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기억보다야 과거의 기억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기억에 좋은 일만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행복하고 평화롭던 시절은 빠르게 지나갔다. 제냐는 아름답던 왕궁이 마족들의 습격으로 인해 폐허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이 기억을 뛰어넘을 순 없겠죠?”
비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냐는 마족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도망가고 있는 ‘아스트리아’를 따라갔다.
겁에 질린 채, 부모의 손을 잡고 달려가면서도 절대 부모님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던 순진한 어린아이.
기사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사용인들의 비명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아스트리아는 부모님의 손에 의해 강제로 비밀 통로에 밀어 넣어졌다.
뭐, 그 뒤는 흔하디흔한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고 아이는 무사히 살아남는 그런 이야기.
[예언을 기억하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해!]
닫히는 문 너머 애써 미소 짓는 부모님을 끝으로 다시 한번 제냐의 기억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 뒤는 더 보여 주기 싫은데.’
부모님을 잃고 천덕꾸러기가 된 그녀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 줄 걸 생각하자 짜증이 났다.
비네 자작이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마왕에게까지 입을 다물진 않을 것 같은데…….
“잠깐. 뭔가 이상해.”
비네의 심각한 목소리에도 제냐는 심드렁했다.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는 풍경은, 기억이 끝이 나고 다른 기억을 끌어올 때마다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었기에 딱히 이상한 점은 없어 보였다.
“뭐가요?”
그러나 제냐는 곧장 그의 뒤에서 큰 구멍을 발견했다. 그리고 미처 경고하기도 전, 그 구멍에서 튀어나온 어떤 것이 비네 자작을 구멍 밖으로 내던졌다.
제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비네 자작이 사라진 구멍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올렸다.
“제냐.”
그러니까 갑자기 나타나 비네 자작을 구멍 밖으로 던져 버린 이는, 여기서 볼 거라고 절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제냐가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용사가 왜 여기 있지?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방에 있어야 하는데. 아니, 내가 없는 사이 돌아다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꼴이 저게 뭐야?
니트로 둘둘 싸서 가린 얼굴을 보니 절로 숨이 턱 막혔다.
설마 저러고 밖을 돌아다닌 건가? 이게 얼굴을 숨기는 방법이야?
나름 앞도 볼 수 있고 숨구멍도 트여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분장이 너무 허접했다.
‘비네 자작은 또 어떻게 된 거야?’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는데 용사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제냐.”
제냐가 황당함에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너무 흥분할 것 없었다. 용사는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 거다. 그러니까 괜히 그를 닦달한다거나 취조하는 것처럼 굴어서는 안 됐다.
“됐어요, 질문은 취…….”
“위험한 것 같았습니다.”
애써 상황을 받아들이려던 제냐가 입을 다물었다. 용사가 또 말을 하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그러니까 이건 얼굴에 피를 잔뜩 묻혀 왔던 그날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인 걸까?
뭘 부탁하려고, 어떤 정보를 캐내려고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체를 들키면 무슨 계획을 짰든 다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특히 이 거울 밖에는 용사를 직접 본 적 있던 레라지에가 있었다. 제냐가 초조함을 누르며 부드럽게 말을 하려 노력했다.
“걱정해 준 건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아마 여긴 거울 속일 텐데.”
설마 죽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그의 몸이나 옷차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제냐가 눈을 살풋 찌푸리는데 답이 돌아왔다.
“그냥 바로 들어왔습니다. 이 안에 있다고 해서요.”
안에 있다고 했다는 건, 레라지에나 베리스 둘 중 한쪽과 말을 주고받았다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그 둘이 저렇게 수상쩍은 차림의 용사를 막지 않았다고?
“다른 마족들이 막지는 않았고요?”
“네.”
“그 꼴로 만난 거예요?”
정말로 그 꼴을 보고도 아무도 당신을 붙잡지 않았냐고 물은 거였다.
“저를 알아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그럴까?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제냐가 한숨을 쉬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말하네요? 다시 입 안 열 줄 알았는데.”
설마 용사와 대화를 하려면 늘 이렇게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 건가?
“…….”
답이 없는 걸 보니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그런 위협이라니. 코웃음을 친 제냐가 주변을 돌아봤다.
“뭐, 그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비네 자작은 어떻게 된 거죠? 그러니까 저랑 같이 있던 마족이요.”
