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사랑스러운 가족
* * *
“같이 가, 형아.”
하아 하아. 돌계단을 올라가던 발요기가 그예 걸음을 멈추고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이 작은 발로 네 살이나 많은 형의 걸음을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야, 빨리 와, 꼬맹아. 이러다 여우 같은 누나가 선수를 친단 말이야.”
앞서가던 발무한이 뒤를 돌아보며 지청구를 놓았다.
“하, 하지만 숨이 차단 말이야.”
“그럼 나 먼저 간다. 넌 천천히…….”
“싫어, 싫다고!”
발무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발요기가 주먹을 움켜쥐며 발을 굴렀다.
“같이 가. 나도 같이 갈 거란 말이야, 형아.”
콧잔등에 잔뜩 주름을 잡은 발요기가 두 손을 바닥에 짚더니 급기야 네 발로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꼬맹이. 또 시작이다. 아이고, 저 고집불통…….”
보다 못한 발무한이 얼른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동생 앞에 등을 내밀었다.
“빨랑 업혀. 이럴 시간 없어.”
“헤헤. 형아 최고!”
날름 혀를 내밀어 보인 발요기가 기다렸다는 듯 발무한의 등에 올라탔다. 동생을 업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발무한이 성큼성큼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눈앞에 궁려의 문이 나타나자 눈치 빠른 발요기가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이럴 때 보면 둘은 기가 막히게 장단이 잘 맞았다.
“고맙다, 동생아!”
재빨리 안으로 뛰어든 발무한이 신이 나 외쳤다.
“있잖아요, 어머니. 익건이 형이……!”
쳇. 그러나 발무한은 이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다, 동생아. 오늘도 한발 늦었구나. 어머니와 누나는 네가 전하려는 그 소식, 이미 다 알고 있어.”
어머니 효령 곁에서 누나 발시나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잇, 오늘도 졌다. 그러게 형아가 조금 더 빨리 계단을 올라왔어야지.”
발무한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발요기가 애먼 형 탓을 해댔다.
“너 이러기야? 내가 왜 늦었는데? 다 너 때문이잖아.”
발무한이 잔뜩 골이 난 얼굴로 효령과 누나 곁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렴, 우리 귀여운 아들들. 근데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우리 무한이가?”
효령이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발무한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효령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 안야국 식으로 성을 빼고 불렀다. 남편 발리안이야 멋모르던 시절, 얼결에 성째 부르기 시작한 게 입에 붙었지만, 이상하게 아이들에겐 옛 버릇이 튀어나왔다.
그 습관을 고치려 노력하는 효령을 두고 발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끼리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나도 당신을 효령이라고 부르잖아?」
효령에겐 이미 연제록산이라는 새 이름이 있지만 발리안은 그녀를 늘 효령이라고 불렀다. 특히 잠자리에서는 더.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효령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이후, 이들 가족은 서로를 성 없이 이름으로 부르는 데 곧 익숙해졌다.
“어머니. 아무래도 대단사관이 저한테 거짓말을 했나 봐요.”
발무한이 입술을 대자로 내밀었다.
“모개가? 대단사관이 뭐라고 했기에?”
“익건이 형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거……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준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발익건은 효령과 발리안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로 발시나와는 쌍둥이 남매였다. 기탄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아이의 귀에 대고 직접 이름을 말해 주는 전통이 있었다.
「아이고, 이런 귀여운 녀석. 네 이름은 발시나란다. 찬란하게 빛난다는 뜻이지.」
발리안이 딸을 안고 속삭이고 있을 때. 다와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애고머니. 아기씨가 또 나오는데요?」
「뭐?」
그렇게 예고도 없이 어머니, 아버지의 뒤통수를 때리며 태어난 게 발익건이었다.
발시나와 발익건은 영락없는 발리안의 판박이였다. 눈처럼 뽀얀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특히 오뚝한 콧대는 갓 태어난 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둘의 얼굴이 서로 똑 닮아서 모르는 사람은 여자 쌍둥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발익건이 어느새 열다섯이 되었다. 늘 자신의 경쟁 상대는 ‘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그 말처럼 열네 살에 검독수리가 되고, 해가 바뀐 올해. 처음 참전한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며 대승을 거두고 지금 주도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어머니, 대단사관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면 누나가 어떻게 저보다 빨리 그 사실을 전할 수가 있어요? 제가 듣자마자 쉬지도 않고 달려왔는데?”
딱. 발시나가 동생의 이마에 알밤을 날렸다.
“바보. 이래서 남자들은 여잘 못 이긴다니까. 너 세상에서 대단사관보다 더 대단하고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
히잉. 울상이 된 발무한이 물었다.
“그게 누군데?”
“다와. 이 황궁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빼고 제일 센 사람은 다와라고. 다와가 내 편인 한, 넌 날 못 이겨, 꼬맹이.”
“에이씨, 나 꼬맹이 아냐! 꼬맹인 이 녀석이라고.”
발무한의 항변에 발시나가 코웃음을 쳤다.
“걘 애기고. 니들이 아무리 종종거려봐야 평생 이 누나를 따라잡을 수 없을걸? 그러니 그만 포기해라, 이 녀석들아.”
“흥, 절대 포기 안 해. 언젠가 기필코 누나를 이기고 말 거야.”
약이 바짝 올라 앙알대는 발무한의 귀에 대고 발요기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뭐?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인데?”
