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는 어머니에게 성력을 썼다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손바닥에 약하게 성력을 둘렀다.
‘꿈이 아니야.’
몸에 맴도는 힘과 힘을 쓰자마자 느껴지는 피로는 거짓이 아니었다.
[공주님!]
[아스트리아 님, 정신 차리세요!]
어린아이의 주변으로 사용인들이 몰려들었다. 제냐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비네가 덤덤하게 말했다.
“너군.”
제냐도 큰 반응을 내보이진 않았다.
“그렇네요.”
제냐는 사용인들의 틈을 비집고 그녀를 안은 채 사라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던 어머니의 얼굴을 이렇게 다시 볼 수 있게 될지 몰랐는데.
지금이 과거를 회상하기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시선이 제멋대로 어머니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때 꼭 지금 상황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비네가 말했다.
“나보다 약한 네가 타깃이 된 모양인데.”
“네, 그래요.”
“이동해도 되겠나? 이동할수록 과거의 기억이 계속 나올 거다.”
마족의 앞에서 그녀의 기억이 샅샅이 파헤쳐진다니,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이렇게 과거의 기억일 뿐이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 최근의 기억까지 보여 준다면?
“최악이네요.”
용사와 관련된 기억까지 보인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제냐가 두통이 이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다 보지 않는 방법도 있나요?”
“밖에서 마법을 깬다면 가능하겠지.”
그렇다면 레라지에와 베리스를 믿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두 마족이 제냐와 비네가 사라지고 나서 싸움을 멈추긴 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쪽을 신경이나 쓰고 계실까요?”
“그러길 바라야지.”
비네 역시 그 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제냐는 막막함에 꽉 막히는 가슴을 두드리며 방향을 정했다.
“일단은 가시죠.”
제냐는 레라지에를 믿어 보기로 했다. 정확히는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는 레라지에의 특성을 믿기로 한 것이다.
‘되도록 최근의 기억이 나오기 전에 구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모든 걸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기억에 꺼릴 게 없는 척 표정 관리하기.
제냐는 또다시 변하는 주변 풍경을 보며 비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똑, 똑, 똑.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눈을 뜨자 시커먼 어둠이 그를 반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붉은 것이 가득 눈에 들어왔다.
이미 한가득 고인 웅덩이 위로 피가 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웅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기가 무섭게 그의 손바닥 위로 새빨간 피가 떨어졌다. 한 방울을 시작으로 몇 방울 더 떨어진 피가 손가락 틈 사이로 굴러떨어졌다.
질척거리고 뜨거운 그 감촉에 루미에르는 이것이 그의 생각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정신없이 그 피를 훔쳐 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닦아도 피는 계속 떨어져 그의 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는 어느새 본래 색을 찾아볼 수도 없이 가득 젖은 손을 내려다봤다.
한 방울로 시작된 그것이 그의 손 전체를 덮고 팔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내렸다.
한번 시작된 이것은 혼자 힘으로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지워 내려 해도, 아무리 멈춰 보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
약간의 호기심과 안타까움. 그리고 내가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무지에서 시작된 호의로 인한 결과가 그의 온몸을 옥죄였다.
다시 깨끗해질 수 없다는 걸, 다시 순수해질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던 그날.
모든 걸 포기했다. 고뇌도, 슬픔도, 계속 되뇌던 정의도.
감정을 지우니 생활은 편해졌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을 본 이들이 흠칫 놀라면 입꼬리를 당겼다.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남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늘 입가에 달고 살던 웃음이었기에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습관처럼 웃음을 흘리고 검을 휘두르면 그 누구도 그가 텅 비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너, 눈이 죽어 있네.’
그 사람을 제외하고.
웃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아니,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당연한 건가.
누군가 자신의 눈을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던 것이 얼마 만의 일일까? 입을 꾹 다문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명령받은 대로 움직였고, 그 명령에 토를 단 일은 없었다.
동료들이 이끄는 대로, 신전에서 요구하는 대로, 황실에서 부탁하는 대로 군말 없이 묵묵하게 일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들도 세상이 더 나아지는 걸 바랄 테니까.
[혼란에 빠진 세상을 구원해야지.]
의아함이 생겨도 눈을 감고, 원하는 것이 있어도 침묵했다.
