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보다도 더 반짝거리는 금발을 가지고 있고, 눈은 깨끗한 호수를 박아 넣은 것처럼 맑고 투명하대. 피부도 백옥 같고, 턱선이…….”
“그만해라.”
“레라지에 님이 그 넓은 품 안에 한 번 안겨 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셨다는데.”
넓은 품 안. 레라지에가 안길 정도라면 덩치가 꽤 있는 모양이었다. 덩치가 있다면 자연스레 힘도 셀 테고. 신체 조건은 무력에 큰 도움이 됐다.
오랜 기간 흙 아래 파묻혀 있던 희망이 싹을 내기 시작했다.
“그 정도래?”
“너까지?”
“하지만 레라지에 님이 얼마나 눈이 높은지 알잖아. 웬만한 귀족들은 쳐다도 보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것도 그렇지만.”
“그분이 아름답다고 여기시는 건 그레모리 공작님이나 우리 폐하, 그리고 집사님 정도 아니야?”
“그래! 정말 정말 예쁘대. 그래서 방심하는 이들도 많다고 들었는걸?”
“설마.”
“아무튼 레라지에 님이 반하셨다면 객관성은 보장된 거야.”
제냐는 아주 간신히,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반쯤은 장난 같았던 사용인들의 이야기 속 용사의 존재는 마왕이 아주 오랜만에 인간계로 출정을 나가면서 현실이 됐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왕과 용사의 만남은 불발됐다.
제냐는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했고, 그녀의 희망이 짓밟히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벅차오르던 희망은 초조함으로 변했고, 제냐는 용사를 간절히 바랐다. 하루라도 빨리 마계에서 용사를 봤다는 소식이 듣고 싶었다. 다만.
“…그 장소가 내 방 테라스이기를 원하진 않았단 말이야.”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제냐는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내 방에 용사가 있어.’
잠이 든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상황상 아마 기절한 게 분명했다.
제냐는 용사의 상처 부위에서 몽골몽골 솟아오르는 핏물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를 계속 바닥에 놔둘 생각은 없지만, 침대는 소중했다.
용사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침대가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피가 가득 묻은 웃옷과 테라스를 뒹군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수건에 물을 적셔 겉으로 드러난 용사의 몸을 깨끗이 닦아 냈다.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는 내내 제냐의 표정은 평온했다.
헐벗고 돌아다니는 마족들로 가득한 마계에서 살다 보니 별생각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너무 힘들었다.
“무거워…….”
몸에 근육이 얼마나 많은 건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의식을 잃고 축 처져 있으니 무게는 배가 됐다.
제냐는 말 그대로 낑낑거리며 간신히 그의 몸을 닦고 침대 위로 질질 몸을 끌어 올렸다.
“복부 외에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남자의 몸을 요리조리 살펴본 것도 잠시,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달리 반쯤 아물어 있는 상처에 제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를 옮기기 전 급한 대로 치료를 하긴 했지만, 기껏해야 피를 조금 더 빠르게 멎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 이 정도로 상처가 치료되는 건 불가능했다.
“자가 재생력이 뛰어난 건가?”
나름대로 이유를 붙인 제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부상을 입은 용사가 그녀의 방 테라스에 나타난 건 어쩌면 운명일 지도 모른다.
“일단 내 성력으로 조금 더 치료를…, 아, 얼마 안 남았네.”
마계에 그녀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선택받은 몇몇 인간들만 쓸 수 있다는 힘, 성력.
인간을 치료하고 마족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성력은 신전의 존재 의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제냐의 성력은 일반적인 성력과는 조금 달랐다. 제냐의 성력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치료했다.
인간 마족 가릴 것 없이.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제냐가 마왕에게 납치당한 거고.
마족을 치유하는 성력이라니? 성력 총량이 형편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좀 아쉽네.”
제냐는 남은 성력을 가늠해 봤다. 용사를 옮기기 전 이미 힘을 썼기에 남은 힘이 별로 없었다.
“내가 기절할 정도로는 쓸 수 없고…….”
한번 기절하면 언제 깨어날지 알 수가 없으니 용사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기절은 안 됐다.
그렇게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 보자는 마음으로 제냐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용사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하아.”
잠시 뒤, 제냐의 손바닥에서 뽀얗고, 신성한 힘이 뻗어 나와 용사의 상처를 감싸 안았다.
딱 3초간.
빠르게 힘을 걷어 낸 제냐는 눈을 뜨고 용사의 상처를 확인했다.
“이게 뭐야?”
믿기 어려운 광경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용사의 상처가 거의 완벽하게 아물어 있었다.
‘설마…….’
아까 그 급격한 상처의 회복도 용사의 자가 치유력이 아니라 그녀의 힘 때문이었던 걸까?
