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9)화 (19/145)

16606917981375.jpg

마차에서 내린 아스트리아가 신관들의 안내를 받아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제냐는 신관들이 방을 나서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아스트리아를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라고요?”

아스트리아를 따라 이동하느라 듣지 못한 말을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리고 조금 멍한 얼굴로 계속 어린 제냐를 쳐다봤다.

신기한 걸까? 아직 볼살이 통통한 아스트리아는 그녀가 보기에도 제법 귀여웠다.

그래도 자신의 어린 모습을 용사와 같이 보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얌전히 기다리기는커녕 신전 이곳저곳을 탐방하듯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아스트리아에 낯이 뜨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나, 저 때 말을 잘 안 듣는 편이었나?’

괜히 맘대로 다녔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녀만 손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금의 제냐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긴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마왕을 만난 것도, 기도하기 싫다고 도망을 갔기 때문이 아닌가.

아직 오냐오냐 자란 버릇이 남아 있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신전에 맡겨진 것에 대한 심술일지도.

다 괜찮다고, 그녀를 신전에 맡겨 버린 삼촌을 이해한다고 말했어도 당시 그녀는 어렸으니까.

왜 저렇게 종종거리는 걸까. 제냐가 과거의 모습을 슬쩍 외면하려는데, 때마침 막 들어선 정원에서 아스트리아가 특이한 복장의 아이와 맞닥뜨렸다.

아이는 머리 위 은색의 관을 쓰고 있었는데, 관에 연결된 하얀 천이 이마 위로 길게 늘어져 아이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저 애는…….”

그 특이한 모습을 보자 어렴풋이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아스트리아는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했는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물론 상대도 반응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서로를 멀뚱거리며 쳐다보던 두 아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갑자기 들려온 호통이었다.

[어딜 혼자 돌아다녀!]

날카롭고 높은 톤의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에 흠칫 어깨를 떤 아스트리아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한동안 눈칫밥을 먹었다고 해도, 국왕 내외의 외동딸로 어화둥둥 자랐던 아스트리아였다. 최대한 어른스럽게 현재의 위치를 받아들이려고 해도, 공주의 자존심이 어디로 가지 않았다.

아스트리아가 표독스럽게 눈에 힘을 주고, 달려오는 여자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 신관이 향한 쪽은 아스트리아가 아니라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아이였다.

[쯧, 짐승 새끼도 아니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신관이 우악스럽게 아이의 팔뚝을 움켜쥐더니 아이를 질질 잡아끌었다.

그 거센 힘에 아이가 발을 헛디디며 넘어질 뻔했지만 딱히 신경 쓰는 기색도 없었다. 아이가 주춤거리며 여자를 따라 몇 발자국 이동했다.

팔락거린 흰 천 사이로 앙다문 입술이 살짝 드러났다. 분명 겁에 질린 모양새였다.

[내가 왜 이런 저주받은 꼬맹이를……!]

폭력적인 마족들에게 가족을 잃었었기 때문일까? 자기 허리에도 닿지 않는, 비쩍 곯은 아이를 마구 휘두르는 여자의 모습이 전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아스트리아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아무리 처지가 급변했어도 이런 시골에 있는 신관 하나쯤은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었다.

[너 시끄러워.]

[…이건 또 뭐야?]

삐쭉 솟은 눈매가 무서울 만도 했지만, 아스트리아는 기죽지 않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거?]

날카로운 반문에 신관이 급하게 소녀의 옷차림을 훑었다.

최신 유행에 맞는 화려한 드레스와 그 옷에 달린 휘황찬란한 보석, 윤기가 흐르는 정돈된 머리카락. 그리고 귀티가 나는 얼굴까지. 누가 봐도 최소 잘나가는 귀족가의 자식이었다.

[그… 누구신지.]

[내가 네깟 거한테 내 이름을 이야기해 줘야 해?]

만약 신관이 당황하지 않았다면 대단한 가문의 여식이 이런 시골 신전에 올 일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관은 지금 너무 당황한 상태였다.

아무리 신전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해도 귀족들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었다. 특히 이런 시골에 박힌 신전에서는.

[그것이 아니오라.]

아스트리아는 안절부절못하는 신관의 모습을 실컷 감상하고 나서야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교양 없이 시끄럽게 하지 말고 꺼져.]

그러자 신관이 크게 감사해하며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 아이까지 데리고.

아스트리아가 얼른 신관을 막아섰다.

[걘 두고.]

[하지만…….]

망설이는 신관에 아스트리아가 발을 굴렀다.

[내 말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지 마!]

[…죄송합니다.]

결국 신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스트리아는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를 돌아봤다.

[너도 여기 머무니?]

딱히 아이에게 관심이 생겼다기보다는, 어차피 구해 준 거 한번 이야기나 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저 인간이 네 담당이고?]

겸사겸사 앞으로 이곳에서 함께 지낼 또래의 아이와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아스트리아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말을 못 해? 아니면 이야기하기 싫은 건가.]