물으면서도 답이 돌아올까 싶었는데, 다행히 용사는 입을 열었다.
“제가 들어온 틈 사이로 나갔을 겁니다.”
용사의 입을 열게 했다는 기쁨과 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제냐가 눈을 반짝였다.
“우리도 그렇게 나갈 수 있나요?”
그러나 제냐의 희망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밖보다 안쪽 마력이 더 튼튼하네요.”
순식간에 꺼진 희망의 불씨에 제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랬다면 비네만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앞으로 어쩔 생각인데요?”
“…….”
용사가 말없이 주변의 공간을 쭉 훑었다. 뭘 찾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는 걸 보면 아예 아무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애당초 제냐를 구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거울로 들어온 걸 보면 아무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테고.
조급함을 달랜 제냐는 용사를 따라 슬슬 형체가 잡히기 시작하는 주변을 쳐다봤다. 그래도 비네 자작보다는 용사에게 기억을 보여 주는 게 더 낫긴 했다.
솔직히 비네에게 마족들에 의해 가족을 잃고 난 뒤의 삶을 보여 주는 건 싫었다.
‘비참하잖아.’
그녀가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얼마나 무너졌었는지를 보여 주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물론 용사에게도 이 기억을 보여 주는 건 그다지 반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와 같은 인간이고…….
이런 인간을 많이 봐 왔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인간이 많을 테니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제냐의 과거를 보고 나면 용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 줄지도 몰랐고.
“비네 자작은 거울이 보여 주는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해결책이 나올 거라고 했어요.”
점점 더 형체가 잡히는 주변을 경계하며 그녀의 옆으로 붙어 선 용사가 물었다.
“누구의 기억입니까?”
“내 기억이죠. 그리고 이때는…….”
제냐는 배경보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어린 시절의 그녀를 바라봤다.
“눈치를 잔뜩 볼 때죠.”
부모님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열 살의 아스트리아.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고향도 망해서 친척 집에 잠시 얹혀살았거든요.”
제냐는 변명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도 역시 남에게 보여 주기에는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아직 스스로의 처지를 완벽히 받아들이지 못했었고, 갑자기 변한 주변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그때.
슬슬 드러날 배경을 기다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던 제냐는 이내 드러난 주변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게… 시간이 좀 많이 넘어간 것 같네요.”
정말 그랬다. 분명 친척 집에 머물던 당시의 기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용사가 들이닥쳤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원래 그 기억을 보여 줄 생각이 아니었던 건지. 제냐의 기억은 친척 집에서 막 신전으로 가던 때로 넘어가 있었다.
호화로운 마차에 앉아 있는 아스트리아.
“뭐, 이것도 그리 재미있는 기억은 아닌데.”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시절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가 되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제냐는 고개를 들어 용사를 살폈다. 저 빌어먹을 니트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보이는 그의 눈이 조금 커진 것도 같았다.
시선이 부딪치자 용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냐인가요?”
“그렇죠?”
“정말 제냐라고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에 제냐가 아스트리아를 살폈다.
“그대로 큰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 때의 얼굴이 지금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딱 보면 어릴 때 저랬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정도의 변화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옷이 좀 화려하죠?”
확실히 저 때는 아직 공주라서 입고 있는 옷에 보석이 잔뜩 달려 있긴 했다.
지금도 버는 돈이 꽤 되니 싼 옷을 입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밝은 계열의 옷과 보석이 잔뜩 달린 옷을 즐겨 입던 과거와는 달리 무채색 계열의 재질이 좋은 옷을 찾아 입는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공주였다는 걸 모르네.’
용사는 갑자기 마법 안으로 난입했으니까. 하지만 제 입으로 내가 원래 공주였다고 말하는 것도 웃겼다.
“뭐, 원래도 그렇고 친척 집도 못 사는 편은 아니었어요.”
특히 신전으로 가던 저 날은 평소보다 더 과하게 차려입었었다. 일상복이라기보다는 무도회복 같은 느낌.
제냐는 신전으로 떠나는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하던 삼촌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날은 뒷말이 나오는 게 싫었는지 평소보다 더 과하게 차려입었죠.”
하지만 그래도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습이 바뀐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 않냐고 용사를 쳐다보자 그가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는 그 모습에 화제를 돌리려던 제냐와 용사의 말이 겹쳤다.
“…혹시 제냐가 머물렀던 신전이 타산…….”
“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