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꽃 피는 봄날 2
* * *
삭주 관사의 식솔들과 군사들이 하나같이 효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삭주 군사의 총책임자는 대도위 호독니, 새로운 삭주 도독은 교기예요. 그리고 모개를 대신하여 그들을 도울 단사관은 요희. 아주 유능한 안야국 여인이죠.”
오오오오오!
군사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
옆에 앉은 대현국 출신 동료가 전해주는 설명을 듣고 있던 교기가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대칸이나 효령에게 전혀 언질을 받지 않은 상태라 정신이 얼떨떨했다.
“뭐, 나? 내, 내가 삭주 도독이라고?”
시타가 툭, 그의 어깨를 쳤다.
“축하한다, 교기야. 드디어 네놈도 출세를 했구나. 쳇, 나보다 승진이 빠른 건 조금 불만이지만.”
그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은 놈과 이렇게 헤어진다 생각하니 왠지 코끝이 찡했다.
“아, 안 된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난 검 쓰는 것밖에는……. 당장 못 한다고 말씀드…….”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는 교기를 두고 시타가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도 낌새가 뻔했다.
“그냥 가만있어, 인마. 이전에 대장…… 아니, 대칸이 나한테 그러셨어. 세상에 처음부터 난 길은 없다고. 날 때부터 잘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배워 가면서 하는 거라고 말이야.”
그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야, 인마. 너 세상에 글도 모르는 관리 본 적 있냐? 그런 내가 대칸을 모시는 단사관이다. 물론 요즘 열심히 글을 배우고 있긴 하지만. 나도 하는데 네놈이 못 할 게 뭐냐? 안 그래?”
시타가 물 만난 고기 마냥 의기양양 훈수를 두었다.
옆에 앉은 대현국 출신 동료가 부지런히 교기에게 그 뜻을 전했다.
“대칸께서 네놈이라면 믿고 맡길 만하다고 하셨어. 그럼 안심하고 떠날 수 있다고. 솔직히 안야국 놈과도 우리 기탄 놈들과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물론…….”
“…….”
“이런 말씀도 하시긴 했지. 교기란 놈은 올곧아서 좋기는 한데 너무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라고. 그래서 그놈이 먹통 같은 소릴 할 때, 옆에 그 머리통을 한 대 쥐어패 줄 놈이 꼭 필요하다고.”
시타가 교기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미인한테 맞으면 머리통이 터져도 기분 좋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딴소리 말고 얼른 가서 인사나 하시지. 다들 기다리잖냐?”
반강제로 떠밀린 교기가 엉거주춤 일어나자 군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저 앞에서 호독니가 교기를 향해 손짓했다. 교기가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갔다. 그의 곁으로 이제껏 어디 있었는지 요희가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 대칸을 대신하여 이곳 삭주를 책임질 대도위 호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우우우우우.
호독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야유인지 환호인지 구분 못 할 애매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독니가 그들을 향해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왜? 내가 대칸 대신이라니까 떫냐? 내 이놈들을 그냥……. 앞으로도 꾀부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이놈들아!”
“아, 장난 장난입니다, 대도위님.”
“뭘 그런 걸 가지고 째째하게…….”
“우리 대장, 아니 대칸은 안 그러셨는데…….”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일부터 고생 좀 해볼래?”
우격다짐에 가까운 호독니의 인사가 끝나고 어색한 표정의 교기가 기탄 말로 입을 열었다. 몇 달을 기탄에서 보낸 덕분에 이젠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가능했다.
“교, 교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
이번에도 야유가 쏟아졌다.
“패기가 부족합니다, 도독.”
“누가 들으면 개미 소리인 줄 알겠습니다. 여긴 안 들립니다.”
“기탄에선 여자 목소리도 그것보단 큽니다.”
곁에 서 있던 요희가 교기에게 속삭였다.
“목소리가 개미만 해서 다들 실망이라는데요?”
으흠. 민망함에 괜한 헛기침을 한 교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 부탁드립니다. 됐습니까?”
“됐습니다!”
“이젠 됐습니다!”
그제야 짓궂은 함성이 되돌아왔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요희 차례가 되자 그녀가 입도 떼기 전에 군사들이 발을 구르며 난리를 떨었다.
하. 그 모습에 발리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만졌고, 효령은 웃음을 터뜨렸다.
요란한 머리 장식과 화려한 옷을 벗은 요희가 이전에 이곳을 거쳐 간 적 있는 성락 장공주라는 걸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희가 유창한 기탄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대도위와 삭주 도독을 모시게 된 단사관 요희입니다. 모개 어른이 전혀 기억나지 않도록 이곳 삭주 관사의 살림을 제대로 꾸려 보겠습니다. 뭐든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단…….”
그녀가 씨익,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내 얼굴에 반해 용건도 없이 집적대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곧장 저승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상 끝!”
“와아!”
“끝내준다!”
“난, 벌써 반해 버렸어!”
“사랑합니다, 단사관님!”
폭풍 같은 반응과 함께 훈련장에는 다시금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야, 한잔 부어 봐라. 이럴 때 술이 빠질 수 없지.”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 안 그러냐?”
“히히. 내가 장가라니. 다시 생각해도 좋아 죽겠다, 인마.”
“넌 친위대 된 것보다 그게 더 좋지, 이 새끼야?”
“그래, 좋아 죽겠다. 어쩔래?”
왁자지껄 요란한 웃음소리가 훈련장 너머까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밤하늘에 별이 많은 날. 안야국의 아름다운 봄이 어느새 저물고 있었다.
