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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04화 (104/116)

104화. 꽃 피는 봄날 1

* * *

어둠이 내린 삭주 관사의 훈련장 여기저기서 고기를 굽는 불이 피어올랐다.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를 신호로 사방에서 군사들이 몰려나왔다.

“와, 고기다!”

“이거 오랜만에 목구멍에 때 좀 벗겨 보겠구나.”

“야, 다른 놈들이 다 먹어 치우기 전에 얼른 가자, 얼른.”

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불 곁으로 달려갔다.

“아, 배고파. 사람 미치고 환장하겠다.”

이제 막 정청을 빠져나온 시타가 코를 벌름거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뒤따라오던 호독니가 시퉁하니 지청구를 날렸다.

“대칸을 모시는 단사관이란 놈이 품위 없이…….”

“품위는 개뿔. 품위가 밥 먹여 주나? 근데 어쩐 일이에요? 우리 대도위님이 그런 어려운 말도 다 쓸 줄 알고?”

호독니가 시타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야, 이놈아. 대도위쯤 되면 이 정도 교양은…….”

“아얏! 이 사람이! 대도위면 다야? 감히 대칸을 모시는 단사관을 함부로 건드리게?”

시타가 겁도 없이 앙알거렸다.

“건드린 김에 아예 죽여줄까나?”

덥썩. 시타의 뒷덜미를 붙든 호독니가 그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아, 항복! 항복이라니까. 빨랑 놔요. 다른 놈들이 보기 전에……. 그럼 내 체면이 뭐가 돼요?”

“쪼끄만 놈이 하여튼 입만 살아서는…….”

호독니가 툴툴대며 마지못해 시타를 내려놓았다. 그가 놓아주기 무섭게 저쪽으로 쌩하니 달아난 시타가 호독니를 향해 날름 혀를 내밀었다.

“내가 나중에 호독니 부인이 될 마마한테 다 일러줄 거예요. 저 인간 성질 더러우니까 조심하라고.”

“뭐, 뭐야?”

호독니가 다시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뒤에서 몰려온 수하들에게 에워싸였다.

“저희도 소식 들었습니다. 부럽습니다, 대도위님. 이번에 장가를 가신다면서요?”

“맞아. 그것도 상대는 황실의 후궁마마라면서요? 부럽습니다.”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대도위님.”

쏟아지는 탄성에, 어울리지 않게 호독니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그게 그러니까…….”

난처해진 그가 수하들을 밀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이러다 고기 다 탄다. 얼른 가자.”

* * *

맛있는 냄새로 가득한 훈련장에서 술과 고기로 잔치가 벌어졌다.

대칸인 발리안은 물론 황후인 효령까지 군사들 틈에 자유로이 섞여 앉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이었다.

그동안 삭주 관사의 일을 도운 교염과 한유, 명국공부의 가솔들까지 총출동하여 양껏 고기를 뜯고 즐겼다. 이리저리 잔이 돌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저녁 하늘에 널리 울려 퍼졌다.

“아, 더는 못 먹겠다!”

“나도! 이러다 배 터지겠다.”

정말 더는 들어갈 곳이 없을 만큼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 마셨을 때. 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주목해라.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

발리안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수하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지난날이 손에 잡힐 듯 눈앞을 스쳤다.

먹을 것이 부족해 뿌연 강물로 배를 채우던 날들. 한겨울 한파에 좁은 궁려에서 서로의 어깨와 등에 기대 추위를 떨치던 기억, 난생처음 명마를 선물 받고 좋아 날뛰던 수하들의 모습…….

저 속에서부터 왈칵, 뜨거운 것이 치밀어서 진정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한참 만에야 발리안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다들 고생 많았다. 변변찮은 나를 대장이라고…… 힘든 순간에도 불평 없이 따라 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 버려졌다고 생각했을 때…… 너희들이 내 형과 아우, 가족이 되어 주었다. 내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너희 덕분이다.”

“대, 대칸…….”

“대칸.”

발리안이 처음 내보인 진심에, 자리에 앉아 있던 수하들이 울컥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살다 보니, 힘껏 버티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내 늘 말했지. 우리는 하나라고. 삶도 죽음도, 그리고 영광도 다 함께 누리자고. 드디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네놈들은 모를 거다.”

발리안이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너희 모두는 대칸의 친위대다. 기탄의 사내, 그것도 군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영예. 그 자리가 모두 너희 것이다.”

“……!”

군사들이 하나같이 놀라 얼어붙었다.

맙소사, 대칸의 친위대라니!

친위대는 대칸을 지척에서 호위하는 최정예 군사들로, 왕족처럼 그 출신이 좋거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자 중에서 선발되었다. 친위대 아닌 자가 대칸의 처소에 접근했을 시에는 그 즉시 죽음이었다.

친위대는 황실 안전의 전권을 손에 쥔 것은 물론, 조정의 주요 요직도 다 그들 차지였다. 그 녹봉 역시 여느 군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그런 엄청난 명예와 특권 때문에 친위대에 속한 자는 일개 군사라 해도, 다른 부대의 천장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글도 모르고 출신도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신들이 대칸의 친위대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었다.

군사들이 흥분으로 날뛰는 가슴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 발리안이 더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앞으로 너희들은 순번을 정해 교대로 석 달간의 휴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도 대정에 도착하는 즉시 한 사람도 빠짐없이 특별한 녹봉을 지급받는다. 그 녹봉은…… 너희들이 치를 신붓값이다.”

“……예?”

“대, 대칸!”

“대칸!”

