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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2)화 (1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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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제냐? 잘 지냈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친근하게 구는 베리스 백작.

“앞에서 거치적거리지 말고 비켜, 인간.”

차갑고 신경질적인 비네 자작.

허구한 날 싸워 대는 덕에 늘 함께 묶이는 두 마족 중 더 위험한 쪽은 예상외로 다가가기 쉬운 인상의 베리스 백작이었다.

항상 웃고 있지만 딱 봐도 눈이 뱅글 돌아가 있는 게, 제냐처럼 약한 인간은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부류였다.

실제로 그와 관련된 소문들도 죄다 흉흉하고 끔찍한 것들뿐이었다. 자기 영지에 있는 마족들을 기분에 따라 죽여 댄다나?

그에 반해 비네 자작은 틱틱거리는 말투와 달리 딱히 무서운 느낌은 없는 마족이었다. 베리스와 싸워 어느 성을 날려 먹었다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딱히 말이 돌지도 않았다.

뭐가 됐든 귀족들과 엮이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베리스 백작보다는 비네 자작이 더 나았다.

‘하지만 오늘은…, 둘 다 상태가 별로네.’

말투가 가볍고 번잡스럽긴 해도 베리스 백작은 늘 깔끔한 외양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따라 좋게 말하면 소탈해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꾀죄죄해 보였다.

그 옆에 있던 비네 자작 역시 베리스 백작만큼은 아니어도 딱히 말끔한 인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냐는 그 이유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냐, 잠시 내 뒤로 가 있는 게 좋겠어.”

베리스 백작과 비네 자작이 성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레라지에가 제냐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그녀를 뒤로 물렸다.

제냐는 사양하지 않고 레라지에 뒤에 냉큼 숨어들었다. 몸을 사리기가 무섭게 기 싸움이 시작됐다.

“이런, 베리스 백. 이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인지.”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럼에도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라지에의 뒤에 서 있었기에 제냐는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베리스의 얼굴만 봐도 레라지에가 지금 얼마나 얄미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할 일이 없어? 치렁치렁 꾸미고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지?”

제냐는 주위에 있던 사용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겁을 하며 자리를 떠나는 걸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마력 싸움을 하는 건지, 뒤로 물러나는 사용인들의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이 일렁거렸다. 레라지에의 뒤에 숨어 있는 덕에 마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슨 일은. 그저 내가 그레모리 공작을 도와주기로 한 거지.”

“하, 언제부터 공작의 하수인이 된 거지?”

비웃듯 날카로운 베리스의 말에 겉으로나마 웃음을 유지하던 레라지에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다.

“그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통 같은 입은 여전하군.”

“네 소름 끼치는 느끼한 웃음도.”

레라지에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대꾸했다.

“느끼하다니, 이건 아름다운 웃음이라는 거야.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웃음을 고안한 거지.”

“역겹게 그딴 걸 고민한단 말이야?”

역겨운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놀랍긴 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람찬 일 아니겠는가? 그대처럼 기분에 따라 예술 작품들을 다 때려 부수는 저급한 수준을 가진 마족은 모르겠지만.”

흥분했는지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대충 두 마족이 왜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지 알 것 같았다.

“매일 그렇게 교양 없이 싸워 대니 오늘과 같은 일도 있는 것 아니겠어? 배틀이 끝난 뒤, 공작가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지?”

‘왜 꼴이 저 모양인가 했더니.’

의문은 해소됐지만 이제 대화를 중지시켜야 할 것 같았다. 중앙 홀의 바닥이 흠집이 나다 못해 날카롭게 파이고 있었다.

아악-! 죽어 가는 비명 소리에 놀라 제냐가 고개를 돌리자 망가지는 성을 보며 입을 막은 사용인들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2층 계단에 매달린 사용인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뒤처리가 더 힘들어지기 전에 두 마족을 말려 달라는 뜻이었다.

‘왜 다들 나한테 불가능한 걸 요구하는 걸까.’

제발, 입을 뻐끔거리는 사용인들을 바라보던 제냐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레라지에의 이름을 불렀다.

“레라지에 님, 이제 가실까요?”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레라지에는 순순히 제냐를 돌아봤다.

“그래, 이제 가야지.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것과 오래 대화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제냐는 그제야 베리스 백작과 비네 자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분을 뵙습니다.”

베리스 백작은 평소처럼 생글 웃는 대신 레라지에를 죽일 듯 노려봤다.

제냐는 발밑에 희뿌옇게 가라앉는 먼지들을 바라보다가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비네 자작과 눈이 마주쳤다.

‘잘 보여야겠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두 마족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비네 자작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제냐가 또 다른 목숨줄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는데 레라지에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냐,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안내해 주겠나?”