* * *
안야국에서의 마지막 날.
발리안과 효령은 사람들을 피해 삭주 관사의 정청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땅거미가 진 어둠 속으로 아련한 삭주의 풍경이 녹아내리듯 스며들고 있었다.
“어때?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그윽한 눈빛을 한 발리안이 효령에게 물었다.
“가슴이 탁 트여서 기분 좋아요. 그동안 너른 초원만 보다 안야국에 오니까 건물이 많아서 조금 갑갑했는데…….”
“당신도 이제 기탄 사람이 다 됐군.”
효령이 예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그러잖아도 이렇게 황궁을 오래 비워도 되나, 싶은 걸 보면…….”
“무슨 걱정이야? 아버지랑 차뉴 칸이 지키고 계신데……. 다와도 있고.”
“그야 그렇지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저 풍경들이나 잘 봐둬. 이제 가면 다시는 못 올 텐데 서운하지 않게. 그러라고 여기 데리고 온 거야.”
“지금에야 하는 말인데……. 나 예전에 명국공부를 떠나 황궁으로 돌아가게 됐을 때, 정말 싫었어요. 내가 태어난 황궁보다 여기가 더 진짜 고향 같았거든요.”
효령이 발리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이젠 여길 떠나는 게 두렵지 않아요. 내겐 당신이 있으니까. 지금부턴 당신이 내 고향이고 내 나라예요.”
그녀가 가만히 발리안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안야국에서의 내 삶을 행복하게 마무리하게 해 줘서……. 근데요, 나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려요.”
“뭔데?”
“안야국 황후마마요. 오라버니와 연제야가 행복해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안심이 되다가도 그분을 생각하면…….”
효령이 어두운 표정으로 발리안에게서 몸을 떼었다.
“남편이 후궁을 들인다니 기분이 상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분 성정이 워낙 거침없어서 말이에요.”
“거침없는 걸로는 연제야도 만만치 않아.”
“알아요. 하지만 연제야와 그분은 달라요. 황후마마는…….”
“훨씬 더 야비하고 교활하다고? 앵속 같이 위험한 것도 쓸 수 있고 말이지?”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아직 연제 가문을 잘 모르는 것 같군.”
발리안이 기와 위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대꾸했다.
“연제야는 여인이지만 사내 못지않게 대범하고 그릇도 커. 겨우 후궁으로 있기엔 아까운 사람이지.”
“…….”
“근데 그걸 구림 칸이나 연제준이라고 모를까? 그들이 왜 먼저 나서서 연제야를 안야국 후궁으로 보내자고 했을 것 같나? 나를 생각해서?”
“연제야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분들은 아니겠죠.”
“맞아, 절대 아니지. 연제준 그놈. 나보다 머리도 외모도 딸리지만, 잔머리 하난 끝내주게 돌아가는 놈이야. 놈은 당신과 연제야를 통해 기탄 황실도 안야국 황실도 모조리 집어삼킬 작정이라고.”
“……네?”
“구림 부족에서 황후가 나왔으니 이미 기탄 황궁은 접수한 셈이고, 남은 건 안야국인데……. 연제준이 연제야에게 붙여준 호위와 궁녀들, 보통 사람이 아냐.”
“보통 사람이 아니라뇨?”
“저 멀리 서역의 것까지 갖가지 독과 의술에 통달한 자, 안야국 말은 물론 고문서와 법률에 정통한 자, 천문과 복서(卜筮, 앞날의 길흉을 맞추는 일)에 능한 자, 심지어 첩자와 자객 출신까지 섞여 있어.”
“네에?”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물론 연제야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게 연제준 그놈이 제 누이를 지키는 방식이야. 무림제 때도 봤잖아? 검독수리가 되고 싶다는 누이의 꿈을 이루어 주겠다고 여기저기 사람 푼 거…….”
“그러고 보니 덕분에 당신을 위기에서 구했죠.”
발리안이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은 좀 잊어 주면 안 되나? 내가 놈의 도움을 받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한데 말이야.”
“알았어요.”
효령이 웃음을 삼키며 얼른 진지한 얼굴을 되찾았다.
“그래서요? 계속해 봐요.”
“오히려 그놈은 안야국 황후가 연제야를 도발하길 기다리고 있을걸? 그때가 연제야를 황후로 만들 절호의 기회니까.”
“…….”
“그럴 계산이 없었다면 애지중지 아끼던 누이가 겨우 후궁 자리로 가겠다는데 그놈이 찬성하고 나섰겠어?”
맙소사. 효령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발리안과의 혼사가 틀어진 연제야가, 더는 기탄엔 원하는 사내가 없으니 안야국으로 시집가겠다고 했을 때, 왜 다들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만했다.
한 번 마음 먹은 건 굽히지 않는 누이의 성격을 잘 아는 연제준이 한술 더 떠 아예 그녀를 안야국 황후로 만들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물론 연제준이 꽂아둔 자들이 섣불리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연제준은 자신이 한 일을 누이가 모르길 바랄 테니까. 우선은 그들로 촘촘한 망을 쳐서 누이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거겠지. 그러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요.”
“맞아.”
“연제야가 황후가 된다면…… 안야국 황실도 조금은 바뀌겠죠? 좋은 쪽으로.”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두 나라는 오래도록 평화로울 테고요.”
“지리적 여건상 언젠가는 두 나라가 각자의 길을 가겠지만…… 적어도 그전까진 그래야지.”
“안야국도 삭주도 내내 평안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한유가 살아가야 할 땅이니까. 내게도 소중한 기억이 많은 곳…… 참……!”
효령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