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아버지와 아들 1
* * *
「내가…… 두려우냐?」
어린 발도근이 말로만 듣던 검독수리와 처음 마주했을 때. 그때도 그는 그렇게 물었다.
「…….」
발도근은 대답 대신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너도 들어서 알 것이다. 내가 네 아버지를 죽였다는 걸…….」
일곱 살에 불과했지만, 궁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발도근은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죽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 발타고는 검독수리의 손에,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에.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를 보고 궁녀들은 역시 어린애라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런 것도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게 무섭고 심각한 일이라는 것쯤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어머니 아버지처럼 죽나요?」
「……아니. 하지만 이제부터 황궁이 아니라 차뉴 칸과 함께 살게 될 게다.」
발도근이 바스스 고개를 들었다.
「차뉴 할아버지랑요?」
「왜…… 싫으냐?」
네. 발도근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좋아하지만…… 차뉴에선 살긴 싫어요. 예전에 왕궁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긴 다 어른들뿐이에요. 같이 놀 사람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없어요. 할머니는 맨날 누워 계시고…….」
차뉴 칸에겐 왕비도 남은 자식도 없었다. 그에게 가족이라곤 나이 든 후궁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자연 어린 손자 손녀들도 없었다. 궁녀나 단사관들도 옛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차뉴의 왕궁은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 서글프고 쓸쓸한 기운을 발도근도 느낀 모양이었다.
발도근이 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저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요? 여긴 친한 궁녀들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랑 과자도 있는데.」
「…….」
「전 유과(乳菓, 동물 젖을 말려 만든 과자)만 있으면 하루 종일 궁려 안에만 있을 수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안 보이는데 처박혀 있으라고 해서 삼 일 동안 안 나온 적도 있어요.」
발도근이 작은 손을 모으며 빌었다.
「……저 말도 잘 듣고 떼도 안 쓸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살게 해주세요, 네?」
순간, 발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 아버지, 어머니가 안 보이는 데 처박혀 있으라고 했다고?」
「…….」
발도근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말이냐?」
「아버지는 맨날 나만 보면 소리를 질러요. 내가 느리고 멍청하다고. 나 같은 건 무림제에도 못 나갈 거랬어요. 그리고 어머닌…… 내가 꼴도 보기 싫대요. 나 때문에…….」
「…….」
「……아버지가 맨날 화만 낸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맨날 다른 마마들만 찾는다고…….」
그의 말을 듣다 말고 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실수라도 했나, 발도근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잘못했어요.」
혼날까 두려운 그가 이유도 모른 채 두 손을 비볐다.
「넌 잘못한 거 없다. 그러니 사과하지 마.」
「그, 그럼 왜 화가 난 건데요?」
「화난 거 아니다.」
발리안이 발도근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자, 차뉴 칸에게…….」
발리안이 기어이 절 그에게 보내는 것이라 여긴 발도근의 눈에 핑하니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혀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널 여기서 살게 허락해 달라고…….」
물론 발도근이 처음부터 발리안의 아들이 된 건 아니었다. 발리안은 그저 발도근이 이제껏 살던 그대로 궁녀들의 손에서 자라게 할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계산도 있었다. 대칸이 된 이상, 위험의 불씨가 될지 모르는 발도근을 시야 안에 두고 지켜보려는. 하지만 그 얄팍한 계산은 효령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이리 와, 귀여운 꼬맹이…….」
효령은 원수나 다름없는 발타고의 아들을 처음 본 순간, 그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발리안은 그때 본 발도근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조금 당황하는가 싶던 아이의 얼굴이 이내 행복으로 물들었다. 그 작은 손이 효령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놓을 줄을 몰랐다.
7일에 걸친 대칸의 장례가 끝나고 효령이 구림 부족의 땅으로 떠나야 했을 때. 부모의 죽음에도 무덤덤하던 발도근은 목을 놓아 통곡했다. 제아무리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효령은 우는 발도근을 데리고 혼자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조홧속인지. 발도근은 퉁퉁 부은 눈으로 웃으며 효령을 배웅했다.
그날 밤. 발리안은 잠자리에 들었다 황당한 지경을 당했다. 양털 이불 속에서 빼꼼 삐져나온 작은 머리통 때문이었다.
「꼬, 꼬맹이. 네가 왜 여기……!」
「……예, 예쁜 누나가 꼭 여기서 자라고 해서……. 소, 손가락 걸고 약속했어요.」
발도근은 또 혼이 날까 발리안의 안색부터 살폈다.
「이거 사람 미치겠군.」
그날부터 발리안과 발도근의 어색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연제준과 허올란이 불타는 밤을 보낼 때, 연제록산이 된 효령이 연제야와 정담으로 긴긴밤을 지새울 때. 발리안은 팔자에도 없는 육아를 해야 했다.
