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마왕성의 시녀
마왕성 시녀 생활 10년째.
콰앙-!
제냐는 엉망으로 터져 나가는 방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마왕의 뒤에 숨어 있던 몸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보고서를 제출하러 들어왔다가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마족에게 얼른 나가 보라 눈짓했다.
서러운 얼굴을 한 마족이 슬금슬금 마왕의 눈치를 보며 사라지자, 제냐가 수정이 끝난 서류를 마왕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방을 터트리는 건 오랜만이시네요.”
“…어째서 실력이 늘지 않는 거지?”
사나운 눈매 속 붉은 눈동자가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 단단한 몸을 가진 주제에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닌, 서류 업무에 찌든 마왕이라니.
비웃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제냐 역시 그와 같은 처지였으니까.
“그야, 저와 폐하. 그리고 엘리고스 님이 서류 업무를 몽땅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성의 사용인들조차 틈만 나면 수련을 하겠다고 성을 뛰쳐나가는데, 군단장들이라고 다를까?
마왕과 집사를 무서워하면서도 틈만 나면 도망가려는 그들을 웃는 낯으로 붙잡는 것은 아무리 제냐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했다.
‘한 대 때려 줄 수 있다면 몰라.’
마족과 비교하면 갓난아이나 다름없을 만큼 약한 인간, 제냐가 그들을 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서류는 제가 한 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더 보는 수준으로 정리될 보고서가 아니던데.”
새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마왕의 말처럼 보고서를 아예 새로 작성해야 한다는 건 제냐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데, 스트레스가 가득 쌓인 얼굴의 마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애써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자 마왕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마사지.”
제냐는 짜증으로 덜덜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저보다 배는 큰 마왕의 손을 붙잡고 꾹꾹 지압을 시작했다.
뼈대가 굵고 곧은 손이었지만 그럼에도 흉 하나 없이 부드러운 손을 제냐는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눌렀다.
‘다 쥐어뜯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녀의 손이 더 다친다는 걸 알아서 상상을 실현할 수도 없었다. 제냐는 머릿속에 가득한 불만을 손가락 끝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한참을 꾸역꾸역 손을 놀리던 제냐는 슬쩍 눈치를 보다 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텅 빈 마왕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마왕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일을 시작했다. 눈치껏 자리로 돌아간 제냐는 그 뒤로도 차근차근 마왕이 원하는 것들을 알아서 처리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긴 시간 그와 함께했기 때문에 손짓, 눈짓 하나에 그가 원하는 것을 바로 읽어 낼 수 있었다.
마왕이 얼굴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휙 뒤로 넘겼다. 제냐는 방 한쪽에 마련된 화장대에서 긴 비단 끈을 하나 꺼냈다.
“묶어 드릴게요.”
마왕의 뒤로 다가간 제냐가 손에 든 비단 끈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쓸었다.
이 긴 머리카락이 힘의 상징이라고 했던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을 만큼 강한 무력을 뜻한다나 뭐라나.
이미 사라진 전통이라지만 역대 마왕들이 그렇듯 지금 마왕도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백 살이 훌쩍 넘은 마왕은 혼자서 그 머리를 관리하진 못했다.
‘이 나이를 먹도록 머리 하나 혼자 못 묶다니.’
귀찮음이 가득한 속마음과 달리 제냐는 심혈을 기울여 리본의 모양을 잡고 손을 뗐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노크와 함께 집사 엘리고스가 등장했다.
“폐하.”
짧은 은발에 모노클을 쓴 냉기가 풀풀 흐르는 그는 집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왕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방을 망가트리는 건 이쯤 해 주시면 감사할 텐데요.”
그러고는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망가졌던 벽이 꼭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왕의 곁에 있으면서 몇 번이나 본 모습인데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잔소리를 하면서도 엘리고스 역시 마왕이 그걸 들어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듯 곧장 제냐를 돌아봤다.
“폐하께서 또 방을 부수려고 하신다면 네가 말려라.”
뭘 어떻게 말리라는 거지.
제냐가 특별한 힘이 있긴 했지만 그걸로 마왕을 말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완력으로 말리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고.
‘대신 터져 나갈 일 있어?’
말없이 눈만 깜빡거리자 엘리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던 엘리고스가 이제는 마왕이 폭발할 상황을 만든 이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린애보다 못한 머리라니.”
10년 전, 제냐가 마왕의 서류에서 틀린 부분을 찾아냈을 때 들었던 말과 비슷했다.
이제 어린애는 아니지 않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백 살이 훌쩍 넘는 마족들 앞에서 해 봤자 비웃음만 살 게 뻔했다.
할 말이 없어 미소만 짓고 있는데 엘리고스가 집무실 한쪽에 있는 제냐의 책상을 바라보며 쯧, 혀를 찼다.
“역시 내가 데려왔어야 하는데…….”
