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111화 (111/116)

외전 5화. 의좋은 형제

* * *

“…….”

발리안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마치 두 입술이 처음부터 하나로 붙어 있었던 것처럼.

기나긴 침묵에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 만에 발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 선택…… 정녕 후회하지 않겠느냐?”

“할 겁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많이…….”

발도근이 얼굴을 들었다.

“제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화도 내고 삐치기도, 샘도 내실 거라고. 전 그 말씀 때문에 알았습니다.”

“…….”

“아버지는 제게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인데 누구인들 미래를 섣불리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있기까지 부족한 저를 키우시느라…….”

“…….”

“아버지도 어머니도 수많은 번민과 고통, 시행착오를 거치셨겠지요. 그럼에도 두 분은 제게 너무나도 훌륭한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저도…… 잠깐의 후회나 방황, 고통을 겪을지라도…….”

발도근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반드시 두 분처럼 훌륭한 결과에 도달할 겁니다. 왜냐하면 전…… 틀림없는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니까요.”

“도근아.”

발리안이 발도근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버지.’

발도근은 생각했다.

아버지의 품은 영락없이 기탄을 닮았다고. 투박하고 거칠지만,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땅덩이처럼 한없이 넓고 깊었다. 무엇이든 채근하지 않고 매 순간, 부족한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아버지. 이런 아버지의 아들로 살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런 막무가내에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커다란 손이 다 자란 아들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머니께서 그거…… 아버지를 닮아 그런 거라던데요?”

발도근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제껏 장가를 안 가고 버틴 것도 다 아버질 닮아 그런 겁니다. 어머니 같은 최고를 찾느라……. 두고 보십시오. 정말 끝내주는 며느리를 데려올 테니.”

“미친놈.”

“대신…… 당분간 제 다리가 말짱한 건 비밀로 해 주십시오. 제가 거짓말한 게 들통나면 어머니나 동생들 볼 면목이 없어서…….”

“퍽 일찍도 걱정한다.”

“그런가요?”

하하, 하하하하하. 두 사람이 하늘을 보며 웃었다.

여름을 맞은 기탄의 하늘은 다른 나라보다 더 높고 더 푸르렀다. 그러나 마주한 두 사람의 마음엔 결코 미치지 못했다.

쏴아, 쏴아. 멀리서 바람이 불었다. 풀들이, 나무들이, 곡식들이 자라기에 좋은 따뜻한 바람이었다.

* * *

오늘도 발도근은 황궁 안 서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서고는 효령이 기탄의 황후가 되면서 새로이 만든 것이었다. 안야국 것은 물론 주변 크고 작은 나라들의 서책으로 가득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해마다 기탄을 지나는 대상들을 통해 끊임없이 새 책을 들여오고 있었다.

[진실하며 변치 않는 진리는 오묘하여 명명하기가 어렵지만, 효용이 현저하여 굳이 경교(景敎)라 부르게 되었다.]

[(인간) 최초의 선한 본성은 겸허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순박하고, 깨끗한 마음엔 원래 욕망이 없었다.]

발도근이 읽고 있는 것은 대진국(大秦國, 동로마제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경교(오늘날의 기독교)에 관한 책이었다.

‘경교라……. 정말 세상은 무궁히 넓고 배워야 할 것이 끝도 없구나.’

얼굴은 영락없이 발타고를 닮은 발도근이 진중히 앉아 독서에 빠진 모습은 가히 이색적이었다. 발도근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같은 생각일 터였다. 하지만 외모를 제외하면 발도근은 효령의 판박이였다.

어린 시절 효령이 잠자리에서 끊임없이 읽어 준 서책 덕분에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책벌레가 되었다. 노력만큼 잘 늘지 않는 무예 실력도 거기 한몫했다.

아무튼. 제일 위의 형이 걸핏하면 책을 끼고 도니 동생들도 자연히 그를 따라왔다. 발시나나 발익건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어린 발무한, 꾀부리기 좋아하는 발요기까지 안야국 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토록 선한 것이었다면, 어째서 세상에 전쟁과 다툼이 생겨난 거지?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는 건가?’

발도근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책이 가득한 선반 모퉁이에서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태자 전하, 지금이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계실 땝니까?”

황궁 서고에서 일하는 여관이 겁도 없이 발도근을 향해 지청구를 놓았다.

자그마한 몸집에 귀여운 외모, 똘똘한 눈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선묘라는 이름의 여관은 안야국 출신으로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기탄군들이 삭주에서 철수할 때 짐을 실은 마차에 숨어 이곳까지 따라온 맹랑한 꼬맹이였다.