「야, 꼬맹이. 또 그걸 먹냐? 그게 그렇게 맛있어? 그 돌같이 땡땡한 게……?」
「그, 그냥 막 씹으니까 그렇죠. 입에 넣고 가만히 물고 있어야 해요. 그럼 녹아서 말랑말랑해지는데 그때 먹어야 맛있어요. 이렇게요.」
「어디 나도 줘 봐. 으흠. 그러고 보니 제법 먹을 만하군.」
「그렇죠? 헤.」
발리안은 밤마다 발도근과 나란히 침상에 걸터앉아 유과를 녹여 먹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앙.」
「야, 일어나. 너 왜 울어? 또 오줌 쌌냐?」
「……아, 아부지가 대답을 늦게 했다고 막 때려…….」
「그거 꿈이야, 꿈. 진짜 아니라고……. 뚝. 뚝 못 그쳐? 너 계속 울면 내쫓는다.」
「…… 으, 으흡. 뚝.」
제가 지금 효령도 아닌 이 재미없는 놈을 데리고 뭐 하는 짓인지.
발리안은 한껏 입을 내밀면서도 발도근을 안고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오래전 자신이 아버지 하투 칸께 바랐던 것도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잠이 든 발도근의 얼굴 위에, 울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사리물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졌다.
그때부터 발리안은 더는 발도근의 뒤치다꺼리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지루하고 긴 겨울밤을 함께 보낼 친구가 있어 다행이었다.
「잘 봐. 검은 이렇게 쥐는 거야.」
「이렇게요?」
「그래, 잘했어. 발은 앞으로 이렇게.」
「……이, 이렇게요?」
「좋아. 꽤 그럴듯한데?」
처음 듣는 칭찬에 발도근의 입이 귀에 걸렸다. 두 사람은 휑하니 넓은 궁려 안에서 같이 몸을 풀고 검을 휘두르고 수유차를 타서 먹었다.
드디어 꽃 피는 봄. 효령이 돌아왔고 발리안과 그녀는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7일간의 혼인 잔치가 끝나기 무섭게 발도근은 다시금 발리안의 침상으로 기어들었다. 녀석 때문에 한창 뜨거워야 할 신혼의 밤이 엉망이 되었다.
발리안의 인내심도 곧 바닥이 났다.
「야, 꼬맹이. 이제 그만 네 궁려로 돌아가.」
「시, 싫어요. 혼자는 무섭단 말이에요.」
더 이상 발리안이 겁나지도 않는지 발도근이 대놓고 반항했다.
「이 녀석이……! 그럼 이쪽으로라도 와.」
「싫어요. 나도 누나, 아니 황후마마랑 자고 싶단 말이에요.」
「뭐, 누구랑 자? 너 혼날래? 황후마마는 내 거야. 나랑만 잘 수 있어.」
「그런 게 어딨어요?」
발도근은 보란 듯 효령의 옆구리에 착 달라붙었다.
「야! 너 진짜……!」
효령은 발도근의 등을 쓰다듬으며 발리안을 말렸다.
「애랑 싸울 거예요? 참아요. 네?」
「참으라고? 겨우내 참았으면 됐지, 여기서 더 참으라니. 누구 죽는 꼴을 보려고?」
「도근이 들어요. 제발……!」
「들으라지. 야, 인마.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나 해?」
효령이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사정했다.
「오늘만 참아요, 응? 그러면 내가 내일은 꼭 해결할 테니까.」
다행히, 다음날부터 발도근은 얌전히 제 처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
한편으론 안도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발도근 이 나쁜 놈. 한겨울 내내 절 돌본 사람은 난데 왜 효령이 말을 더 잘 듣는 거야?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무슨 수를 썼기에 그 질긴 놈이 이렇게 쉽게 떨어져 나가?」
잠자리에 누운 발리안이 효령에게 물었다.
「그게…….」
효령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금만 참으면…… 같이 놀 동생들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요.」
발도근에게는 형제가 하나도 없었다. 후궁 소생의 배다른 누나들만 셋 있었는데, 다들 할머니였던 황후가 어린 나이에 억지로 시집을 보내 버려서 제대로 어울려 본 적이 없었다. 늘 또래에 목말랐던 그에게 동생이라니. 그처럼 가슴 설레는 말도 없었다.
훗. 효령의 말을 들은 발리안의 입매가 사악하게 휘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식. 영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었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을 했다면 별수 없군.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그로부터 발리안과 효령의 끝없는 철야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효령은 여름이 가기 전 아이를 갖게 되었다.
「아유. 입덧하시는 거랑 배를 보니 틀림없는 황자님이네. 우리 황자님, 아버지 어머니를 닮았으면 생긴 것부터 끝내주실걸요.」
「…….」
다와가 효령에게 하는 말을 들은 발도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버릇처럼 붙들고 있던 효령의 치맛자락을 놓고 슬그머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효령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왜 우울한지를 묻는 그녀에게 발도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황후마마…… 저도 어머니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어요.」
「도근이,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구나?」
「…….」
발도근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