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마지막 사냥 3
* * *
여희가 싸늘히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죠?”
“그만 일어나요. 대칸께서 찾으십니다.”
“대, 대칸이라니……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여희 처자? 설마 대, 대칸이라면 바로 그, 그…….”
화통하니 잘만 떠들던 징이 어멈이 너무도 놀라 말을 더듬었다.
“저, 정말 그 대칸 맞아, 여희 처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옆에 있던 아낙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탁. 여희가 벌떡 자리를 떨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대칸께서 사람을 착각하셨나 봐요. 아주머니, 저 잠깐 다녀올게요.”
“그, 그래. 기다리고 있을 게 빨랑 와.”
“이게 뭔 일이래? 내 가슴이 다 벌렁거리네.”
걱정스러워하는 아낙들을 뒤로한 채 여희가 사내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이내 숙소 앞마당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의 시야를 벗어나도록 내내 침묵하던 여희가 한적한 길에 들어서자 처음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러고 보니 얼굴만 몇 번 봤지 이름을 몰라서…….”
“교기입니다.”
“교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죠?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교기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 대칸의 행렬이 지나갈 때 구경 갔었죠?”
“그런데요, 그게 왜……?”
“대칸께서 보셨습니다, 그쪽을.”
교기의 말에 여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 봤다고요? 그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난 행렬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고요.”
“원래 예사 분이 아니잖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답에 여희, 아니 요희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맞네요. 내가 그걸 깜빡했네. 근데…….”
그녀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다. 산 아래에 다 다다르도록 자신을 기다리는 군사들은커녕 평소 흔하던 산새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다른 군사들은 어디 있죠? 설마…… 혼자 날 데리러 온 거예요? 그러다 내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달아나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대칸께서.”
요희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징글징글하네. 맞아요. 달아날 생각 같은 거 없어요. 어쩌면 나…….”
나……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스스로 다른 곳도 아닌 이곳 삭주에 기어든 걸 보면…….
그녀가 마음의 소리를 감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발리안, 아니 그분이 대칸이 되었다는 건…… 발타고 태자가 죽었다는 뜻이죠?”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아뇨, 그냥……. 그냥 확실히 해 두고 싶었어요.”
홀로 중얼거리듯 답한 그녀는 그 이후로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잠잠히 교기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형부 상서에 대해서는 안 물어봅니까?”
오히려 이번에는 교기가 나서 물었다.
“보나 마나 죽었겠죠. 뒤끝도 안 좋았을 테고. 이상하죠? 그쪽은 별로 안 궁금하더라고요. 딱히 생각도 안 나고.”
“……언제부터 여기 있었습니까?”
훗. 요희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상한 질문이네. 그게 왜 궁금한데요?”
“그냥 묻는 겁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단순한 호기심이라……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고요? 글쎄요. 안야국에 도착하고 나서 한 달 후쯤부터?”
“…….”
“어렵게 돌아왔더니 형부 상서가 당장 기탄에 가 효령 장공주님을 데려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 그러겠다고 대꾸만 하고는 곧장 이곳으로 와 버렸죠.”
“그런데 말입니다…….”
교기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왜 하필 이곳이었습니까?”
“……!”
순간, 정곡을 찔린 요희가 어깨를 움찔했다. 혹 속을 들킬세라, 그녀가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그, 그쪽……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네요. 나 같은 무시무시한 계집에게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요? 아! 이런 지독한 계집은 처음이라 그런 건가? 신기해서?”
“그럼 안 됩니까?”
하…….
뭐가 문제냐는 듯한 교기의 태도에 요희가 벙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염치를 모르는 뻔뻔한 인간이라면 교기는 꽤 둔감한 쪽인 모양이었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요? 이봐요!”
“놀리는 거 아닌데……. 정말 당신처럼 무시무시한 여인은 처음이라서 그러는 겁니다.”
너무도 진지하게 돌아오는 반응에 요희는 그만 맥이 빠졌다.
“관둬요. 더는 당신과 말씨름하기 싫으니까.”
“왜 여기로 왔는지 정말 말 안 해 줄 겁니까?”
“싫다잖아요.”
팩하니 쏘아붙인 요희가 교기를 스쳐 앞서 걸었다.
“…….”
교기 역시 더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 * *
“…….”
“…….”
탁자를 가운데 두고 오랜만에 두 사람이 마주했다.
