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아버지와 아들 2
* * *
「아뇨. 전…… 황후마마가 우리 어머니면 좋겠어요.」
발도근의 말에 효령이 활짝 웃었다.
「난 또 뭐라고……. 그럼 나야 좋지. 난 진작부터 도근이가 어머니라고 불러 줬으면 싶었는데…….」
발도근의 눈이 커졌다.
「……저, 정말요? 전 말도 느리고 멍청한데요?」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우리 도근이 요즘 말하는 거 보면 더듬지도 않고 또박또박 잘하던데. 어려운 글을 가르쳐 줘도 금세 알아듣고. 엄청 똑똑해.」
헤. 발도근의 얼굴이 사르르 풀어졌다.
「그럼 정말 어머니라고 불러도 돼요?」
「당연하지.」
「야, 신난……!」
좋아서 펄쩍 뛰던 발도근이 이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근데 대칸은……. 대칸이 싫어하면 어쩌죠?」
「그럴 리가…….」
「아뇨. 대칸이 절 미워할지도 몰라요. 제가 황후마마, 아니 어머니랑 친하다고 맨날 샘내잖아요.」
「그래서 도근이는 대칸이 싫어?」
아뇨! 소리를 높인 도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효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칸이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가서 여쭤봐.」
「……시, 싫어요. 무서워요.」
「……걱정할 거 없다니까. 그럼 어머니가 같이 가줄까? 묻는 건 도근이가 하고.」
그제야 발도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두 사람은 다정히 손을 잡고 발리안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좀 나가 있어.」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냐는 발도근의 질문에 발리안은 효령부터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발도근을 데리고 가 의자에 앉혔다.
「잘 들어라, 꼬맹이…….」
발리안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황후마마, 아니 네 어머니처럼 인내심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발도근은 두 손을 모은 채 심각한 얼굴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화도 잘 내고 삐치기도 잘한다. 샘도 많고……. 그건 너도 알지?」
발도근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내가 네 아버지였으면 좋겠냐?」
「네…….」
「왜? 내 어디가 좋아서?」
「대칸은 키도 크고 멋지고 검독수리고 싸움도 잘하고 나랑 같이 유과도 잘 먹어주고 오줌 쌌을 때도 안 때리고 차도 맛있게 타 주고 힘도 세서 나 목말도 태워 주고…….」
발도근이 숨도 안 쉬고 줄줄 숨겨 두었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야, 그만…….」
발리안이 발도근의 말을 막았다.
「뭐야? 내가 그렇게 장점이 많다고? 듣고 보니 나도 꽤 쓸 만하네.」
발리안이 발도근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꼬맹이. 좋은 아버지가 되겠단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렇게도 내가 좋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발도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 아버지라고 불러도 돼요?」
「대신 말 안 들으면 혼도 나고 엉덩이도 맞는다. 그래도 좋냐?」
「네!」
「그럼 어디 한번 불러 봐라, 아버지!」
「아부지!」
신이 난 발도근이 폴짝 발리안의 품에 매달렸다. 씨익, 발리안의 입이 귀에 걸렸다.
「하, 그놈 참. 난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지…….」
그때를 떠올린 발도근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어느새 그의 나이 스물셋. 그 옛날 자신과 마주했던 발리안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이날이 오기까지, 발리안과 효령은 발도근을 친자식처럼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했다. 동생들 역시 발도근을 친오빠, 친형으로 알고 자랐다. 그렇기에 발도근은 자신의 행동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아버지…….”
한참 만에 발도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가 언제 처음…… 아버지 아들이 되고 싶었는지 아십니까?”
“…….”
“아버지를 처음 뵈었을 때. 아버니께서 제게 ‘내가 네 아버지를 죽였다’ 말씀하셨던 땝니다.”
그때 발리안은 발도근에게 할머니였던 황후가 죽으며 남긴 유서를 건넸다. 온통 발리안에 대한 저주와 복수를 부탁하는 말로 가득 찬 글이었다.
“그때까진 누구도…… 제가 묻기 전에 무얼 가르쳐주거나 알려준 적이 없습니다. 물었다고 제대로 답해준 적도 없고요. 사람들 눈에 전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과자나 좋아하는 어린아이였을 뿐이니까요.”
“…….”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와 눈을 맞추고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슬프기보다 막…… 가슴이 뛰었습니다.”
발도근이 발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와 겨우 열여섯 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는 아직도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만 봐도 설렌다고 했다.
발도근도 그랬다. 패배를 모르는 위대한 검독수리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가슴 벅차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발도근은 발리안을 실망시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왜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버지와 어머니만 외면하고 계십니까? 전 태자의 그릇이 아닙니다.”
“발도근.”
