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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20)화 (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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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용사 루미에르

제냐는 다시 허물어지는 공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네요.”

지금 제냐도 마왕과 엘리고스, 다른 마족들의 눈치를 보고 있긴 했다. 하지만 적당히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저런 말을 했었구나. 신기하네.”

처음 보는 애한테 잘도 잘난 척을 했다. 민망해진 제냐가 용사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는 용사를 발견했다.

여전히 니트에 가려져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제냐의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용사는 꼭 그리운 누군가를 마주한 것처럼 아스트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흩어져 버린 과거의 그녀와 용사를 번갈아 바라보던 제냐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왜 그래요?”

그러자 용사가 꿈에서 깨어나듯, 흠칫 몸을 떨며 그녀를 돌아봤다.

흐릿하던 눈이 제냐를 담더니 점점 더 선명해졌다. 용사가 말을 고르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했다.

“…이름이 다릅니다.”

이름보다는 공주라는 호칭을 먼저 물을 줄 알았는데. 제냐는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아, 신전에 입적하면서 이름을 바꿨어요. 제냐로.”

이제는 공주가 아니라고,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지켜 줄 어른은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제냐’는 그 이치를 제일 처음 가르쳐 준 이의 이름을 따 적당히 지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족들은 제냐의 본래 이름을 알지 못했고, 덕분에 공주 아스트리아와 마왕성의 시녀 제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어째서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부 하고 싶진 않아서 이어진 물음에 제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마음에 들어서? 뭐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제냐가 녹아내리는 주변 풍경을 눈짓했다.

“이제 또 기억이 바뀔 거예요. 뭐가 나올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용사가 불편한 질문을 하기 전, 먼저 적당히 그녀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로 했다.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할까요?”

하지만 용사는 고개를 젓더니 돌연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도 어린 시절, 신전에 맡겨졌습니다.”

제냐는 눈을 깜빡였다. 신전에 맡겨진 제냐의 모습을 보며 동질감이라도 느꼈던 걸까?

“그래요?”

용사와 동질감을 형성하고 그가 그녀를 조금 더 가깝게 느낀다면, 그녀를 도와주는 데 조금 더 힘을 써 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용사가 먼저 자기 이야기를 해 주다니. 반길 일이었다.

그래 봐야 적당히 자기 어릴 적 이야기나 조금 해 주고 말 거라고 여겼는데.

“특이 체질이었습니다. 성력으로 인한 치유가 불가능했어요.”

불쑥 튀어나온 용사의 비밀에 제냐의 동공이 흔들렸다.

“…네?”

특이한 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이건 엄청 중요한 비밀 같았다.

그런 걸 왜 나한테……? 설마 인간 세상에서는 이런 건 비밀 축에도 끼지 않는 걸까?

“마족들처럼 상처가 덧나거나 악화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저를 꺼림칙하게 여겼습니다.”

그럴 리가.

성력이 안 통하다니, 이미 용사를 치료한 적이 있는 제냐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제냐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저는……. 어린 시절만 그랬던 건가요?”

용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뭐지? 지금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건가? 하지만 뭣 하러? 용사는 이미 제냐가 성력을 쓰는 걸 알고 있었다.

제냐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 성력은 통했잖아요.”

“네, 제냐는 달랐죠.”

용사가 그걸 부정하지 않자 제냐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용사는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성력만이 아닌 마법으로 인한 회복도 더딘 편입니다. 여러 사람이 그 원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저를 거둬 주셨던 성녀님께서도 이유를 알지 못하셨습니다.”

성녀?

“어머니께서도 제가 가진 힘이 다른 힘들을 거부한다고 짐작하실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용사인 그가 가진 힘이 특별하다는 건가? 아니면…….

“하지만 어째서 제냐의 힘은 다른 걸까요?”

그녀의 성력이 다른 건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마왕에게 납치된 그 순간부터 제냐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그녀의 성력은 다른가?

제냐는 다시 한번, 오랜 시간 가지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제 성력이 마족들에게도 통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신전에 머물렀던, 성녀와 함께 지내던 용사는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제 성력이 마족들에게도 통해요. 그래서 납치를 당한 거고, 이렇게 시녀로 마왕성에서 지내게 됐죠.”

