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남자가 있다며? 나중에 괜찮으면 소개나 시켜 줘.”
제냐는 생각과 달리 큰 소동 없이 마무리된 대화에 어안이 벙벙했다.
벌써 네가 이렇게 큰 거냐고 머리를 토닥이며 좀 간지러운 눈을 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그냥 평소와 다름없었다.
비프는 소문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제냐의 말에도 당연한 거라며 이미 신경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를 다독였다. 한동안 시끄러울 테니 방에서 식사를 하라며 도시락을 챙겨 주기까지 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 제냐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매만졌다.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비프가 마족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양손 가득 무거운 도시락을 바라보자 착잡함에 한숨이 나왔다. 제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까워진 그녀의 방을 쳐다봤다.
사용인들이 일하다 말고 내팽개쳤을 게 틀림없는 트롤리에서 적당한 옷도 찾아내긴 했는데.
‘떠나진 않았겠지?’
그 주인이 아직 남아 있을지가 문제였다.
용사의 상태만 멀쩡했다면 그가 그녀의 방을 떠나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용사는 절대 혼자 둬선 안 될 것 같았다.
‘동료들이라도 오면 편하게 보내 줄 텐데.’
한숨을 쉰 제냐는 용사가 놀라지 않도록 문을 두드렸다.
“제냐예요.”
자기 방에 들어가면서 노크라니 누가 보면 굉장히 웃길 모습이었다.
조심히 문을 연 제냐는 슬쩍 방 안의 모습을 살폈다. 다행히 용사는 그녀가 떠났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불로 몸을 가리지도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였다는 말이다.
제냐는 혹시나 다른 이들이 그들의 모습을 발견할까, 얼른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팔에 걸쳐 뒀던 옷을 용사에게 건넸다.
“적당히 눈대중으로 골라 왔어요. 아마 맞을 거예요.”
한 손에 그녀가 준 회중시계를 꼭 쥐고 있던 용사는 제냐가 건네는 옷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계는 내려 두고 옷을 입는 게 좋겠어요. 그 뒤에는 식사를 하죠.”
그리 말하면서 제냐가 시계를 돌려받기 위해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용사는 보란 듯 시계를 움켜쥔 손을 더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뭐야?’
물에서 건져 놓았더니 도리어 물건을 빼앗아 간다.
황당하긴 했으나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용사가 원한다면 시계는 열 개도 더 줄 수 있었다.
‘시계는 저것 말고도 많으니까.’
용사에게 물건을 강탈당한 상황을 애써 합리화한 제냐가 친절한 미소를 꾸며 냈다.
“마음에 들면 가져도 좋아요. 그럼 옷을 입을까요?”
제냐는 시계를 챙긴 자세 그대로 멈춰 있는 용사에게 한 발 더 다가가며 물었다.
“입혀 드릴까요?”
그게 싫다면 알아서 입으라는 말을 뱉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하지만 정말 당황스럽게도 용사는 보란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진짜 나보고 입혀 달라고?’
혼자서 입기 힘든 옷도 아닌데, 이걸 나보고, 단추를 채워 달라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다?
황족, 왕족, 귀족 중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부류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가 이럴 줄은 몰랐다.
뭔가 머릿속에 들어 있던 용사에 대한 인식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마왕보다 더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욕을 하며 상의를 입혀 준 제냐는 어정쩡하게 하의를 들고 용사를 쳐다봤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잠시 바지를 내려다보던 용사는 스스로 바지를 입었다.
그 뒤 이어진 식사에서도 그 이상 곤란한 일은 없었다. 가리는 음식이 없는지, 그는 제냐가 권유하는 음식들을 말없이 먹었다.
‘저 덩치가 그냥 나온 건 아닌가 보지.’
며칠간 방에 있던 군것질거리로 연명했던 제냐도 따뜻한 음식이 배에 들어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제냐는 과일을 몇 개 먹다가 방 한쪽에 마련된 티포트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부터 음식물을 씹지도 않고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는 용사에게로 빠르게 돌아왔다.
방을 나가는 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는데 용사는 그녀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처럼 제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꼭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모든 행동을 멈추는 용사의 모습은 많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일어나고 나서도 계속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지.’
물론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걸어도 아무런 답도 없고, 표정도 변화가 없어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노력해 봐야지.’
유의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반응을 끌어내 그의 호감을 사야 했다.
제냐가 다시 한번 어울리지 않게 활달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용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차를 마실까요?”
* * *
그레모리 공작이 신청한 배틀 소식에 시끄러웠던 마왕성은 며칠 전부터 새로운 화젯거리에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마왕의 전속 시녀인 제냐. 그리고 그녀의 연애!
“제냐가 연애를 한다고?!”
“그렇다니까?”
“쉬잇, 조용히 해. 총주방장님이 눈에 불을 켜고 계시더라.”
“아.”
몇몇이 즉시 입을 다물었지만 수군거림은 끊이질 않았다. 고작 인간일 뿐이지 않냐고 무시하기엔…….
“…어쩔 수 없잖아? 그 제냐인걸.”
마왕성의 일인자인 마왕과 이인자인 집사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마왕의 유일한 전속 시녀.
무력적인 힘은 이곳 마왕성 그 누구보다도 떨어졌다. 하지만 제냐를 건드릴 시 그녀의 뒤에 있는 집사와 마왕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최근에는 과거보다 빈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마왕성을 가득 채우곤 하는 마왕의 기운은 사용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제냐가 얼마 만에 시녀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인가를 두고 사용인들 사이에서 내기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3분!”
“에이, 3분은 견디겠지.”
“과감하게 하루는 어때?”
“뭐래? 너, 돈이 남아도냐?”
“원래 이런 건 도박이잖아? 어디 누구 일주일 부를 녀석 없어?”
“너만큼 제정신 아닌 놈이 없으니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