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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02화 (102/116)

102화. 마지막 사냥 2

* * *

발리안이 쯧쯧, 혀를 찼다.

“정말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자로군. 연회 도중 우릴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발리안이 맹유천의 낌새가 이상하다고 말했을 때, 효령은 아무도 그 정확한 존재를 모르는 태후와 맹유천의 비밀 조직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녀 자신도, 스승인 교염도 그들에게 쫓긴 적이 있다면서. 덕분에 발리안과 황제는 그에 대해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다.

맹유천은 모르고 있었지만, 첫 번째 연회 날 이후 그는 줄곧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와 관련이 있는 자들까지 모두.

어젯밤, 자객들과 접촉하고 돌아오던 맹유천의 수하는 지금 황궁 안 옥사에 갇혀 있었다.

“형부 상서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생각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간 큰 짓을 벌이다니…….”

“주인이나 수하나 야심은 큰데 머리는 모자란 모양이오. 황제나 나의 호위가 그렇게 허술하다면 한 번쯤 의심해 볼 만도 하건만.”

“워낙 다급해서 그런 게지요. 황궁 안에 형부 상서에게 이를 갈고 있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 게다가 우리가 동맹을 맺었으니 그간 그가 대칸과 효령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고요.”

발리안이 황제에게 물었다.

“그래서…… 맹유천 그자는 어찌 처리할 생각이오?”

“당연히 반역죄로 다스려야지요. 하지만 워낙 지은 죄과가 많아 참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게 가장 합당한 벌일지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대칸, 잠시 출발을 늦추고 그자의 처분을 보고 가시는 것이…….”

“아니. 황제께서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겠소. 난 삭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이 있어 예정대로 출발할까 하오.”

“그렇다면야…… 아쉽지만 말리지 않겠습니다.”

발리안이 황제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마지막 일까지 무사히 마쳤으니 방해꾼은 이만 사라지지요. 깊은 밤, 결례가 많았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발리안이 성큼성큼 방을 걸어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황제가 연제야의 손을 붙들었다.

“우리도 나갑시다, 영비.”

“예? 어디로 말입니까?”

“내 처소. 더러운 자들의 피 냄새가 가득한 곳에 한시도 그대를 두고 싶지 않소. 갑시다, 영비. 아까는 그대가 날 지켰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은 내가 그대를 지킬 것이오.”

“폐하.”

행복한 미소를 지은 연제야가 발을 들어 황제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일순 당황했던 황제가 이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진한 사랑의 탄성이 이어지기를 꽤 오래.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침내 방을 나섰다.

* * *

왁자지껄. 야트막한 산길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떠는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그들은, 삭주로 들어오는 기탄의 대칸과 황후의 행렬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광산 일꾼들이었다. 모처럼의 구경거리에 다들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칸과 황후의 행차를 기념하여 삭주의 모든 일터가 오늘부터 삼 일간 휴무에 들어갔다. 거기다 대칸과 황후가 광산 일꾼들에게 특별히 잔치 음식까지 내린다니, 다들 신이 날 만했다.

“세상에나. 우리 대장이 기탄의 대칸이 되시다니. 믿을 수가 없네.”

한 여인이 바삐 걸음을 옮기다 말고 혀를 내둘렀다. 그 옆에 선 아낙이 그녀에게 핀잔을 놓았다.

“징이 어멈. 언제는 야만족은 다 때려죽일 원수라더니……. 언제부터 그분이 ‘우리 대장’이 되셨나?”

징이 어멈이라 불린 여인이 기죽지 않고 목청 좋게 대답했다.

“이 여편네 보게. 내가 언제 그런 천벌 받을 소릴 했다고. 우리 같은 천것한텐 등 따숩고 배부르게 해 주는 사람이 상전이고 나라님 아닌가? 나한테는 우리 대칸 이상 가는 상전이 없구먼.”

그들의 대화 틈으로 다른 여인들도 끼어들었다.

“맞아, 맞아. 적어도 여기선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 않나?”

“굶어 죽는 게 다 뭐야? 삭주에 와서 팔자 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나 아는 사람은 다섯 식구가 똘똘 뭉쳐서 벌써 집 두 채 값은 모았다는구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나한테는 여기가 하늘나라로구먼. 세금이랍시고 있는 돈, 없는 돈 죄 쓸어 가는 아전 놈들이 없으니 살 것 같다니까.”

“하긴, 나도 뜯기는 게 없으니 돈이 좀 모이긴 하데. 그러니 다들 삭주에 못 와 그 난리지. 아무튼 우린 운이 좋았다니까.”

“운 좋은 거야, 여기 여희 처자가 최고지. 여희 처자가 들어오고 나서 더는 피난민들을 안 받았잖나? 너도나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건 그렇네.”

“그나저나 여희 처자는 우리 대칸 처음 보지? 어때, 징글징글하게 잘생겼지?”

징이 어멈의 넉살에 여희라 불린 아가씨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그렇네요.”

“그나저나 아까 보니까 황후마마랑 대칸이랑 어쩜 그리 잘 어울리시는지. 천생연분이 따로 없대.”

“그러게. 황후마마, 우리 안야국 장공주님이라고 하셨지? 돌아가신 명국공의 질녀시라며?”

“아, 그렇다지 뭐야. 두 분 보니까 내 배가 다 부르네. 앞으로 우린 염려 없겠어. 대칸과 황후마마께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누가 감히 삭주를 건드리겠어? 안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맞아.”

