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113화 (113/116)

외전 7화. 못 말리는 녀석들

* * *

“형.”

오랜만에 발익건을 본 발무한과 발요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와! 익건이 형아다!”

신이 난 그들이 조금 전 상황도 잊고 발익건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발익건이 동생들을 한 팔에 하나씩 안아 들었다.

“으차. 우리 못난이들. 그동안 잘 있었냐?”

“응, 형아. 엄청 대따 보고 싶었어.”

“나도, 형.”

두 녀석이 발익건의 뺨에 얼굴을 문지르며 난리를 부렸다.

“야, 이 녀석들아. 그렇다고 침을 바르면 어떡하냐?”

애정 어린 핀잔을 놓은 발익건의 눈이 힐끗, 서신을 든 발시나의 손으로 향했다.

“그게 뭔데 우리 이쁜 꼬맹이들을 쥐 잡듯 하냐?”

“남이야. 신경 끄시지.”

발시나가 뾰로통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발무한이 쪼르르 서신에 대해 일러바쳤다.

“저거. 안야국 태운이 형이 보낸 거야.”

“뭐?”

발익건의 미간이 금세 구겨졌다.

“형. 태운이 형 좀 이상해. 순 바람꽃 얘기만 하고.”

발무한에 이어 발요기도 끼어들었다.

“근데 형아. 태운이 형아도 유과를 좋아한대. 형아가 누나랑 같이 유과를 먹고 싶다고 그랬어.”

“뭐?”

영문을 모르는 발익건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 그,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형. 어디 다친 데 없어?”

난처해진 발무한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조금.”

“와!”

발요기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어디 나도 보여줘, 형아. 아버지처럼 대따 큰 거야?”

“그것보다는 좀 작은데.”

“그래도 볼래.”

“나도, 나도!”

아버지 발리안의 몸에 있는 흉터를 제일 부러워하는 두 녀석이 서로 보겠다며 아우성을 쳐댔다. 동생들을 내려놓은 발익건이 허리띠를 풀더니 훌러덩 윗옷을 벗었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바위처럼 탄탄하고 다부진 몸. 그 새하얀 가슴에서 배까지 제법 긴 상처가 나 있었다.

“와, 끝내준다. 진짜 멋있지 않냐?”

발무한이 그걸 만지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나도 있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검댕으로 그려줄까?”

“어, 여기다.”

발요기가 허리띠를 풀고 똥똥한 배를 내밀었다.

“하여튼, 사내 녀석들이란.”

발시나가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못 말리는 남동생들을 지나 문으로 향했다.

“아무 데서나 훌렁훌렁 옷이나 벗어 던지고. 이런 야만인들. 제발 품위 좀 지켜라.”

발익건이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야, 너 어딜 가? 나 약 발라줘야지. 여기 형 방에 금상산(金傷散, 칼로 인한 상처에 쓰는 약)이 있을 텐데……. 나 등에도 상처 났다고.”

“그건 유치한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난 수준 안 맞아서 여기 더는 못 있겠다.”

“야, 시나. 너 진짜 이러기냐? 야, 발시나!”

발익건이 몇 번을 불렀지만 발시나는 끝내 못 들은 척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녀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갑자기 왜 웃통은 벗고 난리야? 사람 놀라게.”

후우. 다시 고개를 돌린 발시나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 동생이라 어리게만 봤는데 대체 언제 저렇게 큰 거지?

조금 전, 느닷없이 눈앞에 드러난 발익건의 몸에 저도 모르게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생의 첫 큰 전쟁을 치르고 온 동생은 어느새 남자가 되어 있었다. 거기 오래 있다간 얼굴이 빨개질 거 같아서 후다닥 밖으로 나온 길이었다.

발시나가 손에 쥐고 있는 서신으로 눈을 내렸다.

