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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06화 (완결) (106/116)

106화. 꽃 피는 봄날 3

* * *

“교기를 삭주 도독으로 삼은 건 정말 뜻밖이었어요. 난 당신이 교염 스승님께 여길 맡길 줄 알았는데…….”

하지만 효령의 그 생각은 빗나갔다. 발리안이 황제에게 연제야를 도울 사람으로 한유와 교염을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댄가?”

“아뇨. 정말 기막힌 생각이었어요. 교기라면 안야국 사람들과 기탄 군사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테니까. 그 이상의 적임자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내 속을 다 알면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걸?”

“당신 속요? 뭐,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발리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효령을 바라보았다.

“당신, 그놈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건 아나?”

“……!”

효령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 알고 있었군. 워낙 말도 없고 티도 안 내는 놈이라 눈치 못 챘을 줄 알았더니.”

“그래서…… 화났어요?”

효령이 슬쩍 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나지 그럼 안 나? 당신 같으면 다른 여자가 나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면 기분이 어떨 것 같나?”

“미안해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네. 그래서…… 나한테서 교기를 떼어 내려고 그런 거예요?”

“겸사겸사……. 안 그랬다간 그놈 혼인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평생 당신 곁에 붙어 있을 테니까.”

“사실은…….”

효령이 시무룩하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나도 알아요, 내가 잘못한 거. 하지만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의지할 사람은 교기밖에 없었어요. 나한테 교기는 친정 오라버니나 다름없는데, 그가 곁에 없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라…….”

“…….”

“그게 두려워서 내내 미루다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나……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교기를 설득하려고 했어요. 교기가 이곳에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물론 당신이 나보다 한발 빨랐지만.”

“…….”

“그래서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알아요? 당신이 나 대신 교기 자리를 찾아줘서……. 교기가 행복해지는 걸 보지 않고는 난 아마 평생 마음의 빚을 덜지 못할 거예요.”

어느새 효령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발리안이 얼른 옷자락을 풀어 펼치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내가 고마우면 여기 누워. 그럼 조금은 화가 풀릴지도 모르니까.”

“겨우 그걸로요?”

흐읍. 눈가를 훔친 효령이 얼른 그의 곁에 누웠다. 발리안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이 진 빚…… 내가 대신 갚을 테니까 앞으로 그놈 생각하지 마. 절대…….”

그가 팔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친정 오라비 노릇까지 다 해줄 테니까 나 말고 그 머릿속에 든 사내란 사내는 모두 지워. 알았어? 시타, 모개, 아굴가, 호독니도 이제부터 살아 있는 돌덩이야. 사람 취급하지 마.”

내내 심각하던 효령에게서 빵, 웃음이 터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어쭈, 반항이야?”

“아뇨. 반항 안 해요. 절대 안 해요.”

효령이 발리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암, 그래야지.”

발리안의 입이 헤벌쭉 휘어졌다.

“그럼 정말 반항을 안 하는지 확인 한번 해볼까?”

“……!”

능글맞은 발리안의 말에 효령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커다란 손이 쓰윽, 옷 속으로 들어왔다.

“당신…… 미쳤어요?”

화들짝 놀란 효령이 그의 손을 밀쳐냈다.

딱지를 맞은 발리안이 입을 대자로 내밀며 툴툴거렸다.

“반항 안 한다며? 그 말한 게 방금 전이야. 사람이 한 입으로 두말하기야?”

“이보세요, 대칸. 여긴 밖이에요. 그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 높은 데 있는 우릴 누가 본다고…….”

“여긴 기탄이 아니에요. 사방이 다 건물이고 지붕이라고요. 다른 지붕 위에 사람이 있을 수도…….”

“내 매의 눈을 걸고 말하는데 지금 사방팔방에 한 놈도 없어. 그러니까 안심하고…….”

탁. 그러나 효령이 다시금 그 손을 쳐냈다.

“그래도 안 돼요. 그러다 기와라도 떨어져 봐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오면…….”

으으. 상상만으로도 낯뜨거워진 효령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건 절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한 번 일을 벌였다 하면 제대로 끝장을 보고 마는 발리안의 성정상, 떨어지는 것은 기왓장 몇 장만이 아닐 터.

이러다 지붕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엔……. 그간 두 사람의 불타는 애정 행각 때문에 부서진 침상 수가 어디 한두 개던가.

오죽하면 다와가 기탄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황궁 목수라고 했을까.

「이걸 구해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이번에 안야국에 오기 전 발리안은 차뉴 칸과 하투 칸에게 황궁을 부탁했다.

시간 약속이라면 칼 같은 하투 칸이 하루 늦기에 이상하다 했더니.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안야국 침상을 선물이라며 가져왔다.

귀신을 쫓는다는 붉은 자단목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게 워낙 단단해서 웬만해선 부서지는 법이 없다 하기에…….」

「……!」

뜨아. 대체 소문이 어느새 거기까지 퍼졌는지. 너무도 민망해서 효령은 차마 시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웬걸? 발리안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아버진 대체 절 뭘로 보시고……. 이거 하나로는 턱도 없습니다. 이왕 선물로 주시려거든 몇 개 더 구해 주십시오.」

하아. 거기 생각이 미친 효령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장공주 체면이 있지. 그 요란하고 부끄러운 꼴을 안야국에서까지 보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붕이라니. 여긴 떨어져도 괜찮을 높이가 아니었다.