한 사람은 의자에 앉은 채, 다른 하나는 그냥 선 채였다. 알 수 없는 표정의 두 사람 사이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부딪히는 시선만은 꽤 날카롭고 뜨거웠다.
요희도 상대도 서로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더는 그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요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요? 이 꼴을 보니 속이 시원한가요? 죽일 거면 당장 죽여요. 더는 사람 비참하게 하지 말고…….”
“……겨우 이 정도로 비참해요? 전혀 당신답지 않은 대답인데요?”
상대가 한참 만에야 냉랭하게 대꾸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비참해요? 거칠어진 손? 흐트러진 머리? 아니면 평범한 옷?”
상대가 비웃듯 말을 이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도 아닌 것 같고, 딱히 나빠 보이는 곳도 없는데. 대체 뭐가 비참하다는 거죠? 역시 당신과 난…… 사는 세상이 너무 다르네요.”
요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잘난 체하지 마세요, 황후마마. 내가 당신 속마음을 말해 볼까요? 지금 고소해 죽겠죠? 당신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게 기분 좋아 죽겠잖아요? 안 그래요?”
“내 솔직한 대답이 듣고 싶어요?”
효령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아요.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 삭주에 있는지 알아 버려서……. 그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좋았겠죠.”
“뭐,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당신 미모와 실력이면…… 누구 곁이든 그럴듯한 자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이 험한 곳에 와 광산 일꾼들의 밥을 짓고 있는 거죠?”
“남이야 무슨 일을 하든…… 그게 황후마마와 무슨 상관…….”
“왜 없어요? 당신이 이러는 거…… 다 내가 한 말 때문이잖아요.”
심중을 들킨 요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차, 착각하지 말아요. 누가 그깟 말 따위…….”
요희가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늘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효령의 말들이 다시금 비수가 되어 귓가에 꽂혔다.
「형부 상서가 당신의 모든 걸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요? 당신이 그를 생각하듯 그도 당신을 생각해 주나요?」
「형부 상서 같은 사내를 위해 당신 인생을 바치는 거……. 그래도 좋을 만큼 당신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가요?」
「그런 사내 밑에서 당신이…… 안야국이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세상엔 당신만을 아껴줄 좋은 사람이…….」
더는 어떤 말도 듣기 싫은 요희가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그 입 닥쳐요. 다 필요 없어. 얼른 죽여. 날 죽이라고.”
그러나 효령도 지지 않았다.
“내가 왜 당신을 죽여요? 누구 좋으라고. 이제야 당신도 겨우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당신도 겨우 아파하기 시작했는데…….”
“…….”
“고작 그 정도로 엄살떨지 말아요.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한 짓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발끈한 요희가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가 여기 있은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어. 만약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 그래서 날 죽여줄 테니까. 날 너무나 증오하고 미워해서 내가 죗값을 치르도록 도와줄 테니까.”
“…….”
“내 주제에 양심도 없이 아무 데나 버려진 시체가 되고 싶진 않았어. 죽어서까지 떨거지 대접을 받기는 싫었다고. 착해 빠진 당신이라면 적어도 날 무덤에는 묻어줄 테지. 그래서…….”
효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끝까지 어리석네요, 당신. 기껏 먹었다는 마음이 겨우 남의 손에 죽는 거였어? 왜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이야?”
효령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난 당신 절대 안 죽여. 말했잖아. 누구 좋으라고 당신을 죽여? 살아, 끝까지. 더럽고 치사해도 참고, 세상 돌아가는 꼴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어도 참아. 왜냐면…….”
“…….”
“다들 그런데도 살아가니까. 남편이 죽었어도,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었어도, 집을 잃고 땅을 잃고 모든 걸 잃었어도……. 그런데도 어떻게든 살아가니까.”
“…….”
“당신은 억울하지도 않아? 맹유천 밑에서 고작 그렇게밖에 못 산 당신 인생이 가엽지도 않냐고? 함부로 산 게 미안하면, 눈곱만큼이라도 내게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 그럼…… 더 악착같이 살아. 그래서…….”
효령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제대로 속죄해. 그러고 나면……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틀림없이 좋은 날이 올 거야, 반드시…….”
“…….”
그예 요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않으려 애써 이를 악다물수록 이상하게 더 눈물이 났다.
결국 울음을 참다못한 요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에게서 마치 짐승 같은 통곡이 새어 나왔다.
효령은 섣불리 그녀를 위로하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효령은, 오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로 몸부림치는 요희를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요희의 기나긴 눈물이 마르기까지 효령은 내내 그녀의 옆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