여인들이 왁자하니 떠드는 사이. 그 옆쪽에서는 사내들이 자못 심각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자네들, 그 소식 들었나? 아까 들어온 상단 사람들이 그러는데 황궁에 계신 태후마마 목숨이 깔딱깔딱한 것이 오늘내일하신다는구먼.”

“흥, 그런 불여우를 두고 태후마마는 무슨? 그간 그 손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한둘인가? 그런 꼴을 당해도 싸지, 싸.”

“나도 동감일세. 우리가 왜 멀쩡한 고향을 놔두고 여기 와 이러고 있는데? 이게 다 그 망할 태후와 추씨 놈들 때문 아닌가? 제발 쉽게 죽지 말고 두고두고 고생 좀 했으면 좋겠구먼.”

“그래도 곧 살 만한 세상이 올 모양일세. 태후 밑에서 붙어먹던 놈들이 죄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니 말이야. 왜, 있잖나. 맹유천인가 맹물탕인가 하는 놈…….”

“형부 상서란 놈 말이지? 충신이란 충신은 죄 죽이고 다녔다는 그 미친놈?”

“그놈이 어떻게 됐는데?”

다른 사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아, 그놈이 하다 하다 이번엔 황제 폐하까지 죽이려고 들었다지 뭔가? 그러다 들켜서는…….”

“아니, 그런 때려잡을 놈이 다 있나? 황궁에서 그나마 사람 같은 건 딱 황제 폐하 한 분뿐이구먼. 그래서?”

“그래서는 뭐? 끌려가는 놈을 향해 백성들이 죄 나서서 돌을 던졌다는데……. 결국 황궁 문턱도 넘어보기 전에 사지가 찢어지고 터져서 죽었다지 뭔가? 그러고도 백성들이 분이 안 풀려서…….”

“…… 안 풀려서?”

“그 시체를 하도 밟아대는 바람에 나중엔 형체도 못 알아봤다 하네.”

“에라, 그 썩을 놈. 잘 뒈졌다. 퉤.”

사내들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한편에서도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이번에 우리 명국공께서 황궁에 드시게 되었다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명국공은 아버지 설용한으로부터 작위를 이어받은 한유였다.

“황제 폐하께서 새로 들이신 후궁마마를 보필하라고 궁으로 불러들이셨다더라고, 교염 나리랑 함께. 며칠 있으면 한경으로 출발하실 모양일세.”

한유는 기탄 말도 할 줄 아는 데다 효령의 친척이기에 연제야의 측근으로 삼기에는 제격이었다.

게다가 충신으로 명성 높은 아버지를 둔 그라면 황궁의 인심을 모으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

한유를 곁에 둔다면 연제야는 그야말로 날개를 얻는 셈이었다.

“에휴. 돌아가신 명국공께서 그렇게 나라를 위하시더니. 드디어 보답을 받는가 보네그려.”

“근데 난 어째 좀 서운한데? 삭주에 오래오래 같이 계시면 좋으련만.”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닐세.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게야. 여기야 언제든 다시 돌아오실 수 있지 않나?”

“에고. 그럼 서운해도 참아야지. 그간 우리 피난민들에게 그렇게 아낌없이 퍼주셨는데 부디 앞으로 더욱 잘되셨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이게 무슨 냄샌가?”

숙소가 가까워지자 맛있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아이고야. 대칸께서 음식을 내린다고 하셨다더니, 그 냄새인 모양일세. 우리 빨리 가세. 좋은 자리 잡으려면 서둘러야 해.”

“술도 있으려나?”

“당연하지. 기탄 사람들이 술고랜 거 아직도 모르나? 제일 먼저 술 부대부터 날라다 놨을걸?”

“흐읍. 거 벌써부터 입맛이 도네. 어서 가세나, 어서.”

와르르. 사람들이 앞다투어 뛰기 시작했다.

“어머나, 저 인간들 좀 보게. 이러다 우리 먹을 게 남아나질 않겠네. 얼른 뛰어, 여희 처자.”

“아주머니도 참.”

뒤처진 아낙들과 여희가 팔을 걷어붙이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숙소 앞마당은 완전히 잔치판이었다. 너른 멍석이 깔린 자리마다 한 그득 고기며 탕, 밀을 가루 내어 기름에 넓게 부친 떡 하며. 빈틈없이 음식들로 가득했다.

“안주가 좋으니 술이 수리술술 잘 넘어가네.”

“자네만 처먹지 말고 나도 한 잔 주게.”

“꺼억. 거, 목구멍이 다 시원하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사내들은 이미 술타령이 한창이었다.

“여희 처자 얼른 이리 와 앉아.”

많은 사람 틈에 엉덩이를 밀어 넣어 자리를 확보한 징이 어멈이 여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억지로 앉힌 징이 어멈이 따끈한 떡을 건넸다.

“이거 받아. 어이, 자네도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여인들이 정답게 서로 음식을 권했다.

“아이고. 이게 얼마만의 잔치 음식이야. 오늘 내 배 속이 놀라 뒤집어지겠네.”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 대칸이랑 황후마마. 두고두고 복 받으실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깔깔깔깔깔. 여인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는 찰나, 그들 앞에 낯선 사내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얼굴이며 옷차림이 말끔하고 단정한 것이 한눈에 보아도 여기 광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에구머니나. 이 잘생긴 나리는 누구시래?”

방금 막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은 징이 어멈이 고개를 갸웃했다.

“재미있게 말씀 나누는 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나 누군지 알죠?”

사내가 여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

순간, 내내 유순하던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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