“다들 그럽니다. 익건인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다고요. 생긴 것도, 좋은 머리도, 뛰어난 무예 실력까지. 심지어 여자로 오해받기 싫어서 머리카락을 풀고 다니는 것까지 아버지 판박이라고요.”
“그래서?”
“왜 익건이를 태자로 삼지 않으시는 겁니까? 익건이가 저보다 더 태자에 어울리는 그릇이라는 건 온 세상이 다 압니다. 그런데 왜…….”
순간, 발리안의 입매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온 세상이 다 안다고? 네 녀석 자격지심이 아니고?”
“아버지.”
“말했지. 난 좋은 사람도, 순진한 사람도 아니라고. 그러니 어리석은 연민이나 정에 이끌려 널 선택한 게 아니다.”
“그럼 제가 첫째이기 때문입니까?”
“네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 고작 그따위 것뿐이라면 정말 내 선택에 문제가 있었단 얘기로군.”
발리안이 무서운 눈으로 발도근을 쏘아보았다.
“네 녀석 말마따나 익건인 무서우리만큼 날 닮았다. 그래서 놈의 행동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아. 하지만 네놈은…… 늘 나를 당황하게 해, 오늘처럼.”
“…….”
“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해 내고,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깨닫게 한다. 네 어미를 닮아 세심하고 자상해. 네놈은 나보다 훨씬 더 크고 너른 품을 가졌단 말이다.”
“…….”
“창업(創業)보다 어려운 것이 수성(守城)이다. 창업은 힘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수성에 필요한 것은 내게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하고 함께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부단한 공부와 자기 수양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 내가 이룬 이 거대한 땅을 지키는 일. 거기 너보다 더 적합한 놈이 있다 생각하느냐?”
순간, 발도근의 눈에 얼핏, 물기가 어렸다. 그가 아버지 발리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것으로 확실히 마음을 굳혔습니다. 저……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뭐?”
발리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네놈. 대체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게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후우. 숨을 고른 발도근이 이제껏 감춰 왔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저…… 동생이지만 늘 익건이가 부러웠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너무도 닮아서. 군사들이나 백성들이 익건일 두고 아버지를 뵙는 것처럼 환호할 땐…….”
“…….”
“정말 질투가 났습니다. 왜 난 처음부터 아버지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이렇게 아버지와 다를까……. 불공평한 하늘에 대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저.”
“…….”
“아버지. 제가 대칸이 된다면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수성은 이루지 못할 겁니다. 저와 익건인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세상은 결코 우릴 그냥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
“백성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검독수리의 친아들이 아닌 저를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아버지의 뒤를 고스란히 밟고 있는 완벽한 익건이 대신 왜 부족한 저를 대칸으로 섬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
“다들 불만이 쌓이겠지요. 그럼 나라는 분열되고 또다시 피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건 아버지께서 기대하시는 수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 아닙니까?”
“도근아.”
“아버지.”
발도근이 발리안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전 지금 억지로, 마지못해 제 자리를 내놓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
“아버지 어머니께서 조금이라도 저보다 더 익건이를 아끼신다 여겼다면, 그래서 내심 익건일 태자로 삼고 싶어 하셨다면…… 속이 상해서라도 더 이 자리를 놓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
“…….”
“조금 전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으로 저는 더욱 제 생각이 옳다 확신했습니다. 제발 절 이해해 주십시오, 아버지.”
“어리석은 놈.”
이제껏 아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발리안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익건이 대칸이 되면…… 그럼 네가 말한 그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모든 걸 다 빼고 정통성 하나만 따져도 그 자리의 진정한 주인은 너다. 익건이 아니야.”
“…….”
“설사 네가 대칸의 자리를 버리고 차뉴 칸이 된다 한들,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말이다.”
“아니요.”
발도근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전 아버지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 말씀이 맞습니다.”
발도근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전 대칸도 차뉴 칸도 되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뭐?”
“전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성을 이뤄낼 겁니다. 여기 주도에서, 익건이 옆에서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발리안이 얼어붙었다.
“아버지를 닮는 게 꿈이었지만 아무래도 전 어머니를 더 닮은 것 같습니다. 책이 너무 좋아 무예를 익힐 시간마저 아깝습니다. 익건인 둘 다 잘만 해내던데 저에겐 무리예요. 그래서…….”
“…….”
“앞으론 제가 좋아하는 것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어머니 곁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 익건이가 대칸이 되었을 땐…… 저도 모개처럼 유능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래서 기탄을 법치의 나라, 무지와 몽매에서 벗어난 문명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발도근이 확신에 찬 얼굴로 발리안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그러셨죠? 어머니는 아버지를 완성시킨 사람이라고. 어머니와 떨어져서는 아버진 존재 이유를 잃는다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살아오셨다고요.”
“…….”
“어쩌면 저와 익건이도 그런 사이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떨어지면 기탄은 분열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기탄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완전해질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
발도근이 발리안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