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예쁜 내 반쪽
* * *
“이거 형 주려고 구해왔어. 가지고 싶어 했잖아.”
동생의 손에 놓인 지남침(指南針, 나침반)에, 발도근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해졌다. 얼핏 지나가는 말로 보통의 침반(나침반)보다 훨씬 향상된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지남침이 궁금하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거 지남침 아니냐?”
“어. 이게 있으면 별을 살피는 데 한결 도움이 될 거야.”
“고맙다. 역시 아우밖에 없구나.”
기쁨에 겨운 발도근이 덥석, 다시금 동생을 끌어안았다.
“형이 원하는 건 뭐든 다 구해줄게. 그러니까 빨리 낫기나 해.”
발익건이 어른스럽게 형의 등을 토닥였다. 순간.
“정말 눈꼴시어 못 봐주겠네.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다.”
쳇. 발시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다, 내 반쪽.”
느긋하게 고개를 돌린 발익건이 그녀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순간, 발시나의 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내가 그 반쪽이란 소리 하지 말랬지, 징그럽다고.”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너 혹시…… 그날이냐?”
짓궂게 묻는 발익건 때문에 발시나의 예쁜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너 죽을래?”
“치열한 전장에서도 살아 돌아왔는데 내가 고작 네 손에 죽을 것 같냐? 예쁜 내 반쪽?”
“이게…….”
둘이 아웅다웅하는 걸 본 발도근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나. 발익건은 천하에 두려울 것 없는 발시나의 유일한 천적이었다.
‘익건이 녀석,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라니까.’
늘 어른스럽게 구는 발익건이 딱 제 나이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은 누나 발시나와 함께할 때였다.
발도근은, 발익건이 그녀에게만 유독 까칠하게 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질투. 누가 보아도 좋은 동생이었던 발익건이 돌변한 건 얼마 전, 발시나가 정혼한 후부터였다. 그 상대인 안야국 태자 진태운은, 지금은 황후가 된 연제야의 아들로 발시나와 같은 나이였다.
발익건에게서 ‘내 반쪽’이라는, 소유욕 가득한 느끼한 말이 등장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발익건은 걸핏하면 발시나가 몸서리치는 그 말을 골라 사용하며 일부러 화를 돋웠다.
「사내놈에게 환장한 것도 아니고, 시집…… 꼭 가야겠냐?」
「진태운 그 자식. 얼굴은 희멀거니 힘도 제대로 못 쓸걸?」
「마음에 안 들면 말해. 그 자식, 내가 죽여줄 테니까.」
모두 발익건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발시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도근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희멀건 걸로는 발익건을 따를 사람이 없건만, 양심도 없이 저런 말을 하다니. 겨우 정혼한 것으로 이 지경이니 나중에 발시나가 진짜 혼인을 하게 되면 무슨 난리를 칠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해? 저리 비켜.”
얄미운 동생을 에누리 없이 밀쳐버린 발시나가 발도근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혹시 요기 봤어?”
“요기? 못 봤는데?”
“그럼 선묘는?”
발도근의 뒤편에 서 있던 선묘가 대답했다.
“그게, 아까 얼핏 보니 태자 전하 처소로 가시는 것 같았…….”
“고마워!”
발시나가 선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무슨 급한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야, 너 어디 가?”
발익건이 물었지만 발시나는 대답 대신 주먹만 들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발익건이 황당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툴툴댔다.
“형. 역시 쟤 시집가기는 글렀지? 저딴 더러운 성격으로 시집이라고 가 봐야 나라 망신이잖아? 형이 어머니 아버지한테 말씀 좀 드려 줘.”
큭큭. 하하하하하.
더는 참지 못한 발도근의 입에서 기어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귀여운 녀석들.
쌍둥이 누나를 빼앗기기 싫어 안달하는 발익건이나, 새침하게 굴면서도 남동생의 질투를 은근히 즐기고 있는 발시나나. 동생들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
그 곁에서 영문을 모르는 발익건이 선묘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 *
그 시각. 무예 수업을 마친 발무한은 오늘도 큰형 발도근의 침상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형 방에 오면 신기하고 재미난 책이 아주 많았다. 꽃과 나무 그림이 잔뜩 그려진 것이 있는가 하면, 숫자만 가득한 책, 처음 보는 이상한 글씨로 도배된 책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그것들을 마음껏 꺼내 봐도 혼나지 않는단 사실이었다. 또 여기서는 다와 몰래 유과로 배를 채울 수도 있었다. 그 점이 발무한이 수시로 이 방에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끄응. 유과를 입에 문 발무한이 하늘의 별자리와 일식, 자오선에 대해 적힌 천문 역법(天文曆法)서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썼다.
“이건 뭐가 이렇게 어려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네.”
그가 휙, 하니 책을 옆으로 내던졌다.
순간, 문이 열리고 발요기가 뛰어 들어왔다.
“형아,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나도 유과…….”
아. 발요기가 새끼 제비처럼 형을 향해 입을 벌렸다.
“자!”
