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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01화 (101/116)

101화. 마지막 사냥 1

* * *

사뿐.

이전에 효령이 사용하던 장공주궁의 마당으로 내려앉은 자객들이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오늘 이곳에는 기탄의 대칸과 그 황후인 효령이 머물고 있었다. 효령이 이전에 어디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궁금해하는 발리안을 위한 황제의 특별 배려였다.

아까 지붕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호위들은 담 하나를 넘어선 바깥쪽에서 모두 꾸덕꾸덕 졸고 있었다. 그간 쉴 틈 없이 빡빡하게 진행된 일정에 다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대칸의 호위란 놈들이 술에 취해 저 지경이라니.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나겠군.’

입에 비소를 건 자객이 소리를 죽이며 궁 안으로 들어갔다. 열 명이 망을 보기 위해 밖에 남고 남은 자객들이 그 뒤를 따랐다.

“……!”

이미 밤이 깊은 시각임에도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자객들이 걸음을 멈췄다.

“이봐. 벌써 잠들면 어떡하나? 아직 제대로 몸도 못 풀었는데…….”

“으으.”

“뭐? 갑갑하니까 나더러 그걸 벗겨 달라고? 어허, 그 잠깐을 못 참고 앙탈은…….”

“…….”

“하, 이러면 안 되는데……. 별수 없지. 그렇게까지 간절히 원한다면야 벗겨 주는 수밖에…….”

안에서 이어지는 낯뜨거운 대화에 복면 속 자객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 저승이 코앞인 것도 모르고 하고 있는 짓거리라니. 벌거벗은 것들을 죽이는 건 그들에겐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베었을 때 피가 많이 튀어 주변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이 지엄하니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자!

우두머리의 수신호에 자객들이 왈칵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순간. 그들은 머리통이라도 두들겨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방안엔 발리안이 효령 대신, 덩치가 산만 한 사내와 둘이 앉아 있었다. 마침 발리안이 지금 막 사내의 입에 묶여 있던 재갈을 풀어 주던 참이었다.

“뭘 그리 놀라나? 무얼 기대했기에?”

발리안이 자객을 보고 놀라기는커녕 시퉁하게 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래 참았다, 아굴가. 이제 마음껏 떠들어도 된다.”

“하. 죽다 살았네. 내 시타 이 자식을 그냥……!”

「다들 대칸이 황후마마랑 같이 계신 줄 알 텐데 아굴가 목소리가 들려봐요. 그럼 의심할 거 아냐. 만약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니까요. 아굴가는 대칸이랑만 있으면 수다쟁이가 되잖아요.」

시타를 떠올린 아굴가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러고는 자객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왜 이렇게 늦게 와? 덕분에 숨 막혀 죽을 뻔했잖냐? 근데 뭐야?”

아굴가 고개를 빼고 자객들의 뒤를 살폈다.

“하나, 둘…… 열다섯? 이놈들이 장난하나? 감히 우리 대칸을 죽이러 오면서 고작 열다섯이라니. 백 명, 천 명이 와도 시원찮을 것들이.”

그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엄청나게 큰 칼을 집어 들었다.

“기분도 더럽던 차에 잘됐다. 하나씩 덤비지 말고 떼로 덤벼라.”

그의 뒤를 이어 발리안도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놈들의 수가 생각보다 적은 걸 보니 여기에만 온 건 아닌 것 같군. 난 다른 쪽을 살피러 가야겠으니 길을 열어라, 아굴가.”

“예, 대칸.”

자객의 것보다 배 이상 커다란 무시무시한 칼을 든 아굴가가 순식간에 눈앞의 놈을 걷어냈다. 그 큰 덩치의 몸놀림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빠르고 정확했다.

휘익. 잠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안야국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자객의 우두머리가 찍소리 한번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쿵.

털썩.

연이어 추풍에 낙엽이 지듯 자객들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덕분에 발리안은 처음 발을 떼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처소를 빠져나갔다.

* * *

“……!”

잠결에 뒤척이던 황제가 옆자리가 빈 것을 깨닫고는 퍼뜩 눈을 떴다. 그의 눈이 당황하여 어둠 속을 더듬었다.

“……!”

그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던 연제야는 어쩐 일인지 옷을 입은 채 침상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영비……!”

쉿! 황제의 부름에 연제야가 뒤를 돌아보며 둘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다른 한 손은 지붕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자객……?

상황이 급박함을 깨달은 황제가 얼른 일어나 겉옷을 주워 걸쳤다. 그사이, 둔탁한 소리가 몇 차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낭하를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까워지자 연제야가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쾅. 문이 열리고 복면을 쓴 자객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들이냐?”

연제야는 당황하기는커녕 겁도 없이 놈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객 중 선두에 선 자가 말했다.

“황제에게 볼 일이 있어 왔으니, 조금이라도 목숨을 길게 부지하고 싶거든 비켜라.”

