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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9)화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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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순간부터 함께하던 여자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여자가 그를 쳐다볼 때는 대체로 늘 걱정이 섞여 있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 그랬다.

말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여자가 많이 답답해한다는 걸 알았지만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늘 짓던 미소라도 지어 주면 여자가 좀 안심할까 싶었지만 입꼬리가 굳은 것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몇 번이나 그를 돌아보던 여자가 결국 출근을 하겠다며 방을 떠났다. 그리고 남자는 이곳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아주 긴 시간 홀로 시간을 보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남자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푸른 눈이 천장을 가만히 쳐다봤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눈이 째깍거리는 초침에 맞춰 깜빡거리다가 이내 완전히 감겼다.

그러자 그 아름다운 외모로 숨만 쉬어도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은 남자의 분위기가 흐릿해졌다.

[예언의 아이가 분명…….]

길고 고급스러운 재질의 하얀 옷을 입은 이들이 쓰러져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 저주를…….]

남자는 이해하지 못할 대화들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매달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구해 주세요, 저희를 버리지 마세요!]

절박한 그들의 모습에 나서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내디딘 수십 번의 여정. 몰아치는 마법과 무기들, 발밑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핏물과 비명들.

[네 패배가 알려져선 안 돼. 늘 성공해야만 한다.]

상처를 후벼 파는 서릿발 같은 금안. 부드럽게 어깨를 쓰다듬다가 손가락을 박을 듯 그를 조여 오던 손. 음산하게 그를 압박하던 목소리.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니 다들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럼에도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끝에 가서는 모두가 똑같았다.

[모, 몰라. 나는 이런 것 따위 모른다고!]

그렇게 감정을 지우고 단순히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수행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명령을 거부하고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마계의 하늘을 연상시키는 보라색의 눈이었다.

차가운 눈매와 귓가에 감도는 낮은 목소리.

“너, 눈이 죽어 있네.”

냉담한 말투와 직설적인 요구. 하지만 속이 훤히 보이는 그 맑은 보랏빛 눈은 말투와는 달리 다정해서.

“할 수 있는 한 내가 도와줄게.”

그의 몸을 감싸던 포근했던 그것을 가득 품고 있는, 별 부스러기가 가득한 눈을 마주하자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밀어내지 않는, 따뜻한 성력이 서린 손을 붙잡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 오래 너를 기다렸어.”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눈을 깜빡이다가 또다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품속의 시계를 꺼내 들었다.

19초, 20초, 21초…….

그리고 57초.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냐예요.”

‘제 이름은 제냐예요.’

움찔. 현재의 목소리와 함께 귓가에 맴도는 과거의 목소리에 남자의 손이 떨렸다. 건조하던 푸른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여린 빛이 어렸다.

하지만 주변을 탐색하듯 고개를 든 빛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모습을 감췄다.

“잘 있었어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여자의 하얀 얼굴을 쳐다봤다.

단정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을 가진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익숙하게 방을 돌아다녔다.

남자는 여자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자가 하는 모든 행동을 눈여겨 지켜봤다.

주변을 정리하는 꼼꼼하고 다부진 손놀림. 식사를 위해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입술.

여자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자 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시선이 많이 닿는 건 처음 마주했던 보라색이었다.

그때의 빛무리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여전히 시선을 뗄 수 없는 보랏빛 눈.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옅은 눈웃음을 흘렸다.

이 적막함이 싫지 않았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여자는 조용했다.

손에 쥐여 주는 수저를 붙잡고 싱싱한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남자는 순간 깨달았다. 이곳에는 귀를 아프게 하는 목소리도, 그를 찌르는 눈빛도, 억세게 그를 붙잡는 손길도 없다는 걸.

지금 이곳에 남은 건 달그락거리는 수저의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 그리고 눈앞의 여자가 내는 잔잔한 소리뿐이었다.

[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거야.]

혼자 있을 때면 늘 괴롭히던, 언제나 아프게 그에게 매달려 있던 목소리가. 잊을 만하면 귓가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목소리가 옅어졌다.

불안정하게나마 처음 느껴 보는 평온이었다.

그리고 그 평온을 깨달은 남자는 생각했다.

이 순간을 놓고 싶지 않다고.

