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사랑하기 좋은 계절
* * *
말은 그렇게 해놓고는 호독니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창 아플 때, 꿀이 먹고 싶다던 아내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늦었지만 화도 풀어 줄 겸 지금이라도 나가 구해 볼 참이었다.
“호독니, 왜요?”
“나도 물 좀 비우러…….”
호독니가 궁려 밖으로 내빼기 무섭게, 다른 놈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우리 마누라, 종일 애들 돌보느라 지쳐서 나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쩌지?’
‘저녁에 양 잡는다고 일찍 들어오라고 했었지?’
‘아침에 그 사람, 영 기운이 없어 빌빌거리더구먼. 안 되겠네. 얼른 가서 뭐 기운 날 거라도 해 먹어야지.’
‘오늘 밤 화살대 만들어 준다고 막둥이 놈한테 큰소릴 쳤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엉덩이를 드는 동료들을 보고 시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야, 너희들은 왜……?”
“갑자기 배, 배가 좀 아파서…….”
“야, 미안. 난 두고 온 게 있어서…….”
“어쩜 나랑 그렇게 똑같냐? 나도…….”
밤이 되자 아내와 자식 생각이 간절해진 놈들이 약속을 깨고 단체로 줄행랑을 놓았다.
놈들이 다 튀었다는 걸 시타가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뭐, 뭐야? 대칸이랑 호독니…… 말파 네놈까지! 다들 이러는 게 어딨어? 뭐? 여기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사내놈이 아니라고? 배신자라고? 이 나쁜 놈들, 아니 나쁜 대칸! 에라, 이 배신자들아!”
홀로 남은 시타의 절규가 궁려 안에 울려 퍼졌다.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뭐 해, 오라버니?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혹시 취했어?”
산시의 등장에 시타가 바짝 졸았다.
“사, 산시 네가 여긴 웬일로?”
“그야. 오라버니 데리러 왔지. 날도 졌는데 안 오니까 걱정이 돼서.”
가까이 다가온 산시가 그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어휴. 밤공기가 찬데 이렇게 목을 휑하니 내놓고 있으면 어떡해? 그러다 감기 걸린댔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남편이라니까.”
“산시야.”
언제 불만이었냐는 듯 시타가 엉큼한 얼굴로 산시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속삭였다.
“머리 더 많이 땋은 거 미처 몰라봐서 미안. 하지만, 넌 어떤 머리 모양을 하든 다 예쁘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알지. 우리 오라버니 나한테 푹 빠져 있는 거…….”
산시가 시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나도 미안해. 오늘 아침 괜히 심통 부려서. 요즘 몸이 좀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사랑해, 오라버니.”
“나도…….”
쪽, 쪽. 한도 끝도 없이 입을 맞추는 부부의 곁에서 보글보글, 유주가 닳고 있었다.
* * *
발리안이 수하들을 배신하고 자신의 궁려로 돌아오자, 예상대로 효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머리카락을 길게 풀고 속살이 아른거리는 침의로 갈아입은 채. 언제봐도 역시 사랑스럽고 매혹적이었다.
“왜 이제 와요? 난 날이 저물기만 눈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그녀가 쌜쭉 눈을 흘겼다.
그 모습에 언제 삐졌냐는 듯 발리안의 입매가 확 풀어졌다.
“많이 기다렸나? 미안.”
그가 얼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재빨리 효령 곁으로 다가갔다. 발리안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효령이 그 품으로 안겨들었다.
“나 당신한테 상의하고 싶은 거 있는데…….”
“뭔데?”
“우리 도근이 일이에요. 당신, 선묘 알죠?”
“선묘라면 도근이 그림자 같은 아이잖아. 그 아이가 왜?”
“오늘 도근이랑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선묘 이야기가 나왔는데…… 글쎄, 도근이 얼굴이 빨개지지 뭐예요.”
흐음. 효령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도근이가 선묘를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근데 선묘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우리에게 말을 못 꺼내는 것 같아서…….”
“뭐야, 녀석. 그래서였나? 태자 자리를 때려치운다는 게?”
발리안이 홀로 중얼거렸다. 용케도 그 말을 알아들은 효령이 놀라 발리안에게서 몸을 떼었다.
“뭐라고요? 우리 도근이가 태자 자리를 관둔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 난처해진 발리안이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무한정 숨길 수도 없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당신도 알아 둬.”
그가, 얼마 전 아들 발도근과 나눈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혹 효령이 충격이라도 받을까 걱정이었는데, 그녀는 의외로 담담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쩐지. 요즘 우리 도근이 얼굴이 이전보다 편안해 보인다 했더니…….”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된 효령이 발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말 하면 당신이 오해할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
예상 밖의 반응에 발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 나 걱정이 많았어요. 우리 도근이…… 화를 낼 줄도 모르고, 웬만하면 뭐든 다 양보하고……. 너무 순하고 착해서 마음이 쓰였어요. 대칸의 자린 그런 성품만으론 어렵잖아요.”
“그야 그렇지.”
효령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못된 어미예요.”
“당신 어디가 못됐는데?”
“도근이, 한참 혈기 왕성할 나이에 혼인 이야기만 나오면 번번이 마다했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먼저 고할 테니 기다려 달라면서요. 어리석게도 이제껏 그 말만 믿고 있었으니…….”