“절대 안 돼요!”

효령이 두 손으로 단호히 가슴을 가렸다.

“쳇. 알았어, 알았다고.”

발리안이 홱, 하니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

효령이 자꾸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 입술을 사리물었다.

걸핏하면 질투에, 삐치기나 하는 발리안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건 다 큰 아들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은근슬쩍 발리안에게 달라붙은 효령이 그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화났어요, 당신?”

“말 시키지 마. 나 지금 기분 별로야.”

“당신은 다 좋은데 성격이 너무 급하더라. 그런 말도 몰라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거…….”

발리안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끝까지 듣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건 당신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죠.”

효령이 능청을 부리며 말했다.

“자, 처음부터 다시 말할 테니 잘 들어봐요. 절대 안 돼요…… 여기서는. 그러니까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발리안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며 허리를 끌어안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효령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이거 내가 아무래도 실수했나? 조금 더 뜸을 들일걸…….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어느새 그녀를 안아 든 발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비호처럼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쿵쾅쿵쾅. 낭하(복도)를 울리는 소리에 금세 아굴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대칸, 황후마마.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겁니까? 모개와 시타가 두 분을 찾느라…….”

“아굴가, 우릴 못 본 걸로 해라.”

발리안이 대충 대꾸하며 그 곁을 스쳐 지났다. 영문을 모르는 아굴가가 얼결에 그 뒤를 따라왔다.

“대칸. 지금 어디 가시……?”

이전에 자신이 쓰던 방에 도착한 발리안이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굴가에게 외쳤다.

“친위 대장, 명령이다.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 이 문을 목숨 걸고 사수해라. 한 놈이라도 들여보냈다간…… 알지?”

쾅. 에누리 없이 방문이 닫혔다.

“하…….”

어이가 없어진 아굴가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사람 변하는 거 시간 문제라더니. 여자를 돌 보듯 하던 우리 대장이 어쩌다…….

문득 이전에 모개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아서라, 아굴가. 모처럼 대장에게 봄날이 찾아왔는데 우리가 방해하면 쓰나?」

설마 이게 그때 말하던 대장의 봄이라고? 이 요란하고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고 눈꼴신 상황이?

그러나 곧 아굴가의 입꼬리가 휘어지며 커다란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큭큭…… 하하하하하.”

그래. 우리 대장, 그동안 겨울이 좀 길었냐? 이런 봄이라면 백번 천번 환영이다!

헤벌쭉 이를 드러낸 아굴가가 문 안쪽을 향해 시원스레 고함쳤다.

“알겠습니다, 대칸. 여기 문턱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는 놈은 제가 모조리 다 해치우겠습니다. 그러니 이왕 힘쓰실 거…… 대칸을 닮은 떡두꺼비 같은 황자님으로 한 분 부탁드립니다. 예?”

껄껄댄 그가 두 손을 양 허리에 얹었다.

바윗덩이 같은 아굴가가 낭하 한복판에 버티고 선 가운데, 방 안 공기는 걷잡을 수 없는 정염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몸에 걸친 옷들이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내리고, 늘 같은 자리를 지키던 양털 이불도 저 아래 발치로 밀려났다.

“사랑해. 사랑한다, 효령아.”

“사랑해요, 발리안.”

귓가를 두드리는 사랑의 속삭임. 이마를 마주한 두 사람의 입가에 고운 미소가 걸렸다.

길게 흘러내린 발리안의 머리카락이 효령의 새하얀 피부를 제멋대로 간질였다. 봄을 물고 온다는 제비처럼 그의 입술이 지나는 곳마다 발긋발긋 진분홍 열꽃이 하나 가득 피어났다.

투둑투둑. 잠든 땅을 깨우는 봄비처럼 격렬하고 기운찬 질주에 그 단단하다는 자단목 침상이 제멋대로 삐걱대며 황홀한 단꿈을 노래했다.

어쩌나, 가지 끝에 매달린 어여쁜 꽃

그리움으로 피었네, 붉은 꽃받침

호랑나비 꽃 속 깊은 꿀을 빨 때

세상은 온통 봄빛으로 충만하다

꼬끼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하늘을 가득 채우며 밀려오는 꽃노을 속에서, 효령, 아니 록산과 리안, 빛이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이 움트고 있었다.

앞으로도 세월은 변함없이 흐르고 흘러 몇 번이고 계절이 바뀌겠지만, 때론 모질고 험한 혹한이 닥치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곳은 영원한 봄, 사랑이 만발한 봄의 낙원이었다.

「남쪽으로 가, 리안. 거기서 네 운명을 찾아.」

「그게 내 운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보면 안단다. 나도 그랬으니까. 운명은 그런 거야, 리안.」

『꽃, 바람에 흩날리고』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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