발리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친위대’라는 말만으로도 당장 눈물이 날 지경인데 거기 신붓값까지! 도무지 자신들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발리안은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40개의 칙령을 발표했다. 기탄을 낡은 관행과 구습 대신 명문화 된 법으로 운영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첫걸음이었다.

도둑질하지 말라. 간통하지 말라. 위증하지 말라. 모반하지 말라. 전투에 태만한 군사는 태형 또는 사형에 처한다. 노인과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등등.

군사, 사회,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부문을 아우르는 칙령의 내용 중 하나는 바로 약탈혼의 금지였다.

[제38조. 여인을 납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설혹 점령지의 여인이라도 공정한 절차를 밟아 아내로 삼으라.]

이제껏 적이나 점령지에 대한 약탈과 납치, 폭행과 살인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기탄군의 관행을 뒤집는 최초의 칙령이었다.

이것으로 기탄에 복속된 부족의 여인과 그 가족들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발리안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 처첩의 상속에 관해서도 새 조항을 만들었다.

[제39조.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처첩들의 거취를 정한다. 이때, 혼인을 해도 좋고 그들이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도 좋다.]

이제껏 아들은 생모를 제외한 모든 여인을 아내로 거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칙령으로 처첩들은 아들이 아닌 다른 상대와도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이것은 부족의 재산, 권력 유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의 충분한 논의 끝에 결정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칙령의 첫 수혜자는 바로 발리안 본인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발리안은 선대 대칸과 발타고의 후궁들을 찾아가 먼저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 중 나이가 많아 혼인을 거부한 세 사람은 넉넉한 재물을 주어 출신 부족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혼인을 선택한 나머지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아굴가, 호독니를 비롯하여 많은 천장(千長)과 백장(百長)들이 총각 딱지를 떼게 되었다.

여느 혼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위가 높은 후궁들 쪽에서 남편감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저 대, 대칸. 이번에 천장과 백장들만 장가를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정말 저희들도 장가를 갈 수 있습니까?”

군사들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발리안이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내 언젠가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희들 모두를 장가보내 주겠다고. 신혼살림을 꾸릴 궁려도 내가 마련해 주마.”

“저, 대칸.”

한 군사가 주저하며 손을 들었다.

“근데 아내는 어디에서 구합니까? 전 돌아갈 고향도, 속한 부족도 없는데……. 저 같은 다른 나라 출신들은 신부 구하기가 마땅치 않아서…….”

“걱정하지 마라. 그런 자들은 절도 부족을 찾아가라. 너희들을 혼기가 찬 여인들에게 안내해 줄 것이다.”

발리안은, 절도 칸이 칸의 지위에서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그의 목숨을 보전해 주었다. 이미 지난겨울 그의 아들이 새 칸으로 등극한 상태였다.

「언젠가 제가 절도 부족에게 도움을 구하는 날이 오면…… 그땐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 맹세에 따라 절도 부족은 발리안의 수하들이 아내를 구하는 일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새로이 절도 부족을 맡게 된 젊은 칸은 다행히 선대 절도 칸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부족의 전멸을 막아 준 발리안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충성을 다짐했다.

“감사합니다, 대칸!”

“정말 감사합니다!”

“야, 드디어 우리도 장가를 가는 거냐?”

“그, 그러게. 내가 장가를 가다니.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가 보면 놀라 기절하겠다.”

“망나니로 떠돌던 내가 대칸의 친위대가 된 걸 알면 우리 부족에서 난리가 날걸?”

“친위대가 되고 장가도 가고. 우리 완전히 팔자 폈다. 안 그러냐?”

군사들이 감격하여 눈물 콧물을 훔치며 난리였다.

“또 너희들에게 일러둘 게 있다. 그건 당신이 하지.”

발리안이 곁에 있던 효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럴까요?”

씽긋 웃은 효령이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군사들을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삭주는 새로운 사람이 다스리게 될 거예요. 삭주는 대칸의 명령을 받는 기탄의 영토지만 앞으로 9년 후에는 안야국에 돌려지게 될 곳이죠. 때문에……”

“…….”

“그 주된 통치 방식은 안야국의 행정, 정치 제도에 맞춰질 거예요. 기탄 군사들이 모두 철수하고 난 후에도 타격이 없도록 말이에요.”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난 이곳 삭주를 통해 안야국 사람들에게도 기탄의 좋은 제도와 전통을 알려 주고 싶어요. 해서…….”

“…….”

“기탄의 명절인 흰 달(음력 설)과 무림제가 열리는 가을의 첫날. 삭주 관사에서는 이를 알리는 기를 달고 가난한 백성들과 노인들에게 음식을 베풀도록 하겠어요. 또한 이곳 삭주는…….”

효령의 눈이 별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안야국 최초로 여성 관리를 두게 될 거예요.”

효령이 보기에 기탄은 단순한 야만족의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남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은 아비나 형제의 아내를 거두는 것으로 여인들의 미래를 담보했다.

또한 황궁에는 궁녀 외에도 수많은 여관들이 행정 및 회계 업무를 담당하며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가정 내에서도 남편과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며, 사랑을 표현하는 데도 쟁취하는 일에도 적극적인 여인들.

안야국에도 그런 당당한 여인들로 가득한 날이 속히 오는 것이 효령의 바람이었다.

“아시다시피 명국공 설한유와 교염 공은 곧 황궁으로 올라가게 될 거예요. 친위 대장 아굴가와 대단사관 모개도 이곳을 떠날 거고요. 그들을 대신하여 이곳 삭주를 다스릴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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