“…….”
“도근이가 어떻게 선묘를 좋아한다고 말하겠어요, 태자인 제 위치가 있는데……. 당신이나 내게 누가 될까 봐 내내 참았겠죠. 우리 도근이 그동안 마음고생 했을 걸 생각하면…….”
“…….”
“세상에 나보다 무심한 어미는 없을 거예요.”
발리안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효령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니. 당신은 충분히 좋은 어머니고, 도근이 녀석이 이제껏 아무 말 안 한데도 이유가 있어. 그러니 자책하지 마.”
“이, 이유요?”
“오늘 그 녀석이 그랬잖아. 여잔 본능에 충실한 사내보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 그래서 도근이 녀석, 선묘가 자라길, 저와 같은 마음이 되길 기다린 거라고.”
“정말요?”
“그 녀석이 한창때 선묘를 덮쳤다고 생각해 봐. 그때 선묘 나이가 몇인 줄 알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야.”
“지, 진짜 그러네.”
“그러잖아도 도근이 녀석, 나한테 그랬어. 올핸 장가간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당신 바빠질 일만 남았어. 마음의 준비나 해둬.”
“그럼 정말 다행이고요. 이제야 안심이네. 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효령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반짝였다.
“나 당신한테 또 할 말 있어요.”
“뭔데?”
“아까 오후 일 말인데……. 제발 조심 좀 해 줘요. 나 아이들 앞에서 민망해 죽겠다고요.”
“부부 사인데 민망할 게 뭐야?”
“당신도 참.”
효령이 무신경한 발리안에게 핀잔을 놓았다.
“도근인 몇 년째 가슴앓이 중인데 우리만 너무 행복한 거 미안하지도 않아요? 게다가 익건이가 당신 흉내를 낼까 봐 걱정돼 죽겠다고요.”
“시나가 아니고 익건이가 걱정이라고?”
“오히려 시나는 ‘체통 좀 지키세요’ 쏘아붙이고 끝일걸요? 하지만 익건인 달라요. 한창 피가 뜨거울 나이잖아요. 그 녀석 벌써 체격이 당신만 하다고요. 게다가 당신이 하는 건 뭐든 따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쳇. 발리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
“당신도 생각 좀 해봐. 아까 내가 한 말…….”
“무슨 말요?”
“늦둥이 말이야.”
늦둥이란 말에 효령이 화들짝, 몸을 떨었다.
“나 할 일이 많은 건 알죠?”
“알지. 그래서 안 되나?”
“시나가 혼인할 때까지 가르칠 것도 많고, 도근이와 책도 엮어야 하고. 거기다 우리 무한이랑 요기도 자주 들여다봐야 하고. 여기서 아이는 무리예요.”
“알았어.”
발리안이 생각보다 순순히 수긍했다.
“당신 서운한 건 아니죠?”
“서운이야 하지. 당신을 꼭 닮은 놈이 꼼지락거리면서 애교 부리는 걸 보는 게 오랜 내 소원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그놈이 아무리 예쁜들 당신만 하겠어? 그러니까 그 얘긴 이걸로 끝!”
발리안이 아주 말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아유 예뻐라, 우리 대칸!”
쪽. 행복한 미소를 지은 효령이 발리안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너무 착해서 그냥은 못 넘어가겠네. 내가 상 줄게요.”
“상?”
효령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발리안을 바라보았다.
“당신. 오래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요?”
“무슨 말?”
“원한다면 친정 오라비 노릇까지 다 해줄 테니까 내 머릿속에 든 사내란 사내는 모두 지우라고 했던 거요.”
“그게 왜?”
효령이 입가 가득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아쉽지 않도록…….”
그녀의 손이 발리안의 가슴을 나른하게 쓸어내렸다.
“늦둥이 대신…… 내가 꼼지락이랑 애교 다 해 줄게요. 그럼 됐죠?”
씨익. 발리안의 입매가 하늘 모르고 치솟았다.
“그럼 나야 황송하지.”
“그럼 꼼지락부터…….”
효령의 손가락이 발리안의 몸 위를 거침없이 누비기 시작했다.
“어, 어……. 이, 이거 위험한데? 간지러워, 효령아. 간지럽다고. 하하하하하.”
“엄살 부리지 마세요, 대칸.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요.”
“효, 효령아. 제발 나 좀 살려줘. 하하. 그, 그만……. 이러다 나 죽는다니까, 효령아.”
하하하하하. 깊은 밤. 발리안의 궁려에서 쉴새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행복에 젖은 그 웃음에서 여전한, 아니 더욱 깊어진 설렘과 애정이 묻어났다. 어느새 뜨겁게 달궈진 부부의 침상에,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보다 아름답고 찬란한 사랑이 수놓였다. 먼발치로 밀려난 양털 이불이 하릴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림제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여름의 한가운데. 짙푸른 대지에는 순백의 바람꽃이 한창이었다.
쏴아. 멀리 산에서 불어 내려온 산곡풍이 한바탕 초원을 들썩이며 지나갔다. 그 바람에 파르르, 꽃잎이 흩날렸다. 허공을 수놓으며 쏟아지는 꽃비가 취할 듯 장관이었다. 사랑하기 좋은 계절. 기탄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무르익고 있었다.
『꽃, 바람에 흩날리고』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