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114화 (114/116)

외전 8화. 쫓겨난 남자들 1

* * *

「이번에 한유가 사신으로 온다고? 효령이 기뻐하겠군. 그래, 효령이…….」

모개가 올린 문서를 읽다 말고 발리안이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늦둥이 딸. 재롱.

아까 연제준 앞에서는 애써 무시했지만, 한 번 꽂힌 그 말이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긴, 우리 시나는 처음부터 너무 까칠해서 귀여운 맛은 좀 덜했지. 하필 날 빼닮아서는……. 나 말고 효령일 닮은 딸이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이후로는 무얼 해도 효령을 쏙 빼다 박은 귀여운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발리안은 일을 내팽개치고 당장 효령의 처소로 달려갔다.

「여보, 효령아…….」

은근슬쩍 뒤에서 안는 그 때문에 화들짝 놀란 효령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녀는 한창 의서를 읽던 중이었다. 요즘 효령은, 아들 발도근과 함께 의서를 편찬하고 의원들을 길러낼 방도를 찾고 있었다. 전 천군이 역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물러난 후, 기탄에서 천군의 위상과 역할은 대폭 축소되었다. 이 기회에 그들을 대신하여 질병을 담당할 의원들을 키워내려는 것이 효령의 계획이었다.

「대, 대칸! 당신이 이 시간에 어쩐 일로…….」

「……그게 말이지.」

음흉한 미소를 지은 발리안이 은근슬쩍 효령의 허리띠로 손을 뻗었다.

「연제준 그놈이 이번에 늦둥이를 낳았다는데…… 우리도 당신 닮은 딸 하나…….」

효령이 찰싹, 그 손을 쳐냈다.

「체통을 지키세요, 대칸. 아직 해도 지지 않았……!」

그러나 발리안은 입술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는 효령을 안아 침상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그녀의 옷섶을 풀기 시작했다.

「이거 놔요, 응? 제발…….」

효령이, 홀로 달아오른 발리안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이러다 누가 온다고요.」

「오긴 누가 온……!」

능글맞은 발리안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 벌컥, 보란 듯 궁려의 문이 열렸다.

「어머니, 제가 서고에서 기막힌 서책을 발견……!」

흥분한 표정으로 들어서던 발도근이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도, 도근아!」

당황한 그나 효령과는 달리, 발리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야, 이 녀석아. 들어오기 전엔 인기척부터 내야지.」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민망함으로 얼굴이 빨개진 발도근이 꾸뻑, 고개를 숙였다.

「내가 정말 못 살아. 그러니까 대낮부터 이러지 말랬죠?」

효령이 풀어진 겉옷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 도근아. 네 아버지가 아직 철이 없어서…….」

발리안이 그 말에 항변하려는 순간.

「전 괜찮습니다, 어머니. 늘 느끼는 거지만 어머니께서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느새 표정을 수습한 발도근이 발리안을 향해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저나 익건인 그래도 이해하겠지만, 이 장면을 시나가 봤다면…… 그땐 아버지도 좀 곤란해지셨을걸요? 아버지, 시나가 혼인할 때까지라도 제발 자중하십시오. 이러다…….」

「……?」

「시나가 세상 모든 사내들이 다 아버지 같은 줄 알면 어떡합니까? 자칫 태운이와의 혼인을 무르겠다고 하면 어쩌시려고요?」

「……야, 이 녀석아.」

발리안이 발끈해서 콧등을 찡그렸다.

「세상 사내들이 나 같으면 뭐가 어때서? 그럼 최고잖아? 근데 시나가 왜 혼인을 물러, 무르긴?」

「그야…….」

후. 발도근이 말을 하기 전 한숨부터 내쉬었다.

「여자들은 본능에 충실한 사내보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니까요. 여인들은 우리와 다르게 섬세하고 예민합니다, 아버지. 어머니와 사신 세월이 얼만데 아직도 그걸 모르십니까?」

하. 제대로 한 방 먹은 발리안이 얼굴 가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효령은 발도근을 향해 씽긋 웃어 보였다.

「……역시 우리 도근이 최고. 아들한테 좀 배워요, 당신!」

손발을 맞춰 공격하는 두 사람에게 밀린 발리안이 팩하니 토라져 버렸다.

「……그래! 잘났다, 들!」

입술을 한껏 삐죽인 발리안이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그 시각.

퇴근할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시타는 여전히 집무실로 사용하는 궁려에 남아 있었다.

「이럴 거면 우리 헤어져.」

오늘 아침, 너무도 싸늘했던 산시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는 것도 적성에 안 맞았다.

영차.

억지로 몸을 움직여 화로로 다가간 시타가 커다란 솥을 걸고 유주를 데우기 시작했다. 혹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동료들을 위해서였다. 이건 뭐 참새 방앗간도 아니고. 이상하게 그의 궁려에는 늘 사람들이 몰렸다.

심심해서, 그냥,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잠깐 몸 좀 녹였다 가게, 의논할 게 있어서, 집에 가기 싫어서 등등.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시타, 너 아직 안 가고 있었냐?”