비소를 지은 연제야가 검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날 죽이지 않고서는 폐하께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다.”

“그러지 마시오, 영비.”

황제가 침상에서 일어섰다.

“내가 그쪽으로 가마. 너희들이 노리는 건 내가 아니냐? 그러니 그녀는 놓아 주…….”

“폐하.”

연제야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소리쳤다.

“부디 절 믿고 거기 그대로 계십시오. 폐하는 반드시……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비록 완벽하지 않은 안야국 말이었지만 그 뜻만은 황제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

“아, 알았소…….”

황제가 그녀의 말처럼 멈춰선 사이, 연제야가 자객들에게 호통을 쳤다.

“뭣들 하느냐? 물러갈 생각이 없다면 어서 덤비지 않고!”

“별수 없군. 한꺼번에 해치우는 수밖에…….”

자객들이 그녀를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챙챙. 조용하던 방안이 순식간에 금속성의 굉음으로 가득 찼다. 어둠 속에서 은빛 검날이 부딪치며 수도 없는 불꽃이 튀었다.

“영비…….”

가슴을 졸이며 그들을 지켜보던 황제의 눈이 점점 커졌다.

연제야는 도전적인 눈빛에 당찬 구석이 있긴 해도 겉모습만 보자면 천생 여자였다. 날씬하고 중간 정도의 키에 군살이라고는 없는 탄탄한 몸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황제의 눈앞에서 황궁 호위 못지않은 실력으로 자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지난밤, 좋은 꿈 꾸셨소?」

바로 며칠 전. 공식 일정으로 다시 만난 발리안이 연제야와 첫날밤을 치른 황제에게 물었다.

「그게…….」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면서 황제가 마치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럴 만도 했다. 이제껏 황제에게 여인이라고는 태후 때문에 억지로 맞아들인 황후뿐이었다.

강한 권력욕 하며 질투심 하며. 황후는 판박이라 해도 좋을 만큼 태후와 똑 닮았다. 재상인 그 아비와 함께 뇌물을 받아 챙기는 것은 물론, 황제와 말이라도 나눈 궁녀는 내쫓거나 엄벌에 처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부부 사이가 원만할 리 없었다. 황제가 황후의 처소에 드는 것은 더는 태후의 채근을 견딜 수 없을 때뿐이었다. 황제는 그간 자식 타령을 해대는 태후와 황후 틈에 끼어 거의 죽을 맛이었다.

「꿈을 꿀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음 편히 잠든 밤이 처음이라서…….」

황제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에게 연제야는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요란하고 화려한 안야국 황궁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과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 총명한 머리와 대범한 성격. 이국적 용모에서 풍기는 신선한 매력과 아름다움.

처음 입을 맞추었을 때, 파르르 떠는가 싶더니 이내 서툰 솜씨로 되돌려주는 당돌함에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녀가 너무도 마음에 든 황제는 연제야에게 오래도록 영화를 누리라는 의미로 ‘영비(榮妃)’라는 봉호를 내렸다.

「황제께서 마음에 들어 하니 정말 다행이오.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기 민망하지만, 연제야는 여느 여인들과는 다르오. 그녀는 누구보다 든든한 황제의 오른팔이 될 것이오.」

오늘에야 황제는 발리안이 말한 참뜻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렇구나. 정말 대단하구려, 영비.’

황제가 감탄하는 사이, 연제야는 이미 세 명의 자객을 쓰러뜨렸다.

잠자리에 들면서 길게 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싸우는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황제는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그만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

생각보다 상대가 만만치 않자 자객들이 당황했다.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망을 보라고 밖에 세워 두었던 일행에게 탈이 생겼음을 직감한 자객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막다른 길에 몰린 그들이 사생결단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에 그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아, 안 되겠다, 일단 철수…….”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연제야가 기탄에서 데려온 호위들과 황제의 호위들이 동시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곧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내 수적으로 열세인 자객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으윽…….

윽!

아악!

하나둘, 그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그 틈에 재빨리 영비 곁으로 다가온 황제가 그녀의 손을 붙들고 뒤로 물러났다.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영비?”

황제가 연제야의 두 뺨을 감싸며 물었다.

“전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그녀가 황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호위들이 시신을 끌어내는 동안, 호위대장이 황제와 연제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밖의 놈들을 처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폐하, 영비마마.”

“괜찮다. 나도 영비도 무사하니. 그래, 놈들의 정체는? 짐작대로더냐?”

“예. 시신의 어깨에 달 모양 문신이 있는 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형부 상서의 비밀 조직이 분명합니다. 그 연락책은 이미 옥사에 갇혔고, 지금쯤이면 황궁의 금군들이 형부 상서의 집을 에워쌌을 겁니다.”

“잘했다.”

황제가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들어도 되겠소?”

발리안이었다.

“예. 드시지요.”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역시, 말씀처럼 맹유천이 기어이 일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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