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일찍 해서 좋아했는데, 너무 이른 자축이었던 모양이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제냐는 마왕의 부름을 받았다.
“배려가 없어.”
퇴근한 직장인을 다시 부르는 게 얼마나 잔인한 처사인지 마왕은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제냐는 왈칵 일그러졌던 얼굴을 펴고 한숨을 삼키며 익숙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주한 마왕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마왕의 머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과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마력.
마력에 닿은 피부가 따끔거리며 고통을 호소하자 제냐는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갔다.
흙바닥에 작대기를 그어 대며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던 아이의 머리 위로 번쩍이던 빛과 땅을 뒤흔들던 커다란 굉음. 웅- 이명이 울리는 귀를 부여잡고 뒤돌아본 곳에 서 있던 시커먼 날개를 활짝 편 남자.
사납게 생긴 눈매 속 흉흉하게 빛을 내던 붉은 눈동자와 그녀에게 뻗어지던 그 커다란 손이…….
“왔나?”
제냐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여전히 그의 뒤로 아직은 튀어나오지 않은 검은 날개와 무너진 신전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르셨어요?”
무려 10년을 마계에서 살아왔다. 저 모습을 볼 때마다 감정적으로 굴었다면 제냐는 지금처럼 마왕성에 녹아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끝을 바라며 천연덕스럽게 그의 집무실에서 일하지도 못했을 테고.
“이리로.”
제냐는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본능을 무시하고 마왕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숙련된 시녀의 모습을 뒤집어쓴 채 반쯤 찢어진 마왕의 옷을 바라봤다.
“옷은 왜 또 이렇게 엉망이 된 건가요?”
마왕은 평소에는 힘 조절을 어렵지 않게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방을 부수는 것보다는 옷을 찢는 게 낫지 않나?”
엘리고스가 한 말을 언제부터 그리 잘 들었다고. 제냐가 코웃음을 삼키며 답했다.
“소소한 화풀이도 좋지만, 단추가 많이 달린 건 뒤처리가 곤란해요.”
“귀찮은 거겠지.”
그걸 알면 이런 짓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제냐는 발에 치이는 단추들에 눈매를 좁혔다.
‘책상 밑으로도 굴러 들어갔으려나?’
그녀는 투덜거리는 대신 몸을 돌려 새 옷을 가져와 건넸다. 그리고 걸레도 되지 못할 옷을 받아 들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 다친 곳은 없으시죠?”
“없다.”
화풀이를 제 몸이 상할 때까지 하는 멍청이는 아니었으니 의미 없는 물음이긴 했다.
마왕이 옷을 잘 입나 감시하는 대신 방 한구석에 자리한 정복을 끌고 오며,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왕의 머리 위에 돋아난 뿔과 빨간 봉투, 그리고 길었던 회의. 그 모두를 조합해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배틀이 열리는군요.”
배틀. 마계에서 무력으로 제일간다는 귀족들의 개체 수를 지키기 위한 수단.
마왕의 입회 아래 죽음 외에 모든 부상이 허용되는 분쟁 해결 방법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행사였다.
제냐가 입혀 주는 정복을 입으며 마왕이 답했다.
“공작이 원하더군.”
금실로 장식된 검은 정복은 마왕의 몸에 착 떨어졌다. 그리고 단추가 굉장히 많았고.
당연히 마왕의 커다란 손보다는 제냐의 손이 더 빨랐다.
제냐는 단추를 빠르게 채우고는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금장 단추가 모두 잘 달려 있는지 확인하고는 손을 놓아줬다.
“바로 가시나요?”
“그래.”
“얼마나 걸릴까요?”
마족들의 싸움은, 특히 귀족들의 싸움은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았다.
“잘 버티면 일주일.”
돌아온 답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마왕이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다니. 그 말은 곧 제냐의 휴일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아무래도 속이 훤히 보인 모양이었다. 마왕이 못마땅하다는 티를 여실히 드러내며 툭 내뱉었다.
“좋아 보이는군.”
“그럴 리가요.”
제냐가 능청스레 빈말을 꺼냈다.
“미리 일을 좀 해 둘까요?”
그녀는 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방긋방긋 웃었다.
“…됐다.”
좋아, 정말 완벽한 휴일이겠어.
제냐는 이미 들킨 기쁨을 숨기지 않고 손뼉을 쳤다.
“그럼 뒷정리만 좀 해 두고 돌아갈게요.”
마왕이 답 없이 몸을 돌리고는 시커먼 날개를 활짝 폈다. 제냐의 몸보다 배는 큰 날개가 펄럭이자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책상 위 서류들이 자유를 찾아 떠나듯 사방으로 휘날리는 모습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심술?’
그렇지 않고서야, 테라스로 나가지 않고 굳이 방 안에서 날개를 펼 필요가 없었다. 한평생 달고 다니던 날개일 텐데, 자기가 날개를 꺼낼 때 얼마나 큰바람이 부는지 잊을 리가 없으니까.
뒷정리를 하고 가겠다고 했더니 일을 더 만들다니.
‘이 새XX.’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는데, 마왕은 태연하게 열린 창문을 통해 훌쩍 자리를 떠났다.
“하.”
제냐는 엉망이 된 방을 쭉 훑어보며 헛웃음을 흘리다, 다가올 휴일을 떠올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서류를 주웠다.
책상 아래로 들어간 종이를 꺼내다 그 밑에서 단추 몇 개를 발견하는 수확은 있었으나 크게 기쁘진 않았다.
그녀는 상관의 심술을 본받아, 굳이 책상 아래로 손을 넣어 단추가 더 있나 확인하는 수고를 하진 않기로 했다.
흩어진 서류를 모아 책상 위에 올려 두려는데 자연스레 서류의 아래, 마왕의 서명에 시선이 닿았다.
마르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