입을 다무는 것이, 아무런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익숙해졌다. 누군가 의견을 물으면 약간의 웃음만 보이면 됐다.
그렇게 피를 가득 뒤집어쓰고 돌아오면 사람들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칭찬을 건넸다.
[역시 대단해. 넌 변함없는 우리들의 용사다.]
변한 것이 없다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입술을 달싹였던 것도 같다. 뭔가 말을 하고 싶어서,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그 전에 사람들은 등을 보이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너 따위의 이야기에는 관심 없다는 것처럼. 네가 입을 여는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처럼.
텅 빈 안은 그럼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고, 이미 다 버린 뒤이니 새롭게 멍이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피에 젖은 손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피가 말라붙고 굳어 더 끔찍해진 그의 손.
이 말라붙은 피를 닦아 내기 위해서는 다시 저 핏물에 손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피에 손을 넣어 열심히 손바닥에 있는 것을 지워 내 봤자, 아까보다 더 큰 흔적들이 그에게 남을 텐데.
‘노력해 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순응하라고.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입을 다물고, 웃음만 지으면 된다고. 그러나 그 속삭임이 귀에 닿기 직전.
머리를 쓸어 주는 부드러운 손짓과 함께 하얀빛이 그를 감쌌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것이 손에 닿자 거짓말처럼 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핏물도, 이미 단단하게 굳어 버린 흔적도 자잘하게 부서져 내렸다.
그러자 그 안에 숨어 있던 그의 손이 나타났다. 손을 감싼 빛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하얗고 깨끗한 손이었다.
되돌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손.
그걸 멍하니 눈에 담는데, 빛이 약해지면서 보랏빛 눈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아.”
번쩍 눈이 떠졌다.
뻑뻑한 눈을 손으로 누르며 숨을 몰아쉬다 그 모든 게 꿈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이곳, 마계에 도착한 이후 몸은 편해졌는데 잠이 들면 종종 과거의 일이 꿈속에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여자가 함께 있는 밤에는 잠을 자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있는 시간에 잠을 자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서, 결국 잠을 자면 꿈을 꾼다는 걸 여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제냐.”
마계에서 사는, 남자를 구해 준 인간 여자.
제냐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인간이 마왕성의 시녀라는 것도 이상했지만 제일 이상한 건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잘해 주는 것치고는 과하게 다정하다는 점이었다.
귀찮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도 냉랭한 얼굴과는 달리 눈빛과 행동은 친절했다.
이제껏 그를 이용하려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봄바람 같은 얼굴로 뱀 같은 시선과 몸짓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냐를 대하는 게 어려웠다. 이제껏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듯 적당히 웃어 주고 적당히 이용당해 주면 되는 걸까?
직접적으로, 당신에게 다가가는 건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이니까.
당신이 짐작했던 대로 나는 용사고, 도와준 보답으로 원하는 것을 이뤄 주겠다고 말하면 제냐와의 일은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으니 제냐는 이곳에, 그는 인간계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만 하던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제껏 그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다 들어주며 살아왔다. 그러니 제냐의 부탁이 어려울 것 같다거나 그녀가 이상한 부탁을 할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에게 부탁하던 이들은 어머니에 의해 선별된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그의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쉬고 싶어.”
정확히 말하면 그를 품어 주는 성력을 가진 사람의 옆에서, 목적이 있다고는 하나 따뜻한 눈빛을 가진 사람의 옆에서 쉬고 싶었다.
악몽을 꾸다 간질거리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난 그 밤. 나긋나긋한 말투와 약간 웃음기가 섞여 있던 그녀의 입가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죽을 만큼 노력하지도, 웃어 주지도 않았는데도 너무 잘해 줘서,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웃어 주면 더 잘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예전처럼 미소를 머금고 제냐를 대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큰 효과가 있진 않았다. 제냐가 웃는 그를 어색해했기 때문이었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이제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진 않지만 웃는 그를 볼 때면 목뒤나 귀가 빨개지는 그녀를 알았다.
그가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수확이기도 했다. 부끄러워하는 제냐를 지켜보는 건 그에게 다른 종류의 충족감을 줬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껏 그를 보며 온몸을 붉게 물들이던 이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왜 그녀는 다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