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휴일은 왔던 것만큼 갑작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제냐는 휴일을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는 앞으로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엘리고스가 나서며 소문이 잠잠해지긴 했지만. 용사가 그녀의 방에 있는 이상,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비프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지금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굴곤 있지만, 제냐는 엘리고스가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동요하고 있었다.
‘왜 나섰지?’
엘리고스가 공적으로 제냐를 신뢰하긴 해도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앞으로 나설 이가 아니었다.
‘내가 따로 부탁한 것도 아니고, 마왕성 내부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왜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에 끼어든 걸까?
‘나한테 원하는 게 있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제냐는 우선은 당장 급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용사가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있을 수 있을까?
“하아.”
화장대 앞에 서서 발목까지 오는 단정한 검은 원피스를 정돈하고 어깨에 간신히 닿는 머리카락을 빗으면서 제냐는 용사를 훔쳐봤다.
전날 앞으로 변하게 될 일상을 설명해 주긴 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내일부터는 음식이 배달될 거예요.”
배달부로 오는, 새처럼 생긴 마물을 죽이면 안 된다고 설명을 더한 제냐는 그 뒤로 줄줄 걱정을 이어 나갔다.
그녀가 없는 사이 손님이 오면 없는 척해라, 앞으로 반나절 이상은 혼자 지내야 한다, 등등.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냐는 용사가 그녀의 말을 잘 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있지만 여전히 용사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때마침 거울 너머 시선이 마주친 용사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도우면 되겠냐고.
제냐는 거울 너머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을 보며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 먹을까요?”
그러고는 용사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오늘 아침 배달 왔던 빵을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아직 따뜻한 빵은 부들부들했다.
함께 온 신선한 우유를 그의 잔에 따라 주면서 제냐는 별다른 투정 없이 빵을 먹고 있는 용사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의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은지 용사는 빵만 우물거리며 제냐를 마주 봤다. 그 눈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없었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던 제냐는 방 안에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왕이 돌아왔다. 그 말은 이제 출근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제냐가 벌써부터 축축 처지려는 몸에 힘을 주며 빵가루가 묻은 용사의 입을 털어 줬다.
“자, 그럼 저는 이제 가 볼게요.”
시계를 들이밀며 화장실도 못 가게 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용사는 제냐가 출근을 한다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냐는 한숨을 삼키며 남은 빵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용사가 거절하지 않고 빵을 받아먹었다. 식사는 빼지 않고 잘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냐는 빵이 가득 들어차 뿔룩해진 남자의 양 볼을 보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지워 냈다. 다시 한번 남자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 주다가 재촉하듯 들려오는 종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뗐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리고 완전히 방을 나서기 전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사고 치지 말아요!”
여전히 정말 이 남자만 두고 방을 나가도 되는 건지 걱정됐지만 이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제냐는 문을 잠그며 마왕성의 꼭대기로 출근길에 올랐다.
“제냐, 오랜만에 출근이네?”
“아하하, 다시 마왕성이 소란스러워지겠어!”
“고생해!”
“제, 제냐. 안녕…….”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앞으로 잘 부탁해!”
친근하게 인사를 하는 사용인이 있는가 하면 겁을 먹고 그녀를 피하는 사용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한 제냐는 몇몇 사용인들의 이상한 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근무지에서 제냐는 성질 급한 상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다녀오셨나요?”
제냐는 그녀를 돌아보는 붉은 눈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머리 양쪽에 올라왔던 뿔과 등 뒤의 날개는 모습을 감췄고, 복장도 편안해 보였다.
한 손에 들고 있는 펜과 책상 위에 반쯤 부서진 펜들이 몇 개 보이긴 했지만 무난하고 평범했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마왕의 책상에는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질린 눈으로 그것들을 살피던 제냐가 마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따가워요.”
그러자 방에 들어온 순간 숨을 콱 막히게 했던 마왕의 기운이 잦아들었다. 여전히 피부가 조금 따갑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숨 쉴 만했다.
출전하거나 힘을 완전히 개방한 후에는 기운이 완벽히 갈무리되지 않아 늘 이런 식이었기에 제냐는 태연하게 마왕의 옆으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마왕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답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제냐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서류 뭉치를 건넸다.
