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라는 걸 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건가?
“모르겠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세면대 가득 차오른 찬물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물이 닿자 정신이 좀 깨는 것도 같았다. 숨을 참고 물속에서 눈만 깜빡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다시 한번 제냐가 떠올랐다. 그녀가 내뿜던, 그를 거부하지 않던 성력.
[성력이 안 통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
[인간은 맞아?]
[혹시, 우리 사이에 숨어든 마족 아니야?]
[죽여 버려야 해!]
성력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력에 의한 치유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몸이 제냐의 성력을 너무나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의 양어머니조차 그에게는 성력을 사용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다른 이들과 다른 건 그 힘 때문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남들이 그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른 이를 이용하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글쎄. 역시 조금 더 이곳에 머물러야겠다. 적어도 그녀에 대한 이 느낌이 뭔지 깨달을 때까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제냐?”
물에 잠겨 있던 고개를 들자 이틀 전처럼 한순간 소름 돋는 감각이 몰려들었다.
제냐가 얼굴에 잔뜩 피를 묻히고 방으로 돌아온 날 느꼈던 그 섬뜩한 한기.
“아.”
마족의 더러운 기운을 덕지덕지 묻힌 제냐를 떠올린 루미에르는 급하게 화장실을 벗어났다.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거칠게 손으로 닦아 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이건 그동안 그를 여러 번 살렸던 본능이 보내는 신호였다.
제냐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마왕성 내 그녀의 입지가 나쁘지 않다는 건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마족들은 인간들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자기의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쓰레기들뿐이었다.
언제 제멋대로 마음을 바꿔 버릴지 모르는 마족들의 틈바귀에서 제냐가 무조건 안전할 거라고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문에 손을 올린 순간, 그는 망설였다.
‘앞으로도 계속 말은 하실 건가요?’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나? 다시 입을 열 생각은?
잘 모르겠다.
“…제냐.”
들키지 않게 방에 있으라고 한 건 그녀였다. 저번처럼 아무런 상처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었다. 아주 비겁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숨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뭔지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였다.
크게 숨을 고른 그가 화장대 위에 놓인 회색 니트로 얼굴을 꽁꽁 감쌌다. 옷소매 부분을 꽉 묶고 거울을 확인하자 간신히 보이는 푸른 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하나쯤 그녀가 부탁한 바를 들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이 방에 머물게 된 후, 처음으로 방을 나온 것이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빠르게 복도를 달려가는 그를 보고 마족들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섬멸해야 하는 마족들에게 신경을 쓰는 대신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제냐의 흔적을 되짚는 것에 집중했다.
다행히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성력은 강하게 느껴졌다.
‘지하야.’
잠시 뒤, 그는 제냐의 성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 * *
레라지에는 갑자기 창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정체불명의 사내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얼굴이 전부 가려져 있긴 하지만 훤칠한 키와 몸의 비율. 그리고 살짝 젖은 티 사이로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굴을 죄다 가려 놓고 있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레라지에는 옷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과 그 눈을 우아하게 만들어 주는 촘촘한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걸 홀린 듯 바라봤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사내가 깨진 거울 앞으로 다가가자 레라지에는 정신을 차렸다.
“거기는 안 되네. 괜히 다가갔다가 마법에 휘말려.”
레라지에가 거울의 마법을 해제하고 있는 베리스 백작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마법을 해제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사내가 레라지에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제냐가 여기 있습니까?”
맙소사, 목소리까지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레라지에는 말이 잘린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내가 제냐를 언급했다는 걸 깨닫고는 손뼉을 쳤다.
“오, 설마. 그대가 제냐의 연인이라던 그자인가?”
레라지에가 그레모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 것은 베리스 백작에 대한 악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든 일정 내내 베리스에게만 신경을 곤두세운 건 아니었다.
베리스는 그 정도로 가치가 있지도 않았고, 또 일정 첫날 아주 좋은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성력이라니!
안 그래도 작지 않았던 관심이 더욱 커졌고, 당연히 레라지에는 마왕성 내 제냐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레라지에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못마땅함이 컸다. 제냐의 곁에 괜한 어중이떠중이가 함께 있어 그의 심미안을 망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 살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충 처리해 버리려고 했는데……. 제냐의 남자 보는 눈이 나쁘지는 않았다. 옷 취향이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잘생긴 애들은 뭘 해도 좋았다.
얼굴을 가려도 저렇게 잘생겼는데, 얼굴을 보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레라지에는 사내를 향한 궁금증을 무럭무럭 키웠다.
“그래, 제냐가 거기 있긴 한데. 우리가 잘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고는 수줍은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운을 뗐다.