‘정말 큰일이야. 아버지나 익건이 저 녀석 때문에 내 눈만 높아져서는. 태운이가 저 녀석보다 못생겼으면 어떡하지? 그럼 나 도저히 적응 못 할 것 같은데?’

발도근의 처소 앞 계단 아래 멈춰 서 있는 그녀 앞으로 문득 그림자가 어리었다.

“저기요. 길을 잃어서 그런데…… 황후마마 처소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응?”

발시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에 시녀 둘을 거느린 처음 보는 소녀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앳된 얼굴에 키도 자그마한 것이 예쁘고도 사랑스러운 인상이었다.

“황후마마는 왜 찾아? 넌 누구니?”

“전 연제란, 구림의 공주예요. 그러는 그쪽은…….”

“뭐? 네가 연제란이라고? 반갑다, 정말!”

발시나가 반가이 연제란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난 발시나야. 우리 어머니가 황후시고.”

“네?”

발시나의 말에 상대가 화들짝 놀라 무릎을 굽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공주마마.”

연제란은 구림 칸인 연제준의 딸로 발시나와는 외사촌 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제준에게는 총 10명의 자녀가 있는데 연제란은 그중 일곱째로 올해 열네 살이었다. 미인으로 소문났던 어머니 허올란을 닮아서인지 벌써부터 미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누구랑 왔어?”

“그게…… 아버지랑 같이 왔어요.”

“외숙? 외숙께선 지금 우리 아버지랑 계시니?”

“네.”

연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히 나눌 말씀이 있으시다고. 그 사이 저더러 황후마마께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하셔서……!”

연제란이 말을 하는 도중. 발시나의 뒤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야, 발시나. 넌 내가 다쳤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겉옷을 걸치는 둥 마는 둥,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차림으로 뛰어나오던 발익건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 엄마야!”

얼굴이 빨개진 연제란이 뺨에 두 손을 얹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낯선 소녀의 존재에 당황한 발익건이 황급히 옷자락을 여미며 몸을 가렸다.

“그러게 잘하는 짓이다! 동생 앞에서…….”

발시나가 끌끌 혀를 찼다.

“동…… 생?”

멈칫하는 발익건을 두고 발시나가 말했다.

“인사해. 여긴 구림에서 온 연제란. 저 야만인은 내 동생 발익건이야. 누군지 알지? 저렇게 허술해 보여도 검독수리라고.”

“아, 안녕하세요, 황자님.”

“어, 그, 그래.”

어쩐 일인지 인사를 나누는 발익건과 연제란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익건이 네가 연제란 좀 어머니께 안내해 주겠니? 난 좀 바빠서 말이야.”

발시나의 제안에 발익건이 화들짝 놀랐다.

“내, 내가?”

“싫으면 말고. 그럼 별수 없이 내가…….”

“누, 누가 싫대?”

멋쩍은 듯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발익건이 조금 미적대며 계단을 내려왔다.

“따, 따라와.”

“네, 황자님. 그럼 공주님 다음에 봬요.”

발시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연제란이 총총히 발익건의 뒤를 따라갔다. 야릇한 눈짓을 주고받은 시녀들이 멀찍이서 그들을 쫓았다.

흐음. 멀어지는 동생을 바라보는 발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쳇. 세상에 못 믿을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나쁜 놈. 그새 날 두고 한눈을 팔아? 어휴.”

팔짱을 낀 발시나가 발익건을 향해 듣지도 못할 지청구를 날렸다.

“나나 어머니가 아니면 아무하고도 춤을 안 춘다더니. 저 녀석 하는 꼴로 봐선…….”

발시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올 무림제 때 내 차례는 안 돌아오겠네. 아이, 기분 나빠. 남편이 후궁을 들이면 이런 기분이려나? 안 되겠어. 태운이에게도 미리 다짐을 받아 둬야지. 난 절대 다른 여자 꼴은 못 본다고.”

저도 모르게 서신을 꽉 움켜쥔 발시나가 서둘러 제 처소로 돌아갔다.

