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107화 (외전) (107/116)

외전 1화. 흰독수리

* * *

둥둥둥둥둥둥.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치렁치렁 무거운 옷을 입은 천군의 제자 한 사람이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야야 야이야이야.

역시 같은 차림을 한 또 다른 제자가 망자의 앞길을 밝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우중충한 하늘 아래. 대천군이라고도 불리던 기탄 역사상 최고의 천군이 그예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을 떠났다.

「드디어 이곳과도 이별이로구나.」

주름 가득한 얼굴이 자아내는 인자한 미소. 누구도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던 심연과 같은 눈.

스승의 생전 모습을 떠올린 제자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맺혔다.

이미 땅마저 얼어붙은 늦은 가을. 때를 잘못 만난 탓에 스승은 봄이 오기까지 결코 땅에 묻히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좁은 목관에 갇혀서도 천군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였다.

「나는 오늘 천신께 부름을 받았다. 기탄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 내가 필요하시다는구나. 더는 그분을 기다리시게 할 수 없으니 이만 너희들과 헤어져야겠다. 부디, 의좋게 지내거라. 꼭…….」

무언가 남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작별을 고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또렷했던 그녀의 마지막 당부를 떠올린 제자의 노래에 한결 힘이 실렸다.

안녕히 가세요, 스승님. 부디 가시는 길이 편안하시길…….

그 간절한 염원에 반응이라도 하듯 삐이이이익, 어디선가 날카로운 독수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혹한이 시작됨을 알리는 하얀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 * *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기세 사납게 윙윙대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눈발로 사방은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험한 풍파에도 늘 의연하던 돌산조차 그 어깨를 움츠리며 침묵에 잠겼다. 간간이 보이던 들짐승마저 자취를 감춘 어둠 속에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사내보다 커다란 키와 체격. 그러나 그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힘겹게 걸음을 잇고 있었다.

휘이잉.

잔인한 삭풍이 그의 검고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흩어 놓았다. 이미 손발이 얼어붙어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깨에 쌓인 눈이 어느새 돌덩이처럼 굳어 무게를 더했지만, 소년은 무념했다. 이 너른 세상에 그를 기다리는 곳도, 가야 할 곳도 없었다. 그저 살아 있기에 걷는 것뿐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말은 며칠 전 모래 폭풍을 만난 사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터벅터벅…….

위태로이 걷는 소년의 뒤로 길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물과 말린 고기, 모포를 실은 말을 잃어버린 지금. 그가 이 지옥과 같은 사막을 살아서 빠져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터벅터벅, 터벅…….

어느 순간, 소년이 걸음을 멈췄다. 이틀 전 마지막으로 먹은 물과 고기. 그것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 버린 그의 몸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였다.

털썩. 그예 소년이 차가운 눈 위로 쓰러졌다.

하아…….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텅 비어 버린 눈. 이미 절망마저 지나친 그의 시선이 저 멀리 허공을 향했다. 뿌옇게 흩날리는 눈발 너머 시린 겨울 하늘이 보였다.

‘저…… 이게 끝인가 봐요, 어머니.’

그림보다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에 하나둘, 눈송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꽁꽁 언 뺨은 그마저도 느끼지 못했다.

「잊지 마, 리안.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란다. 어머니가 저 하늘의 별이 되어 널 지켜 줄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씩씩하게 살아 줘. 내가 오래도록 널 지켜볼 수 있게…….」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 소년 발리안의 눈에 흐릿하니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께서 자랑스러워하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 모습을 하투 칸께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어머니.’

또르르, 무거워진 눈물이 차가운 뺨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저 기뻐요.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닐 테니까요.’

스르르. 발리안의 눈까풀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머니. 다시 만나면 우리…… 3년 전 그때처럼 같이 춤을 춰요. 그날 햇살처럼 환히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을 꼭 다시 보고 싶어요. 어머니, 많이 그리웠…….’

그의 긴 눈썹이 그예 떨림을 멈췄다. 내내 숨죽이며 이 순간을 기다리던 죽음이 그 몸을 덮쳤다.

무심한 세상은 서둘러 그의 흔적을 덮어 버렸다. 리안이라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찬란하던 소년이 사라진 자리에 눈이 쌓여 만든 작은 동산이 생겼다. 바로 그 순간.

삐이이익.

천지를 뒤흔드는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새하얀 독수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드득.

몇 번이고 그 머리 위를 맴돌던 독수리가 눈으로 뒤덮인 소년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왕자님.』

누군가 축 늘어져 있는 발리안의 몸을 흔들었다.