아니, 그렇다기에는 불과 얼마 전에도 마왕의 생채기 하나를 간신히 치료했을 뿐이었다.
“마음가짐의 문제라기에는 어머니를 치료할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왜…, 아.”
용사.
남자는 용사였다. 마왕을 처리하기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는, 제냐의 구원자.
“평범한 인간들보다 성력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걸지도…….”
하지만 감탄은 잠시였다.
사용인들이 속닥거리던, 용사가 마계에 넘어오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니. 동료들도 없고, 이런 몸으로 혼자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천사 같은 얼굴을 내려다보던 제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용사가 깨어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우선.
“피나 닦자.”
용사의 상처에 고여 있는 피들이 침대 아래로 흘러내리기 전 처리하기로 했다.
완벽히 피를 닦은 제냐는 용사의 몸 위로 이불을 던졌다. 건네줄 만한 옷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속옷만 입은 채였다.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 마족들로 인해 시각적으로 익숙하긴 하다만, 익숙한 것과 불편한 건 다른 법이다.
“…힘들어.”
제냐는 잔뜩 지친 낯으로 방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 푹신한 의자를 끌고 왔다.
낯선 남자, 그것도 거의 맨몸과 다를 바 없는 근육질의 남자와 침대를 나눠 쓰는 건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급격하게 잠이 몰려왔지만,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잠이 든 후, 용사가 깨어나면 어쩐단 말인가?
용사가 그녀를 마족으로 착각하고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거고, 몸을 숨길 수도 있었다.
“인간이니까 죽이지 말라고 아예 편지를 써 놓을까?”
그런데 적진에서 정신을 잃었던 용사가 과연 깨어났을 때 편지를 읽을 정신이 있을까?
그리고 하나 더. 제냐는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도 안 잠그고 있었네.”
용사는 둘째 치고 그녀의 방에 다른 마족이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
제냐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는 단단해 보이는 문을 노려봤다.
웬만해서는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아주 튼튼해 보였지만 그래도 마족의 힘이라면 쉽게 부술 수 있는 문.
마족들은 힘 조절을 못 했다. 그들은 화가 나도, 너무 웃겨도, 너무 반가워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엄청난 힘을 마구 휘둘렀다.
축제나 연회가 열리거나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집사인 엘리고스의 일이 갑자기 늘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쁜 엘리고스를 돕다가 하루에 부서진 문고리나 문의 수를 보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그래도 안 잠그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보안을 위해서라며 기절한 사람을 차가운 욕실에 넣어 둘 수도 없지 않은가?
애당초 그나마 힘이 있을 때도 침대까지 간신히 옮겼는데, 힘이 이렇게 빠진 상태에서 욕실까지 용사를 옮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찝찝한 얼굴로 문을 쳐다보던 제냐가 용사의 옆으로 다가갔다. 곤히 잠든 얼굴이 순하기 그지없었다.
“언제쯤 일어나려나?”
아무도 듣지 못할 것 같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꼭 그녀의 말을 들은 것처럼 용사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 속에 자리한 보석 같은 투명한 푸른 눈이 드러났다.
옅은 속 쌍꺼풀이 진 고운 눈매가 들리고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든 생각은, 참 예쁜 눈이라는 거였다.
깨끗한 호수를 보는 것같이 맑고 투명한 푸른 눈.
하지만 그 눈을 바라보는 제냐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만큼이나 너무나 아름다운 눈이었는데, 눈에 생기가 전혀 없었다.
‘장난해?’
좋게 말하면 활기차고, 나쁘게 말하면 시끄러운 마족들과 함께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큰 부상을 입고 막 깨어나서,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저건 마족의 습격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주변 사람들에게서 종종 보던 눈빛이었다.
제냐는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는 있지만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 용사에게 참지 못하고 말을 뱉어 냈다.
“너, 눈이 죽어 있네.”
용사의 눈은 꼭 시체를 보는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깜빡거리던 눈은 점점 더 움직임이 둔해졌다. 보아하니 금방 다시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지금 하는 대화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리멍덩해지는 눈에, 그 짐작은 확신으로 변했다.
“있지, 나는 네가 필요하거든.”
그토록 기다리던 용사가 시체 같은 눈을 하고 있으니까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멀쩡했다면 대놓고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살아 주면 안 돼?”
제냐는 대충 던져 놓은 이불을 그의 목 끝까지 올려 주었다.
“할 수 있는 한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 나를 도와 달라고. 제냐가 진심을 다해 말했다.
“나는 정말 오래 너를 기다렸어.”
용사는 당연하게도 답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제냐는 쌔근쌔근 들려오는 용사의 숨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몸의 상처만 치료해 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