갑자기 눈을 빛낸 발무한이 효령에게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저흰 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볼게요. 못된 누난 알아서 잘 있든지, 말든지…….”
쌩. 동생 손을 잡은 발무한이 부리나케 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에도 발요기가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고맙다, 동생아.”
쾅. 둘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발시나의 입에서 뻥, 하고 웃음이 터졌다.
“하여튼 단순하다니까, 저 녀석들.”
“쟤들 지금 어디 가는 거니?”
효령이 어이가 없어 물었다.
“보나 마나 산시를 포섭하러 갔을걸요? 산시는 늘 다와 곁에 붙어 있으니까.”
“와! 우리 요기가 그렇게 머리가 좋단 말이야?”
“네. 저 쪼끄만 게 알고 보면 잔머리 굴리는 덴 선수라니까요. 무한이가 모개라면 요기는 다와예요. 제 형 머리 꼭대기에서 논다고요.”
발시나가 팔짱을 끼며 툴툴거렸다.
“그나저나 둘 다 왜 그렇게 날 이기고 싶어 하는지 몰라. 열다섯인 나랑 겨우 열한 살, 일곱 살 꼬맹이인 저희들이랑 같냐고요. 바랄 걸 바라야지.”
“한 번쯤 져주면 어때서? 저렇게 귀여운데…….”
“어머니가 모르셔서 그래요. 이전에 한 번 져줬더니 어찌나 의기양양 기어오르는지…….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요. 도대체 남자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발시나가 불만스럽게 말을 이었다.
“익건인 제가 키 좀 크다고 동생 주제에 오라버니 행세를 하려 들지 않나, 저것들은 못 기어올라 안달이질 않나. 아,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이 황궁에 저랑 수준이 맞는 사람은 도근 오라버니뿐이라니까요.”
훗. 효령의 입에서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저도 저만할 때가 엊그제인데 동생들 앞에서 어른 흉내를 내는 딸이 너무도 우스워서였다.
나도 저 나이 때 저랬나?
그러고 보니 외사촌 오라버니 승유와 그 친구인 교기, 동생 한유까지. 자신도 발시나처럼 순 남자 형제들에 둘러싸여 살았었다. 꽤 활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딸인 발시나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효령은 딸의 거침없는 모습이 더욱 좋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기탄의 너른 초원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탁 트인다고나 할까.
“우리 딸 예쁘다, 정말…….”
느닷없는 사랑 고백에 발시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나 그 눈이 이내 호선을 그리며 기분 좋게 휘어졌다.
“그야 당연하죠. 누구 딸인데…….”
하하, 하하하.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그 시각. 발리안과 발도근은 너른 초원에 앉아 있었다. 저 멀리 땅과 하늘이 만나는 지평선 위로 수많은 양털 구름이 지나고 있었다.
“크, 시원하다. 자, 너도 마셔라.”
유주로 목을 축인 발리안이 발도근에게 가죽 부대를 넘겼다. 발타고의 소생인 발도근은 어릴 적 발리안에게 거두어져 그의 큰아들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벌컥벌컥. 목을 축인 발도근이 다시금 가죽 부대의 끝을 여몄다. 그것을 옆에 내려놓은 그가 발리안에게 물었다.
“익건이가 창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면서요? 기쁘시죠?”
“그러는 넌?”
“저도 당연히 기쁘죠. 사실 익건이라면 그럴 줄 이미 알고 있었지만요.”
“…….”
대답 대신 물끄러미 앞만 바라보던 발리안이 힐끗, 발도근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많이 힘들겠구나.”
발도근은 말을 타다 낙마하여 한쪽 다리를 다친 상태였다. 때문에, 그가 나서기로 되어 있던 전투에 한참 나이 어린 동생 발익건이 대신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다리가 불편한 발도근을 데리고 바람을 쐬고 오겠다는 발리안 때문에 효령은 오늘 아침 드물게 화를 냈다.
「조금만 참았다 도근이 다리가 나으면 가요. 당신은 아버지가 돼서 왜 이렇게 무심해요? 당신이 가자고 하면 도근이는 무조건 따른단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알아서…….」
그럼에도 발리안은 발도근을 데리고 기어이 황궁을 나섰다. 반 시진 정도 말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많이 불편하진 않습니다. 말을 타는 데도 별 어려움이 없고요.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아버지.”
“도근아.”
발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혹 아직도…… 내가 두려우냐?”
“……예?”
뜻밖의 질문에 발도근이 멈칫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발리안이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 어미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만……. 난 네 어미처럼 순진한 사람이 아니잖느냐?”
“……?”
“멀쩡한 다릴 가지고 다친 척하는 이유가 뭐냐? 왜 이번 전투를 익건이에게 양보했냔 말이다.”
“아, 아버지.”
당황한 발도근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중요한 순간마다 네가 네 어미와 날 속이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느냐? 혼삿말이 나올 때마다 다치고, 앓아눕고. 왜? 네가 내 친아들이 아니라고 널 차별할까 봐서?”
“…….”
“네가 태자가 되었다고 내가 널 미워하여 죽이기라도 할 것 같더냐? 네가 아내를 얻고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그러면 내가 그들을 해치기라도…….”
“아, 아닙니다, 아버지. 절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발도근이 소리쳤다.
“정말……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아버지. 그런 게 아니라…….”
항변하던 발도근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순간, 오래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