『……!』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암흑 속을 향하던 발리안의 의식을 붙들었다. 겨우 정신이 돌아온 발리안이 바스스 눈을 떴다. 날카로운, 그러나 인자한 눈을 한 여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왕자님.』

『왕…… 자님? 누구세요, 당신은? 나를…… 아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우린 서로를 잘 안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으니까요.』

『……그,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당신 눈빛은 낯이 익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과 당신은 너무 달라서…….』

『정말 그렇겠군요. 왕자님이 아시는 전 이 모습이 아니겠네요. 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었죠.』

그녀가 발리안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자님의 짐작이 맞습니다. 저는 천군이랍니다. 지난 무림제 때 뵈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전혀 그 천군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발리안은 도무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여인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채 서른 살이 안 되어 보였다.

『당연하지요. 전 지금 천신의 부르심으로 하늘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분께 갈 때 우리는…… 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의 모습으로 변한답니다. 이렇게요.』

발리안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자, 잠깐! 천신께 가는 길이면…… 나도 데려가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안내해 줘요. 네?』

『유감스럽게도 그건 안 되겠습니다.』

발리안의 애원에 그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은 아직 천신께 가실 때가 아니랍니다. 왕자님께서는 꼭 하셔야 할 일이 있거든요.』

『해야…… 할 일……?』

『저기, 저기를 좀 보시겠어요?』

천군이 손을 뻗어 저 멀리 눈 속을 가리켰다. 거기엔 발리안보다 한참 어린 꼬마가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누구예요, 저 아이는? 왜 우는 거죠?』

『저 아이는…… 조금 전 지붕 위를 걷다가 떨어졌어요. 하지만 아파서 우는 건 아니에요. 자존심이 상해서 우는 거지. 다행히 떨어질 때 밑에서 다른 사람이 받았거든요.』

『그런 위험한 짓을 하다니, 정말 맹랑한 꼬마네요. 근데 저 꼬맹이가 나와 무슨 상관이에요?』

『오늘 왕자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시면…… 저 아이가 무척 슬퍼할 거예요.』

『슬퍼해요? 어째서요?』

『저 아이가 왕자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왕자님이 저 아이의 첫 춤 상대가 되실 거니까요. 왕자님이 아니면 저 아이와 춤을 출 사람이 없거든요.』

『마, 말도 안 돼. 난 여자랑 춤 같은 거 안 춰요.』

발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천신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는걸요? 저분이 평생 왕자님의 춤 상대가 될 거라고. 그럼 천신께서 제게 거짓말이라도 하신 걸까요?』

『아, 아니 그게…….』

천군이 난처해하는 발리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분도 왕자님처럼 어머니가 없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와도 떨어져 자라 얼굴도 몰라요. 그런데도 참 씩씩하죠? 하지만…….』

『…….』

『왕자님이 돌아가시면 그땐 저렇게 씩씩할 수 없을 거예요.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마지막 사람이 사라지는 거니까. 그러니까 왕자님.』

천군이 발리안의 두 뺨에 손을 얹었다.

『부디 살아 주세요, 저분을 위해서라도. 저분이 바로…… 어머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왕자님의 ‘운명’이랍니다.』

『뭐라고요, 우, 운……!』

“……!”

순간. 하얗게 얼어 붙어가던 발리안이 퍼뜩 눈을 떴다.

‘운…… 명?’

꿈인지, 환상인지. 눈을 뜬 순간, 모든 게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졌지만 두 가지는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운명’이라는 말과 아직은 결코 천신께 돌아갈 때가 아니라는 것.

“……!”

발리안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난 절대 죽지 않아. 내 운명을 찾을 때까지.’

끄응. 발리안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칠흑 같은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

순간 마치 기적처럼, 저 멀리 하늘 끝에서 가느다랗게 솟아오르는 희미한 연기가 보였다. 이 사막 어딘가에서 누군가 불을 피운 모양이었다.

돼, 됐다. 이제 살았어!

눈을 빛낸 발리안이 꽁꽁 얼어붙은 발을 억지로 떼었다.

“…….”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발리안은 이를 악물고 걸었다. 돌에 걸려 넘어져도, 발이 미끄러져 엎어져도 악착같이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걷고 또 걸었다. 후끈. 몸에서 나는 열기에 어깨 위 눈이 녹아내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터벅터벅.

쥐 죽은 듯 고요한 사막에 무겁고도 외로운, 그러나 의지에 찬 발걸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사이, 새카만 어둠 위로 붉은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새벽노을이 밀려나고 찬란한 여명이 발리안의 뒤를 따라왔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 위에 남은 그의 발자국이 사막에 새 길을 만들었다.

‘……!’

드디어 발리안의 눈앞에 하얀 궁려(활처럼 굽은 반원형의 천막)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의 돌격대라 불리는 발도대에 들어가기 위해 북쪽으로 향하던 떠돌이 사내들이, 느닷없는 폭설을 만난 바람에 다급히 세운 것이었다. 화로에서 피어난 연기가 그 천장을 통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쾅쾅쾅.

발리안은 죽을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덜컹. 그 문이 열린 순간.

히이이잉. 멀리서 익숙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삐이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발리안의 머리 위를 날던 흰독수리가 떠오르는 태양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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