마왕의 책상 위와 엇비슷한 양의 서류가 쌓여 있는 제냐의 책상을 보니, 다시 한번 그녀가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엘리고스가 등장한 이후로도 무심하게 서류만 정리하던 마왕이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방이 아니라 성 전체가 부서져 나가는 걸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던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협박이었다.
엘리고스는 그런 마왕을 상대하는 대신 집무실까지 올라온 이유를 처리하기로 한 것 같았다.
제냐는 엘리고스가 건네주는 붉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엘리고스가 직접 가져온 봉투이니 아마 귀족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제냐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내용을 보고했다.
“베리스 백작님과 비네 자작님께서 언제나처럼 다투시다가… 그레모리 공작님의 말에 상처를 입히셨네요.”
그레모리 공작이라. 투닥거리는 것이 일상인 두 마족이 드디어 사고를 쳤다.
제냐가 냉랭한 그레모리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는데 마왕이 물었다.
“말이 죽었나?”
명목상 말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온몸에서 독기를 풀풀 풍기는 그건 말이라고 부르긴 어려웠다. 날개가 달린 생물을 떠올린 제냐는 다시 한번 보고서를 훑어보며 답했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말이 죽었다면 이렇게 진정서를 보내는 정도로 끝이 나진 않았겠죠?”
그레모리 공작이 말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마계에서도 매우 유명했다. 그러니 아마 말이 죽었다면 이미 진작에 두 마족의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
호전적인 마족의 특성 때문인지 마계에서는 귀족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다. 마왕의 업무에 마족 간의 불화를 해결하는 것이 포함된 이유였고.
‘그러니까 마족끼리 싸워 개체 수를 줄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
특히 이번처럼 그 싸움에 다른 귀족이 휘말리게 되면 그때야말로 난장판의 시작이었다.
제냐는 벌써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마왕을 향해 생긋 웃으며 보고서를 넘겼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앞으로는 저 두 귀족의 처벌에 관한 이야기를 할 테니, 눈치껏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겸사겸사 덕분에 하루를 빨리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제냐는 뒤에서 닿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일터를 떠나는 발걸음이 후련하기 짝이 없었다.
열심히 걸음을 옮기는데, 퇴근이 이른 탓인지 오늘따라 농땡이를 치며 수다를 떨고 있는 사용인들이 많이 보였다.
제냐는 무심한 척 귀를 쫑긋 세웠다. 종종 그녀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뭐? 그럼 용사가 정말 마계로 오려고 한단 말이야?”
제냐는 복도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용사.
마왕이 나타난 순간부터 함께 유명해진, 예언 속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어둠을 없애 줄 ‘빛의 인간’에 대한 예언은 마족들에 의해 피폐해진 인간들을 환호하게 했고, 모든 이들이 간절히 용사의 등장을 바라게 됐다.
제냐의 부모님 역시 예언을 했다던 성녀를 만나기 위해 대신전으로 찾아갈 정도로 열렬한 예언의 신봉자였다.
마족들의 습격으로 인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예언을 기억하렴. 살아남아야 해!’
제냐는 헤어지기 전, 유언과도 같았던 부모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예언은 마계에 붙잡혀 왔던 열 살 꼬마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요새 용사가 좀 조용한 게, 마계에 들어오려고 그런다는데?”
“그게 가능해? 만약 정말 용사가 마계에 침입하면…….”
사용인이 겁에 질린 얼굴을 하자 다른 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가 계시잖아. 겁먹을 필요 없어.”
“무서워. 그렇게 강하다며? 저번에 무슨 백작의 머리를 단박에 날렸다던데.”
“그, 그건.”
그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목소리가 너무 컸다며 상대를 타박했다.
하지만 장난 같은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냐?”
제냐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딱딱하게 굳은 이들을 그냥 묵묵히 쳐다봤다.
애초에 기척을 숨길 능력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제냐는 가볍게 고개만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제냐는 그 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사용인들에게서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컸다니까?!”
“나만 컸어? 너도 마찬가지거든?”
“못 들었을 거야. 들었으면 말했겠지!”
또다시 서로를 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냐에게 조금 전 대화를 들켰을까 하여 꽤 마음을 졸인 모양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마왕과 엄청 가까워 보이니까.’
마왕과 엘리고스, 성내 최고 권력자 두 명의 암묵적인 신뢰─업무에 한해─가 남들의 눈에는 총애로 보인 듯했다.
단순한 마족들은 그녀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렸다.
그냥 운 나쁘게 마계에 흘러들어 온 것도 아니고, 마족들에 의해 부모님을 잃고, 마왕에게 납치되어 마왕성에 머물게 된 인간인데.
뭐, 납치된 건 둘째 치고 부모님이 마족들의 습격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진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무리 제냐가 마왕의 신임을 받으며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해도 그녀는 인간이었고.
‘용사.’
때문에 용사의 소식에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쿵쿵, 크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제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의 믿음과 그녀의 믿음이 깨지지 않았다는 게 기뻤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얼른 다가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