일찍이 기탄군의 손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던 그녀는 명국공부에서 지내면서 효령과 한유에게 기탄 말을 배웠다. 그러다 기탄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 그녀는, 급기야 그런 대담한 짓까지 벌이고 나섰다.

선묘는, 그 총명함을 알아본 모개와 다와에게 거두어져 언니 산시와 함께 황궁의 여관이 되었다. 현재 그녀의 나이 열여덟. 효령이 처음 발리안을 만났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선묘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발도근에게 다가왔다.

“오늘이 발익건 황자님께서 환궁하시는 날이라는 걸 정녕 모르고 계셨습니까?”

“……!”

아뿔싸. 그제야 발도근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구겨졌다.

동생이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기쁜 날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자꾸 이러시면…… 멋모르는 인간들은 태자 전하를 오해한단 말입니다.”

선묘가 마치 제 일처럼 화를 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빠지면, 그녀의 말마따나 태자인 발도근이 동생을 시기한단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시, 시간이 얼마나 됐느냐? 지금이라도 가면…… 너무 늦을까?”

발도근이 다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그런 그를 보고 선묘가 늘어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왜냐하면…… 저기 저 소리요.”

선묘가 문을 가리켰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이 밖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제 추측이 맞다면, 발익건 황자님이 환영 행사를 마치자마자 형님이 보고 싶어 달려오신 것 같은데요?”

“그래?”

삽시간에 발도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가 기쁜 마음으로 동생을 맞으러 나가려는 순간, 선묘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내가 정말 못 살아. 태자 전하는 매사 왜 이렇게 빈틈이 많으십니까?”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그녀가 발도근의 다리를 가리켰다.

“그게 지금 다리를 다친 사람의 걸음입니까? 그러다 꾀병인 걸 들킨다니까요.”

그녀는 이제껏 발도근이 숱하게 벌인 어이없는 짓들의 내막을 아는 유일한 측근이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제껏 감쪽같이 모두를 속이는 일이 불가능했을 터.

아차!

그제야 정신을 정신을 차린 발도근이 어색하게 발을 디뎠다.

“어떠냐? 이러면 됐느냐?”

선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제발 좀 잘하세요, 전하. 이러다 제가 간이 졸아 죽겠습니다. 제 명대로 못 살겠다고요.”

“고맙다, 선묘야. 역시 난 네가 없으면 안 되겠다.”

씽긋. 선묘를 향해 웃어 보인 발도근이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선묘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두 손을 얹었다.

“뭐야? 그런 낯뜨거운 소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시다니. 하여튼 태자 전한 정말 못 말린다니까.”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 한 그녀가 서둘러 발도근의 뒤를 따라갔다.

과연. 선묘의 말처럼 발도근은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 급히 달려오는 발익건과 마주쳤다. 바람에 검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발리안이었다.

“다리도 불편한데 뭐 하러 나와? 내가 알아서 올 텐데.”

발익건이 아버지를 꼭 닮은 시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발도근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하다, 내 동생. 어서 와라.”

그가 발익건을 향해 팔을 벌렸다.

“…….”

피식. 발익건이 벌어지는 입매를 감추지 못한 채 형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알지, 형?”

“그래, 이 녀석아.”

발도근이 저보다 큰 동생의 머리를 헝클었다.

“미안하다. 마중 못 나가서.”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왜 필요해?”

“그래도…….”

눈치 빠른 발익건이 금세 형의 속내를 읽었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내가 형을 몰라? 그리고…….”

발익건이 발도근을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큰 산은 쉽게 움직이는 거 아니야.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이미 할 일을 다 한 거라고. 그러니 작은 일에 마음 쓰지 마. 그딴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녀석. 정말 큰 산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발도근이 턱 밑까지 올라오는 말을 꿀꺽 삼켰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동생 발익건은 눈빛의 깊이부터가 여느 사람과는 달랐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단번에 사람들을 휘어잡는 자질 하며 뛰어난 상황 판단 능력. 본능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함과 이지. 거기다 되바라진 데 없는 너그러움과 대범함까지.

하나도 갖기 어려운 장점과 재능을 두루 갖춘 발익건이야말로 ‘타고난 제왕’이란 말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무림제가 돌아오기까지 좀 더 생각해 봐라. 그때까지도 지금의 결심이 변하지 않는다면 더는 말리지 않으마.」

아버지 발리안은 그렇게 말했지만, 발도근은 더 이상 태자 자리에 미련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버거운 자리를 제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었다. 왕족 회의에서 여러 칸들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 큰 난관인 동생 발익건부터 넘어야 했다. 늘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주겠다던 그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는 장면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후우.

남모를 근심으로 발도근이 미간을 구긴 사이. 발익건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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