“허, 이거 참.”

그들 모두가 사라진 계단 위. 두 꼬맹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이제 곧 새로운 알나리깔나리가 시작되겠군.”

발무한의 말에 발요기가 눈을 빛냈다.

“정말? 그럼 이제 익건이 형아도 저 예쁜 누나랑 유과를 같이 먹는 거야?”

“당연하지. 유과만 먹을 줄 아냐? 그보다 더한 것도 하겠지.”

“더한 거 뭐?”

발무한이 발요기를 향해 둘째 손가락을 까닥였다. 발요기가 형을 향해 귀를 내밀었다.

“진짜 알나리깔나리는 말이야. 이거야, 이거. 우…….”

발무한이 느끼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히힛. 간지러워, 형아.”

귀를 간질이는 입김에 발요기가 몸을 떨었다.

“앞으로 우리 심심할 일은 없겠다. 야, 발요기.”

발무한이 동생의 옆구리를 찔렀다.

“앞으론 누나 방 말고 형 방을 털어라. 형한텐 들켜도 맞아 죽진 않을 테니까.”

“알았어. 나만 믿어, 형아.”

발무한과 발요기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쏴아. 산자락을 훑으며 내려온 바람에 쨍쨍하던 해가 성큼 뒤로 밀려났다. 하늘을 물들인 꽃노을과 함께 유난히 긴 하루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그 순간,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효령 처소의 문이 닫혔다. 성질 사납게 계단을 내려온 발리안이 입을 한껏 내밀며 툴툴거렸다.

“그걸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아직껏 장가도 못 갔냐? 그리고 효령, 당신도 자식놈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럼 내 체면이 뭐가 돼?”

그가 볼멘 얼굴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내가 그러고 나왔는데 붙잡지도 않아? 언제는 내가 세상 제일인 것처럼 굴더니, 효령 당신 변했어. 변했다고!”

흥. 제대로 삐진 발리안이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 사달의 발단은 구림 칸, 연제준으로부터였다.

「제가 이번에 늦둥이 딸내미를 낳았는데 그 녀석이 제 어밀 닮아 어찌나 깜찍하게 생겼는지……. 요즘 그 녀석 재롱 보는 맛에 삽니다. 생각 같아서는 하나 더 낳을까, 고민 중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연제준이 발리안 앞에서 신이 나 자식 자랑을 늘어놓았다.

「양심도 없기는. 넌 안사람 생각은 안 하냐? 그 나이에 애 낳고 기르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발리안의 지청구에 연제준이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너 지금…… 질투하는 거지? 하긴 내 나이에 쑥쑥, 자식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이게 다 나나 되니까…….」

발리안이 에누리 없이 그를 깎아내렸다.

「웃기시네. 그렇게 많은 후궁을 두고도 아직 스무 명도 못 채운 주제에, 무슨…….」

연제준은 총 18명의 자식을 두었고 그중 10명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는 넌? 그게, 자식이라고는 달랑 몇 되지도 않는 놈이 할 소리냐?」

「이놈이 아직 뭘 모른다니까. 넌 양보다 질이란 말도 모르냐? 나 봐라. 효령이 하나에 자식 넷. 그것도 한 번은 한방에 둘이었다, 인마. 거기다 든든한 도근이까지. 뭐가 더 필요해?」

삼십 대 후반인 발리안과 사십이 넘은 연제준이 마치 사내아이들처럼 아옹다옹 힘자랑을 해 댔다. 마침 효령의 명으로 귀한 차를 내오던 다와가 둘의 대화를 듣고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사내들은 나이를 먹어도 영락없는 애라더니…….」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옥신각신이었다.

「넌 아무리 날고뛰어도 날 못 당한다니까.」

「흥. 그렇게 잘난 체를 하려거든 나처럼 늦둥이나 하나 낳고 그러든가. 그러면 순순히 내 패배를 인정하지.」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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