제냐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라지에가 손을 내밀기 전에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베리스와 레라지에의 사이가 너무 나빴다. 괜히 레라지에와 친근한 모습을 보였다가 화를 사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과 같은 기 싸움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눈먼 공격에 맞아 다치는 건 딱 질색이었다.

* * *

좀 조용히 이동하나 싶었는데 창고 앞에 도착하자마자 레라지에가 연극을 하듯 큰 동작으로 베리스를 돌아봤다.

“그럼, 수고하게!”

환하게 웃으며 던지는 인사는 누가 봐도 얄밉기 짝이 없었다.

“하!”

유치해 죽겠다며 베리스가 크게 코웃음을 터트렸지만, 레라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성질을 긁었다.

“그 선명한 푸른 머리가 먼지 범벅이 되겠지만…, 그편이 더 그대에게 잘 어울리지 않겠나?”

이번에는 어디에 숨어야 하나 주변을 살피는데 베리스가 긴 한숨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후작 말대로 먼지 구덩이에 처박혀도 이 미모가 죽을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대에게 인정받다니, 내 외모도 꽤 볼만한가 보다며 손을 살랑 흔든 베리스가 비네를 끌고 휙, 창고로 들어섰다.

‘싸움이 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제냐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레라지에를 붙들고 창고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베리스와 비네에게 말을 걸기 전,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로 했다.

“저 화려한 왕관이 보이세요, 레라지에 님?”

금방이라도 베리스를 향해 걸어갈 것 같았던 레라지에가 제냐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봤다.

“저건!”

눈을 반짝 빛낸 레라지에가 발을 동동 굴렀다.

“마음에 드는데. 저 목걸이도!”

제냐는 창고 안 보물들에 흠뻑 빠진 레라지에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한동안은 싸우지 않겠지.’

벌써부터 힘이 쭉쭉 빠졌다. 제냐가 지친 얼굴로 창고를 쭉 둘러봤다.

웬만해서는 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 했는데, 얼떨결에 창고 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제냐는 보물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레라지에를 힐끗 쳐다봤다.

“레라지에 님, 저는 잠시 창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까요?”

보물들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쉽게 내보내 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레라지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릴? 폐하께서 내게 그대를 맡기지 않았어?”

“…그러니까 창고 밖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대도 재미있는 소릴 하는군? 내 옆만큼 안전한 곳도 없다네!”

지금까지 하는 꼴을 보면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자신감이었다.

“그대가 다치면 내 어찌 폐하를 뵐 수 있겠나? 내가 옆에 딱 붙어서 그대를 지켜 주겠네.”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또 창고 밖으로 나가겠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라지에가 다시 보석들에 관심을 돌렸다.

“저 왕관을 폐하가 쓰시면 정말 잘 어울릴 거야! 그분의 위엄이 배가 되겠지?”

제냐는 레라지에가 가리킨 화려한 보석이 가득 박힌, 쓰고 있으면 목이 꺾일 것 같은 왕관을 보며 생각했다.

‘용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건 콩깍지 같은 게 아니었다. 용사는 저 화려한 왕관에도 기죽지 않을 만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애당초 마왕은 화려한 디자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속마음과 달리 제냐는 레라지에의 말에 냉큼 동의했다.

“그렇네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그렇지?”

레라지에가 손가락을 까딱여 왕관을 가져왔다. 붕 떠오른 왕관을 멋들어지게 낚아챈 그가 물건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흐음, 용사도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에 제냐가 화들짝 놀라며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그러자 레라지에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봤다.

“응? 왜 그러지?”

제냐는 낭패한 기색을 숨겼다. 이렇게 크게 반응할 일이 아니었는데, 누가 봐도 지레 찔린 모양새였다. 제냐가 입 안의 살을 깨물며 답했다.

“…아니, 폐하보다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신 게 의외라서요. 폐하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하실 줄 알았어요.”

세상에, 핑계 같지도 않은 형편없는 대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회색빛 눈이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제냐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제냐는 레라지에의 무표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처럼 최대한 태연하게 레라지에의 시선을 마주 봤다.

여기서 뒤로 물러나거나 더 이상한 말을 지껄이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지도 모른다.

겁먹지 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시린 회색빛 눈이 그녀의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이런, 제냐.”

그러고는 돌연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뭐야?’

제냐가 혼란스러워하는데 레라지에가 눈을 깜빡거리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름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

꼭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그대 역시 폐하만큼 아름답다네. 귀엽기도 하지.”

정말 귀여워 죽겠다는 듯 눈을 길게 접은 남자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앓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제냐는 목뒤로 돋는 소름을 무시하고 레라지에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쓸데없이 차가운 인상 탓에 괜한 겁을 먹은 것이 짜증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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