‘바쁘게 부른 이유가 이거겠지.’
마찬가지로 늘 있던 일이었기에 제냐도 별다른 대꾸 없이 그에게 받은 서류를 들고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지긋지긋하고 지루한, 업무의 시작이었다.
제냐는 손을 바쁘게 놀렸다. 정말 급한 일은 엘리고스가 따로 처리했을 텐데,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넘쳐 났다.
‘꼭 일은 마왕 혼자 다 하는 것 같다니까?’
아니, 마계의 모든 일은 꼭 마왕과 엘리고스, 그리고 제냐가 모두 다 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자기들끼리 증식하고 있는 건……. 수많은 서류를 노려보던 제냐는 자리를 정리했다.
점심시간에 잠시 시간을 빼 만나고 온 용사는 딱히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식사도 했고, 얌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얌전한 모습을 봤음에도 뭔가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도대체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제냐는 한숨을 삼키며 새롭게 정리한 서류를 마왕에게 건넸다. 서류를 받아 든 마왕이 쭉 내용을 훑더니 급작스레 운을 뗐다.
“성이 소란스러웠다던데.”
“아.”
맙소사, 마왕에게까지 이야기가 넘어갔단 말인가? 막 용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탓에 더 크게 놀란 제냐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됐네요.”
그 답에 마왕이 고개를 들어 제냐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말없이 한참 동안 그녀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 시선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혹시 무언가 눈치챈 것일까?
제냐가 티 나지 않게 입 안의 살을 씹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설마, 모르나? 엘리고스가 네 소문을 막으면서 사용인의 목을 쳤다.”
제냐는 마왕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목을 쳤다고?
온건한 의미의 ‘목을 쳤다’로 상황을 받아들여 보려 했지만 마왕의 눈빛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참 마족다운 의미의 뜻임을 알아차린 제냐의 얼굴이 굳었다.
“…해고를 뜻하는 건 아니군요. 몇 명이나요?”
“한두 명은 아니야.”
그냥 나선 것도 아니고 사용인을 죽이다니.
‘너무 과해.’
고작 일 잘하는 사용인 하나를 도와주는 것치고는 너무 과한 처사였다. 미간을 좁힌 제냐가 물었다.
“왜 그러셨는지 아시나요?”
“그건 네가 알아봐야겠지.”
무심한 눈이 다시 서류로 향했다. 먼저 화제를 꺼내 놓고 막상 제일 중요한 건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태도에 신경질이 났다.
안 그래도 용사의 일로 정신이 없는데 엘리고스마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인 게 꽤 스트레스가 됐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일 것이다. 답지 않게 마왕에게 날카롭게 군 건.
“알려 주기 싫으신 건가요, 모르시는 건가요?”
그 뾰족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는 마왕이 고개를 들어 제냐를 쳐다봤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무덤덤해 보였으나 그녀를 살피는 붉은 눈은 탐색의 기운을 띄고 있었다.
질문을 하고 나서야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행동을 되돌리진 못했다. 이럴 때는 부러 더 당당하게 구는 게 나을 거라는 계산이 빠르게 섰다.
제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러신가요?”
마왕은 그녀의 행동을 지적하는 대신 가볍게 대꾸함과 동시에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제냐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마왕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궁금하면,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겠군.”
역시 조금 전 그녀의 태도가 거슬리지 않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충고 감사해요.”
스스로도 조금 전 태도에 문제가 있었음을 받아들이듯 이야기하자 분위기는 다시 풀렸다.
그 뒤 퇴근 시간까지 집무실은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제냐는 최대한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마왕은 그간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펜만 놀렸기 때문이다.
제냐는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위 서류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마침 딱 퇴근 시간이 됐다. 그러자 마왕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엘리고스를 찾아갈 건가?”
그러니까 아까 대화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제냐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당장은 말고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요.”
엘리고스의 의도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용사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엘리고스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최대한 엘리고스와의 만남을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쯧.”
마왕은 생각보다 그녀의 일에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는데 마왕이 혀를 찼다.
“엘리고스에게 간다고 그러면 서류 심부름을 시킬 생각이었는데.”
아, 그쪽이었군.
제냐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네 심부름을 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지만, 제냐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마왕이 붙잡기 전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