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을 한 것인지, 가까이 다가선 용사의 몸에서는 따뜻한 훈김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온기와 달리 손바닥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냉담했다.
그녀를 향한 눈빛이 아님에도 몸이 바짝 긴장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용사가 다시 제냐를 쳐다봤다.
푸른 눈에 진 검은 그림자는, 가까이 붙어 선 거리 때문만은 아닐 게 분명했다. 제냐가 변명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 피가 아니…….”
“누군가요?”
그와 동시에 튀어나온 물음.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음장 같은 눈은 제냐의 얼굴을 훑으며 다른 상처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꼭 대답을 강요하는 것처럼 검지로 제냐의 입가를 두드렸다.
부드러운 손짓이었고, 정말 닿은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걸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제냐가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말했다.
“제 피가 아니에요. 레라지에 후작님의 피가 묻었는데, 저를 지켜 주시다가…….”
용사의 굳은 얼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제냐의 얼굴을 붙잡더니 조금 더 강하게 볼을 문질렀다.
물기가 있는 용사의 손에 말라붙은 피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가락 끝이 거칠어서 얼굴이 따끔거렸다.
“더러운 게 묻었네요.”
‘더러운’을 발음하는 목소리에 드글드글한 혐오감이 느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제냐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제냐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생각처럼 그게 잘되진 않았지만.
몇 번 더 제냐의 얼굴을 문지르던 용사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제냐는 용사의 눈이 힐끗 아래로 향한 걸 발견하고 재빨리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미쳤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용사가 놓으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제냐는 그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제냐, 얼굴을 닦아야 해요.”
누가 몰라? 이 남자는 지금 문제가 뭔지 모르는 건가?
순간 울컥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덕분에 지금 상황이 얼마나 특별한 건지는 알 수 있었다.
‘말을 하잖아!’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라 입을 열었다. 처음 이름을 부를 때처럼 갑작스럽긴 했지만 짧기는 해도 서로 대화를 주고받기까지 했다.
제냐는 흐리멍덩하던 눈에 힘을 주고 용사를 쳐다봤다.
“말을 했네요?”
용사가 눈을 내려 제냐를 쳐다봤다. 금발에서 뚝뚝 흐르는 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흔적을 따라 시선을 내리던 제냐가 평소보다 색이 짙은 그의 입술을 보며 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말은 하실 건가요?”
* * *
레라지에는 예정된 시간에 딱 맞춰 작업을 중지시켰다. 저녁은커녕 밤새 베리스를 붙잡고 온갖 트집을 다 잡을 것 같았는데 생각 외로 깔끔한 마무리였다.
때맞춰 그레모리 공작가에서도 마차를 보내와 그들은 더 빨리 헤어질 수 있었다.
베리스 백작을 따라 마차에 올라타려던 비네 자작이 제냐에게 다가온 것도 그쯤이었다.
“자작님?”
햇볕이 도는 숲보다는 늪지의 어두컴컴한 녹색을 닮은 날카로운 눈이 제냐를 내려다봤다.
“꼭 네가 해야 하나?”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왜 다가왔는지 알아차린 제냐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폐하께서 명령하셨으니까요.”
못마땅함을 숨기지 못한 비네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도대체 폐하께서는 뭘 믿고 몸을 지킬 능력도 없는 너를 보내신 거지?”
딱 제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저도 정말 잘 모르겠네요.”
나름대로 진심을 가득 담은 답이었는데 그게 태평스러워 보였던 것 같다. 정말 죽을 뻔했던 걸 모르냐며 미간을 좁히던 비네가 짧은 녹색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괜히 알짱거려서 귀찮게 하지 말고 오늘처럼 레라지에 옆에만 붙어 있어.”
말투는 저래도 그녀의 볼을 살피는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 일이 많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제냐가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작님.”
“내가 언제……!”
“자작님?”
팍, 붉어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던 비네는 그를 부르는 그레모리가의 가신에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떠났다.
두 마족이 그레모리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성을 떠나자 레라지에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레라지에 님.”
매끈한 미소를 띤 레라지에가 노래를 부르듯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대는 달빛이 잘 어울려. 하얀 얼굴이 빛이 나는 것 같군.”
“감사합니다.”
제냐는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얼마나 더 그에게 잡혀 있어야 할까 가늠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레라지에는 질척거리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오늘 많이 피곤했을 테니, 아쉽지만 이만 가 보지.”
제냐는 빈말로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받은 도움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레라지에가 그러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감사는……. 나야말로 그대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그러고는 회색빛 눈을 곱게 접으며 눈웃음을 살살 흘렸다.