아니나 다를까. 유주가 데워진 걸 어떻게 알았는지 첫 번째 참새가 문을 두드렸다.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말파였다. 친위대의 천장인 말파는 무림제에서 한 차례의 고배 끝에 결국 우승을 차지하여 ‘눈표범’의 칭호를 받은 실력자였다.

“자.”

시타가 그를 향해 유주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고맙다.”

꿀꺽. 말파가 유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기 무섭게,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들어간다, 시타.”

문이 열리고 친위 대장 호독니와 다른 몇 사람의 친위대가 들어왔다. 그들 역시 교대를 마치고 막 퇴근하는 참이었다. 전 친위 대장이었던 아굴가는 지금, 대장군이 되어 임시로 기탄의 북부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차뉴 칸이 죽으면서 발리안의 직속령으로 편입된 지역이었다. 아굴가의 뒤를 이어 친위 대장이 된 것이 바로 호독니였다.

호독니가 탁자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우리도 한잔 다오.”

삽시간에 궁려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라?

그런데 웬일인지 유주 잔을 기울이는 호독니의 표정이 오늘따라 유독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다들 한결같이 죽상인 것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시타가 호독니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호독니. 무슨 일 있어요? 다른 땐 일만 마치면 쌩하니 집으로 직행하는 분이 여긴 웬일……?”

“말도 마라.”

호독니가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요즘 내 부인이…… 잘 때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 영 집에 갈 맛이 안 나.”

“예? 왜요?”

“그러니까 그게…… 며칠 전에 아픈 자기를 내팽개쳐두고 이놈들이랑 술판을 벌였다고.”

“예에? 뭐라고요?”

시타가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부인이 아픈데 술판을 벌이다니. 제정신이에요?”

“아니, 내가 뭐 그렇게까지 아픈 줄 알았나? 그냥 참을 만하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지. 그게 다 이놈들 때문이라니까. 집에 가려는 사람을 기어이 붙들고는 한잔하고 가라고 해서…….”

쯧쯧. 팔짱을 낀 시타가 그를 향해 타박을 놓았다.

“호독니는 그것도 몰라요? 아내가 ‘좀’이라고 하면 ‘많이’고, ‘참을 만하다’ 하면 ‘엄청 아프다’는 뜻인 거. 아내 말은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고요.”

“그, 그런 거냐?”

호독니가 그러잖아도 험악한 얼굴에 더욱 인상을 구겼다.

“오늘 집에 들어가면 무조건 싹싹 빌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안 그럼 늘그막에 독수공방한다고요. 알았어요?”

“쳇.”

툴툴대는 호독니를 지나 시타가 옆으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네놈은 또 무슨 일이냐?”

“그게…….”

친위대 군사가 잔뜩 열받은 얼굴로 하소연했다.

“난 억울해. 진짜 억울하다고. 아, 글쎄 마누라가 ‘나 요즘 살쪘지?’ 하고 묻길래 ‘어, 조금’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더니…….”

옆에 앉은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너도냐? 나도다. 하도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고 난리를 피우길래 ‘자세히 안 보면 안 보인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삐쳐서는 아무리 뭘 물어도 대꾸를 안 한다니까.”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대칸의 친위대가 안사람 때문에 빌빌대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진지하다 못해 자못 심각한 상태였다.

“어이구, 이 멍청이들아. 아내가 묻는다고 그렇게 넙죽넙죽 입바른 소리를 해대냐? 니들, 간덩이가 부었……!”

시타가 지청구를 쏟아 놓는 순간, 예고도 없이 궁려의 문이 열렸다.

“어, 대칸!”

“대칸!”

느닷없이 들어서는 발리안을 보고 모두가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못 올 데 왔냐? 앉아라, 들.”

삐쳐서 효령의 처소 밖으로 나온 발리안은 멀리서 퇴근하는 놈들이 줄줄이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우울한 참에 얼결에 따라왔는데. 오랜만에 모처럼 수하들과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호독니가 얼른 의자를 들고 가 발리안에게 내밀었다.

“앉으십시오, 대칸.”

“이 늦은 시간에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발리안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시타가 유주가 든 잔을 들고 와 내밀었다.

“다들 부부싸움을 했는지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이 난리지 뭐예요. 하나같이 한심한 소리나 늘어놓고.”

부부싸움이란 말에 발리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나만 쫓겨난 줄 알았더니, 이놈들도?

갑자기, 패잔병처럼 어깨를 떨구고 있는 수하들에게 강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뭘 어쨌길래 부부싸움들이야?”

“아, 글쎄요, 대칸.”

호독니가 기회는 이때다, 입을 열었다.

“여자들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아프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와라, 하면 될 것을. 실컷 괜찮다고 해놓고는 나중에 뒤통수나 때리고.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음, 여자들이 좀 그렇긴 하지.”

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고무된 다른 놈들이 덩달아 입을 벌렸다.

“아, 글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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