“용사님.”

제냐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저는 정말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어요.”

설렘인지, 환희인지 모를 감정이 제냐를 덮쳐 왔다. 목소리 끝이 덜덜 떨리는 것도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숨이 찼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

하지만 그 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쨍그랑-! 귀를 찢을 듯 커다란 소음과 함께 땅이 크게 흔들리며 주변에 금이 갔다.

지진이 나는 것처럼 크게 흔들리는 바닥 때문에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제냐를 용사가 붙잡았다.

제냐는 빠르게 망가지고 있는 주변의 풍경을 무시하고는 그녀를 단단히 붙든 손을 세게 잡아당겼다.

언제 또 용사가 입을 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서로 대화가 될 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제냐의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용사가 제냐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방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무언가 부서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는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제냐와 눈이 마주친 용사가 고개를 끄덕여 줬다. 제대로 들었다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도망가지 않겠다는 그 말에 초조함이 사그라들었다.

“알았어요.”

제냐가 용사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익숙하면서 짜증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냐!”

그녀를 향한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늘 이 사건을 일으킨 범인 중 하나인 레라지에였다.

* * *

레라지에는 심장 위에 두 손을 겹쳐 올려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거울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냐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네가 거울 밖으로 튕겨 나오는 걸 목격한 이후부터 가슴이 콩닥거렸다.

“얼마나 남았지?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

거울 안을 직접 겪어 본 비네가 나타난 이후, 마법을 해제하는 일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렇게 답답하면 직접 하지 그래?”

뒤에서 삐딱한 베리스의 말이 들려왔지만 레라지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비네가 거울 밖으로 나왔음에도 베리스는 계속해서 마법을 풀기 위해 손을 보태고 있었다.

물론 그게 레라지에가 내건 조건과 비네가 적극적으로 마법을 해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긴 했지만.

레라지에가 베리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곤란해, 나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걸 눈에 담을 생각이거든.”

부끄러워서 눈을 돌리거나, 다른 데에 신경 쓰느라 그 아름다운 형상을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

그런 레라지에의 말에 베리스가 울컥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장난……!”

“베리스, 지금은 여기에 집중해.”

베리스가 억울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지만, 비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도 베리스가 말하려는 바가 뭔지는 알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관심도 없는 레라지에를 상대하느라 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비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 몇 번이나 헛웃음을 흘리던 베리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마법을 살피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싸우자고 덤벼들지 않는 걸 보니 자기 때문에 마법에 휘말린 게 조금 미안한 모양이었다. 저 거울이 비네에게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물론 그렇다고 기분 좋게 해 주는 건 아니지만.’

입을 꾹 다문 것을 보니, 기분을 풀어 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고마움을 담아 베리스의 팔을 툭 두드린 비네는 그를 구멍 밖으로 내던진 이름 모를 사내를 떠올렸다.

‘그 힘은.’

레라지에는 그 사내가 제냐의 연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지만, 그건 전부 추측일 뿐이었다.

직접 거울의 마법을 뜯어내고 마법에 침입한 걸로 봐서는 실력도 평범하지 않았다. 만약 그자가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거라면…….

최대한 빨리 마법을 풀어내야 했다.

“됐어.”

힐끗 거울을 쳐다보던 비네가 베리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점점 형체를 잃어 가는 마력 배열을 확인했다.

비네가 베리스를 도와 마력을 더 빠르게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곧장 보호 마법을 그들 주위로 둘렀다.

마법이 그들을 완벽히 감싸자마자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창고 안 누구도 망가진 거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네!”

딱히 마법을 둘러 주지도, 경고를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방어했는지 레라지에 역시 멀쩡해 보였다.

비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에서 튀어나온 두 인물을 바라봤다.

헤어지기 전과 별로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제냐의 모습을 확인한 비네는 곧장 그녀와 함께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옷으로 얼굴을 꽁꽁 숨긴, 커다란 덩치의 사내. 힘을 쓴 지 얼마 안 된 듯, 갈무리한 것 같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레라지에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처럼 확실히 겹쳐져 있는 두 인영은 연인처럼 보이긴 했다.

비네는 제냐의 허리를 감싼 낯선 사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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