혹 조금 전 모습을 보고 겁을 먹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된 아스트리아가 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 별로 대단한 사람 아닌데. 그냥 쫓아내려고 그런 척한 거야.]

순식간에 아이의 앞에 도착한 아스트리아가 흰 천 너머 보이지 않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신전에 머물면 그런 은색 관을 써야 하는 거야?]

아이는 답이 없었다. 김이 샌 아스트리아가 이대로 자리를 떠나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이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스트리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나마 다행이네, 답답해 보이거든. 앞이 보이긴 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리아가 아이의 옆 돌에 궁둥이를 붙이며 너도 앉으라 손짓했다.

아스트리아는 아이가 엉거주춤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자 재잘재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이럴 때는 차라리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게 도움이 될걸?]

주변의 눈치를 잔뜩 보는 아이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봤던 걸까? 그도 아니면 자신보다 처지가 나빠 보이는 아이에 오랜만에 조금 으스대고 싶었던 걸까?

저도 어리면서 마치 세상을 통달한 마냥 주절거리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신전이니까 신관이 어린 애한테 대놓고 막 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좀 그렇잖아.]

이미지가 있으니 남들의 시선이 주목되면 지금처럼 심하게 굴지 못할 거라고 말을 덧붙인 아스트리아가 생긋 웃었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 여기에 머물 거야. 그러니까 너도 여기 머물면 종종 인사하자.]

아스트리아가 이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아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늘 떠나.]

아스트리아가 다시 궁둥이를 붙였다.

[그래? 어디로?]

[수도로.]

막 수도에서 이곳으로 왔던 아스트리아가 수도에 있는 대신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수도 신전? 왜?]

[검사해 볼 게 있다고 해서.]

신전에서 하는 검사라면 사실 하나뿐이었다. 오늘 아스트리아가 하기로 한 검사였다.

[너도 성력을 가지고 있어? 성력이 좀 대단한가? 아니, 그런 거면 저따위로 굴진 않을 텐데.]

애당초 굳이 성력 검사를 하기 위해 수도의 신전까지 갈 필요가 있나? 여기서도 가능한데…….

의문도 잠시, 사정이 있겠거니 고개를 끄덕인 아스트리아가 말을 이었다.

[뭐가 됐든 만약에 검사가 끝난 뒤에 태도가 변하잖아?]

그러고는 아이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양손으로 그녀의 입가를 쭉 늘여 웃음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 이렇게 웃고 다녀.]

남을 걱정할 위치는 아니지만, 덩치도 작고 바짝 마른 아이가 신경이 쓰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도 너무 작았다. 어른의 폭력적인 행동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는 것도 거슬렸고.

그래서 아스트리아는 잔뜩 오지랖을 부렸다.

[결과가 안 좋아도 웃고 다녀. 당당하게.]

때마침 아스트리아 역시 이번에 제법 괜찮은 교훈을 얻지 않았던가?

[눈치를 보는 건 좋은데 그래도 너무 기죽어 있는 건 별로더라. 내가 기죽어 있을수록 나를 더 우습게 본다니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에 파묻혀 비척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에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갑자기 조카를 맡게 된 외삼촌 부부가 그녀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 밑의 사용인들까지도 아스트리아에게 그리 대할 줄은 몰랐다.

어머니가 살던 집인데,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사용인들이 그리도 많았는데. 모두가 아스트리아를 천덕꾸러기 취급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신이 든 아스트리아는 그런 취급을 참지 않았다.

[나도 그래서 결국에는 들이박았는데…….]

그 때문에 조금 더 빨리 신전에 맡겨지게 되어 버렸으니 마냥 결과가 좋은 건 아니었다. 아스트리아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너무 막 그러진 말고 적당히 눈치 보면서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게 좋아.]

아스트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여기서도 눈칫밥 엄청 먹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봐 봐. 나 아까 막 나간 거.]

분명 그 신관과는 앞으로도 자주 마주칠 게 뻔했다. 아마 곧 아스트리아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왜 이곳에 맡겨졌는지 전부 알게 될 테다.

하지만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앞일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아마 내 처지를 알아도 그 여자가 나한테는 그렇게 못되게 못 굴걸?]

삼촌이 그녀를 이 신전에 맡기면서 기부한 돈은 조그만 신전에 큰 도움이 됐을 테니까.

솔직히 뻗을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은 거였다.

아스트리아가 씩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못 참겠다 싶으면 적당히 대드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응.]

그때 멀리서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그 부름에 아스트리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겠다. 이제 못 보겠지만, 잘 지내.]

그렇게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려는데, 아이가 아스트리아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이름이 뭐야?]

아이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보지 못할 사이긴 했지만 이름을 알려 주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스트리아.]

아스트리아는 이름을 가르쳐 주자 떨어지는 손을 바라보다 인사를 건네며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다시 한번 과거의 기억이 끝이 났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