발무한이 그릇에 담겨 있던 유과를 동생 입에 찔러 넣었다.
“한 번에 씹지 말고 살살 녹여 먹어. 안 그럼 너 또 이빨 빠진다.”
“알았어. 근데 형아. 이거 읽을 줄 알아?”
발요기가 발무한 앞으로 펄럭펄럭 종이 한 장을 흔들어 댔다.
“이게 뭔데?”
“누나 방에서 몰래 훔쳐 왔어. 근데 어려운 글자가 많아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어디 줘 봐.”
발무한이 동생 손에서 종이를 채갔다. 거기엔 안야국 말이 가득 적혀 있었다. 종이를 대충 훑어본 발무한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대박! 너 진짜 최고다, 꼬맹이.”
“뭔데? 이게 뭔지 형은 알아?”
“당연하지. 이거…….”
주변을 살핀 발무한이 발요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알나리깔나리야.”
발무한의 말에 발요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진짜?”
“어.”
“형아. 궁금해, 빨리 읽어줘.”
발요기가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발무한을 재촉했다.
“야, 일단 밖에 아무도 없는지 보고 와. 큰형이나 누나한테 들키면 큰일 나니까.”
“알았어.”
신이 난 발요기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고 밖을 살핀 그가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왔다.
“밖에 아무도 없어. 큰형도 안 와.”
“그럼 이리 들어와.”
“헤. 알았어.”
발요기가 얼른 신발을 벗어 던지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양털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 발무한이 종이에 적힌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운 발시나에게…… 윽.”
발무한이 시작부터 토하는 시늉을 했다.
발요기가 입을 가리며 킥킥댔다.
“지난밤, 네 생각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기탄은 여름이 한창이라던데……. 기탄의 여름은 우리 안야국의 봄만큼이나 아름답다 들었다.”
발무한이 짐짓 어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을 이었다.
“초록빛 가득한 초원엔 지금 바람꽃이 한창이라지? 기탄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수놓는다는 그 꽃들을 상상하니 문득 네가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한없이 널 그리느라 타들어 가는 내 심정을 너는 알……!”
잘 읽어내려가다 말고 발무한이 멈칫했다. 어라? 그 밑에 적혀 있는 글자들은 그에게도 낯설고 어려운 고난도의 것들이었다. 코에 잔뜩 주름을 잡고 들여다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요기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는 없지.
양털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은 발무한이 급기야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 읽기 시작했다.
“아. 하루빨리 널 보고 싶구나. 그땐 우리 둘이 손을 꼭 잡고 함께 유과를 먹으면서…….”
“어, 형? 안야국에도 유과가 있어?”
두 손을 턱에 괴고 감상에 빠져 있던 발요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뿔싸.
정곡을 찔린 발무한이 얼렁뚱땅 둘러댔다.
“야, 안야국에 뭔들 없겠냐?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좋은 건 다 안야국에 있다는데. 어머니만 봐도 알잖아? 그러니까 아버지가 안야국까지 가서 어머니를 홀라당 업어 왔지.”
“근데 형아.”
발요기가 또다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렇게 안야국에 좋은 게 많은데 태운이 형안 왜 우리 누나랑 정혼을 해? 무시무시하고 까칠한 발시나 누나가 뭐가 좋다고?”
“그야…….”
말문이 막힌 발무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태운이 형은…… 성격 대신 얼굴만 보나 보지. 누나가 얼굴은 좀 되잖…….”
딱. 순간 매운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야!”
머리통을 쥐어박힌 발무한이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찐 찰나. 발시나가 그의 손에서 서신을 채갔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왜 얼굴만 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난 머리도 되고 몸매도 되잖아? 그리고 너…….”
발시나가 발요기를 향해 몸을 틀었다.
“누가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래? 너희들. 오늘 단체로 내 손에 죽어 볼래?”
“아, 자, 잘못했어, 누나.”
발요기가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누나 난 아직 어린애라서 막 때리고 그러면 안 돼. 봐, 난 이빨도 한 개 없잖아. 그러니까 때릴 거면 나보다 큰 무한이 형아를…….”
“야. 이걸 몰래 훔쳐 와서는 읽어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와, 이 배신자!”
발요기가 콧등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그럼 무서운데 어떡해? 난 세상에서 다와하고 시나 누나가 제일 무섭단 말이야. 그러니까 형아가 나 대신 좀 맞아 주라.”
“뭐? 이게……. 그럼 난 누나가 안 무섭고? 난 창자 벌레보다 누나가 더 무서…… 아얏!”
발무한이 말을 하다 말고 또 머리를 감쌌다. 그 사이 발시나가 그 머리에 알밤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 비교할 걸 해야지. 날 어디다 갖다 붙여? 안 되겠어. 너희들 당장 밖으로 나와. 혼쭐을 내줄 테니까. 셋 셀 때까지 나와. 늦으면 꿀밤 열 대 추가야.”
“으아, 난 꿀밤 싫어. 누나 손 너무 매워.”
파르르. 치를 떤 발요기가 막 신발에 발을 꿰는 사이.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 난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