“훗날,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한 번 더 봤으면 좋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레라지에 님.”
그러나 레라지에가 떠나고 나서도 제냐는 곧장 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용인들이 동정과 호기심이 섞인 얼굴로 제냐의 주위를 감싼 것이다.
“오늘 싸움이 있었던데, 휘말리진 않았어?”
“네가 피를 한가득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역시 한동안 지하로는 가지 않는 게 좋겠지?”
제냐는 꼭 필요한 말을 골랐다.
“싸움에 휘말리긴 했는데, 다치지는 않았고. 지하로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가볍게 그들의 질문에 답해 준 제냐는 사용인들이 더 몰려오기 전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침대에 앉아 있는 용사와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레 오늘 그에게 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의 그의 반응도.
‘…….’
‘더러운’을 말하던 용사가 마족을 굉장히 싫어하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당장 마왕을 처리하지도, 그렇다고 마왕성을 떠나지도 않는 걸까?
혹시 뭔가 그녀는 모르는 어떤 계획이 있는 건 아닐까?
제냐는 그녀가 출근을 시작한 후,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친근한 척 웃던 그의 모습을 되새겼다.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야.’
그렇게 해석하면 용사의 행동이 전부 이해가 됐다. 자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제냐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고.
이리 굴지 않아도 그가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를 도와줄 텐데.
전부 제냐의 추측일 뿐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가 어떤 상태이든 그는 용사가 맞고, 그녀를 구원해 줄 것이다.
제냐는 그냥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용사를 지켜보다가 그가 원한다면 그를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말을 안 하면 어떤가? 무언가 숨기면 또 어떻고? 용사가 마왕을 무찔러 주기만 한다면, 제냐는 그걸로 족했다.
제냐는 눈을 깜빡거리는 용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녀왔어요.”
* * *
다음 날 아침.
한번 의심을 시작하자, 용사의 행동 모든 것에서 다른 의미가 포착됐다.
순하게 그녀의 손길을 받으면서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저 시선도, 방긋방긋 웃는데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은 묘한 표정도.
하지만 제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용사의 시중을 들었다. 식사를 챙기고 씻는 시간을 정해 주고, 옷을 골라 줬으며 흐트러진 그의 맵시를 정리했다.
“좋아요, 이 정도면 되겠어요.”
제냐는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용사가 방을 빠져나와도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혔다.
뭐, 그래 봤자 저 화사한 얼굴 때문에 절로 시선이 갔지만, 평생 저 얼굴을 달고 다닌 건 용사였다.
‘알아서 얼굴 정도는 숨기겠지.’
얼굴을 숨길 방법이 있다면 굳이 어두운 계열의 옷을 입히지 않아도 됐겠지만. 이건 어떻게든 용사를 도와주고 싶은 제냐의 자기만족이었다.
제냐는 방을 나서기 전, 전날 그랬던 것처럼 주의 사항을 읊었다.
“오늘도 지하 창고에 있을 거예요. 레라지에 님과 함께요.”
네 얼굴을 알고 있는 레라지에는 지하 창고에 있으니 돌아다닐 거면 거기는 피하라는 뜻이었다.
“지하에는 위험한 물건들이 많거든요. 귀족이 셋이나 되니까 별문제는 없겠지만.”
무력으로 치면 최상위인 귀족들이 셋이나 지하에 있으니 그건 미친 짓이라는 것도 알려 줬다.
“…어제처럼 소란스러울 수도 있긴 하겠지만요. 원래도 베리스 백작이나 비네 자작은 자주 싸우는데, 보니까 레라지에 후작과 베리스 백작도 사이가 안 좋더라고요?”
적당히 귀족 간의 관계도 알려 주고.
“그러니까 큰 소리가 나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싸움이 나면 사용인들도 아닌 척 모여들어서 더 시끄러워지거든요.”
만약 돌아다닐 거면, 그 소란스러운 틈을 이용하는 게 좋겠다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금 한 말이 조금 수상쩍진 않았나 돌아보던 제냐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잔소리가 길어지긴 했지만, 어제 그의 행동을 돌아보면 오늘 그녀가 평소와 조금 다른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용사도 뭔가 다른 걸 느끼지 못했는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각인지 뭔지, 어딘지 모르게 전날보다 웃음이 조금 더 진한 것도 같았다.
“저녁 식사 전에 돌아올게요.”
너도 들키지 않게 그 전에 돌아오라고 인사를 건넨 제냐는 후련하게 방을 나왔다.
전날 그 창고에서 있었던 일이 있음에도 지하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