“그런데 다른 건 아니고. 그대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당연히 제냐를 구해 내겠지만, 겸사겸사 얻어 낼 수 있는 건 얻는 게 좋지 않을까?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에 바닥을 내려다보며 꼼지락거리던 레라지에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얼굴에 두른 그 옷 좀 풀어 주면 안 될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상함에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대?”
레라지에가 허탈한 눈으로 텅 빈 자리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베리스가 비웃음을 던졌다.
“꼴좋네.”
하지만 레라지에는 그 빈정거림을 눈치채지 못하고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으음.”
레라지에의 붉어진 얼굴에 베리스가 질색하며 물었다.
“지금 좋아하는 거야? 미쳤어?”
레라지에는 그런 베리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랑은 참 아름답지!”
그리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사람이 하는 사랑은 더욱 아름답다고 외치는 레라지에에게 베리스가 혀를 찼다.
“그래, 이런 놈이었지.”
베리스가 짜증 나는 얼굴로 그의 옆에서 한 발자국 더 멀어졌다. 하지만 레라지에가 그만큼 더 다가와 베리스의 곁에 매달리며 외쳤다.
“얼른 마법을 풀어, 그리고 제냐에게 정식으로 소개받아야겠어!”
그 광기 어린 모습에 베리스는 레라지에가 정말 그 사내의 외양에 반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에 미친 놈. 이번에는 얼굴이 채 보이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까지 넋을 잃는지 이해가 안 갔다. 지금도 사라진 사내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걸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사내가 떠난 자리에 남은 저 흉포한 기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한심하긴.’
베리스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레라지에를 냉정하게 쳐 냈다.
“굳이 이쪽에서 안 풀어도 알아서 풀고 나올 것 같은데.”
“응?”
베리스는 레라지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을 찢어 내며 거울 속으로 사라지던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못 느꼈어? 마법에 휘말린 게 아니라 강제로 헤집고 들어갔잖아.”
마법을 깨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 마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마법을 역순으로 풀어내는 것. 둘, 압도적인 힘으로 마법을 이루는 마력을 찍어 누를 것.
사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두 번째 방법이었다. 마법에 휘말린 이가 있어서 마법을 다 깨 버리진 않은 것 같지만.
지금처럼 마법에 당한 대상자가 있는 경우에는 어정쩡하게 힘을 사용하면 오히려 문제가 커졌다. 마법에 걸린 대상자의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레라지에와 베리스는 힘으로 마법을 찢어 내는 대신 역순으로 마법을 풀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아무리 베리스가 마법을 풀어내는 중이었다고 해도 그자는 너무나 쉽게 마법을 헤집었다.
“평범한 자가 아니야.”
정신 마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마법에 걸린 대상자 외에 다른 이들의 간섭을 막던 방어막을 깔끔하게 뜯어냈다. 가진 힘도 대단했지만 그 힘을 제어하는 능력도 엄청났다.
“이 기운은…….”
아주 잠깐 드러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둡고 질척거리면서 동시에 광활한 그 힘은 그들의 정점에 있는 마왕 마르바스와 엇비슷할 정도였다.
“이 정도 힘을 가지고도 귀족이 아니라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마족 같은데.”
살짝 기운이 다른 것 같지만, 원래 각성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족들은 기운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결론은 그들은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비네도 있고 알아서 나올 거야.”
“확실히, 힘이 대단한 것 같긴 한데.”
레라지에의 동의에 베리스가 만들어 둔 마력식을 흩트리려는데 손목이 붙들렸다.
“우리가 도와주면 더 빨리 나오지 않겠나?”
“뭐?”
“얼른 얼굴을 보고 싶다네.”
레라지에의 반짝거리는 징그러운 눈에 베리스가 그 손을 얼른 밀어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네가 해.”
하지만 레라지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청소할 때 마법을 사용해도 좋아. 나도 조금 도와주지.”
레라지에가 둘의 싸움과 거울에서 발동된 마법 탓에 더욱 엉망으로 더러워진 창고를 가리켰다.
“그레모리 공작이 그대들의 처분을 전적으로 내게 맡긴 것을 알지? 빨리 끝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자기가 트집을 잡으면 이 말도 안 되는 처벌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하아.”
베리스는 이게 그냥 허세가 아님을 알았다. 베리스의 한숨에 레라지에가 싱글벙글 웃었다.
“응? 그대도 친우가 걱정되지 않나?”
결국 뭐가 됐든 베리스가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말 바꾸기만 해 봐.”
신경질을 내면서도 베리스가 다시 마력을 움직이자 레라지에가 환하게 웃으며 거울을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기대감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