제냐는 용사가 그녀의 힘을 오해하지 않게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인간들도 고칠 수 있는 건 마찬가지이긴 한데.”

이게 사특한 힘이 아니라, 조금 특이한 성력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레 용사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가 눈을 좁히며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납치를 당한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장난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용사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다니.

목표 의식이 대단했다. 제냐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건 나중에 여기서 나가면 답해 줄게요. 그보다는 우리가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던 용사가 물었다.

“저를 치료하면서 무슨 특이점이 있었습니까? 가령 마족을 치료할 때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던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 말은 꼭 그가 마족과 비슷하다는 의미 같지 않은가? 설마 어릴 때 받은 취급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걸까?

제냐는 용사의 눈이 다시 흐리멍덩해지기 전 얼른 답했다.

“마족과도 인간과도 달랐어요. 제가 치료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생채기 정도였거든요.”

“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로 눈에 힘을 가득 준 제냐가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상처가 보통 얼마나 빨리 회복되세요? 그러니까 막 눈을 감았다 뜨면 잘려 나갔던 상처가 다시 붙고 그런 건 아니죠?”

어리벙벙해 보이던 용사가 어색하게 답했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 힘이 마족이나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당신에게 작용하는 부분은.”

제냐가 한때 엄청난 상처를 달고 있었던 루미에르의 배를 바라봤다.

“당신에게 제 성력이 잘 받는다는 점이네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효과가 아주 좋다는 거죠. 뻥 뚫려 있던 배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했으니까.”

그녀에게도 나름 특별했던 기억이었다. 용사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줬으니까. 보잘것없고 쓸모없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힘이 그날만큼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나름 좋은 의미로 영향을 주는 거겠죠?”

용사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눈을 깜빡일수록 그의 눈에는 선명한 빛이 돌기 시작했으니까.

멍하니 눈만 껌뻑이던 용사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니트 사이로 살짝 드러난 눈가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렇군요.”

눈에 띄게 몰랑몰랑해진 분위기에 긴장이 풀렸다. 방금 아주 중요한 일을 잘 푼 것 같았다.

용사를 따라 생긋 미소 짓던 제냐는 슬슬 형체가 잡혀 가는 풍경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기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간신히 이뤄 낸 포근한 분위기를 단박에 앗아 버릴 기억.

마왕의 신전 습격 날이었다.

제냐는 막 해가 뜨는 이른 아침, 기도를 나갈 준비를 하는 어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까 그 물음에 답할 수 있겠어요.”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는 용사에도 제냐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딱히 웃고 싶은 기억이 아니었다.

“마왕에게 납치된 날이거든요.”

막 방을 나선 아스트리아를 날카롭게 쳐다보는 신관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제 일어난 건가요? 너무 게으르군요!]

그러니까 조금 전 기억에서 만들어 낸, 악연인 신관이었다. 아스트리아가 정체 모를 아이를 도와줄 때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던 신관.

저 신관이 그녀와 같은 고아들을 관리하게 된 건 아스트리아에게는 참 불행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스트리아가 누군지 알게 된 이후, 신체적으로 그녀를 건드리진 못했다. 하지만 늘 저렇게 날이 선 태도로 일관했고 그건 아스트리아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빠른 기상 시간과 딱딱한 침대에 대한 불만이 가득 쌓였던 아스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날카로운 신관의 목소리가 귀를 찢는 것만 같았다.

[시끄러워.]

[태도가……!]

사사건건 끼어들어 그녀를 가르치려 드는 신관의 태도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예민해진 성미에 불을 당겼다.

잠시간의 입씨름 끝에 아스트리아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기억과 다름없이,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아스트리아는 반항을 선택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이동하던 아스트리아가 몰래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 도착한 날 신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덕에 사람들이 없는 곳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성공적으로 자리를 이탈한 아스트리아는 도망간 보람도 없이 한껏 우울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루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지친 한숨을 쉰 아스트리아가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이것저것 낙서를 시작했다.

스스로의 신세가 처량해서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지만 그 불만은 오래가지 못했다.

콰아앙-!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여린 몸을 날려 버릴 듯한 엄청난 바람.

아스트리아의 뒤로 시커먼 마법이 신전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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