* * *

퇴근 후 마주한 용사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태가 악화되지는 않은 것으로나마 위안을 삼기로 했다.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 피곤했던 제냐는 금방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녀는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아파.”

눈을 뜨고 싶지 않아 대충 손을 흔들던 제냐는 아까보다 강해진 통증에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일어나면서 아픈 손목을 몸 쪽으로 잡아당기는데, 강한 악력과 함께 악! 하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절로 고통의 근원지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제냐는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있는 하얀 손을 발견했다.

그 손을 타고 시선을 위로 올리자 정말 당연하게도 그 손의 주인인 용사가 보였다.

“손에 힘 좀…….”

붙잡힌 손이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한 것이 보였다.

결국 제냐는 바르게 누워 있던 몸을 반쯤 돌려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팔꿈치로 몸을 받치며 용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용사에게 닿지 못하고 어색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상태가 왜 이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식은땀을 보아하니,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불 빨아야겠다.’

어차피 갈아야 할 때가 되긴 했다. 침대보랑 다 같이 갈아…….

제냐는 점점 더 저려 오는 손에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멈췄다. 일부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더 마음 주지 않기 위해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손이 아파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속눈썹 사이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고여 있었다. 딱 봐도 절대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냐는 무언가를 참듯 불거진 용사의 턱을 바라봤다. 분명 심한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 끙끙거리는 소리 하나가 없었다.

‘말만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신음이나 비명도 내지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이랬으려나.”

쓰러진 그를 간호했을 때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따지자면 그때는 기절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꿈을 꾸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 이후로는 늘 이랬을까? 아니면 오늘만 그런 걸까?

작게 한숨을 내쉰 제냐가 손을 뻗었다. 땀에 젖어 이마에 흐트러져 있는 앞머리가 눈을 찌르고 있었다.

‘손을 놔줄 기미도 안 보이니까.’

어차피 악몽을 꾸는 거, 이대로 잠에서 깨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제냐는 이마를 덮은 금발을 걷어 냈다. 반쯤 드러난 이마도 반듯하니 참 잘생겼다.

용사의 소문에 잘생겼다는 말이 늘 함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계에 살면서 나름 잘난 얼굴들을 많이 본 제냐도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남은 머리카락도 뒤로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매일 머리를 빗겨 준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은 거슬렸다. 눈썹을 치켜올린 제냐가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넘겨 줬다.

“…뒤로 말고 옆으로 넘길까?”

짧긴 하지만 가운데에서 양옆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면 지금처럼 눈을 찌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 웃길 것도 같지만, 표정이 없어도 늘 잘생긴 남자니 이런 머리도 잘 어울릴지도 몰랐다.

이건 그녀를 초조하게 하는, 뜻 모를 눈빛으로 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조금 유치한 편이었다.

‘유치하면 어때?’

제냐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살살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그리고 반대쪽도 똑같이 머리카락을 넘기려는데 아무런 전조도 없이, 거짓말처럼 용사가 눈을 떴다.

어둠을 밝히는 푸른 눈을 마주 본 제냐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파도치는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옆으로 넘기려던 머리카락을 다시 뒤로 넘겨 줬다.

“빨리 다시 자요.”

그래서 내가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도 잊고, 뭔지 모를 악몽도 잊으라고.

제냐가 어린아이를 토닥이듯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 주자 끔뻑거리던 용사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편해진 것도 같았다.

몇 번 더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던 제냐는 아까보다 헐렁하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잠든 지 얼마 안 됐는데 지금 풀려고 하면 깨어나려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 또 손에 힘이 들어갈지 알 수가 없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은 잠이 소중했다.

그녀가 돈을 벌어야 용사의 식사도 배달해 주고, 그의 옷도 구해다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조심스레 고개를 든 제냐는 움찔 몸을 떨었다. 아니, 눈은 또 언제 뜬 거야.

제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용사를 보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이 손을 좀 놓아주지 않겠냐고 질문을 하려고 할 때였다. 그녀의 얼굴을 더듬던 푸른 눈이 곱게 휘어졌다. 처음 보는 용사의 미소에 놀랄 틈도 없었다.

미소와 함께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

“제냐.”

제냐는 배시시 웃는 그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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