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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100화 (100/116)

100화. 뜻밖의 손님 3

* * *

겨우내 떨어져 있는 동안 발리안은 완전히 굶주린 짐승이 되어 있었다.

봄이 되어 혼례를 치르고 맞이한 첫날 밤.

「…….」

「대, 대칸?」

효령은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발리안의 눈빛에 두려움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뒤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격정과 환락의 시간이었다.

「시집도 안 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일엔 기탄 사내들을 따를 자가 없어요. 그 허벅지만 봐도 알잖아요. 더구나 상대가 대칸이라니…… 진심으로 애도를 표해요, 언니.」

절 보며 짓궂게 웃던 연제야의 말은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천지가 뒤집어지고 눈앞이 빙빙 돌다 기절하는 경험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런 사람이 파음에서의 초야엔 어쩜 그렇게 부드럽게 굴었는지.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구림 부족의 왕궁에 있는 동안, 연제준과 연제야가 지구력과 근력을 기르는 데 좋다며 하루도 빠짐없이 보양식을 먹인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효령은,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7일 동안 시간이 어찌 가는지,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방을 치른 신랑이 신부를 안고 나가는 게 기탄의 전통이야.」

나중에 발리안에게 안겨 처소 밖으로 나왔을 때. 감탄인지 경악인지 다들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바람에 어찌나 낯이 뜨거웠던지.

「대칸께서 내 아드님이긴 하지만 거참…….」

하투 칸이 웃음을 감추려 수염을 쓰다듬으며 애꿎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대칸이시오, 여러 면에서 따를 자가 없으니. 이제껏 최고 기록은 막계 칸이 세운 닷새였지요, 아마?」

「맞소이다. 이제야 말이지만 그때 아내를 안고 나오다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소.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다 나오.」

칸들이 발리안과 효령을 보고 의미 모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리안의 수하들이 앞다투어 떠들었다.

「대칸. 그동안 그렇게 점잖게 구시더니. 뒤로 호박씨를 까고 계셨던 겁니까?」

「대체 저희 몰래 무얼 드신 겁니까? 비법 좀 일러 주십시오.」

「저, 저도요.」

「야, 시타. 너도 잘 들어 둬라.」

나중에야 효령은 신랑이 신부를 안고 나가는 것이 그의 힘과 정력을 과시하는 일이라는 걸 전해 들었다.

신랑의 강건함이 부족의 안녕, 후계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에 생겨난 전통이라나?

대칸이나 부족 우두머리의 혼인은 특히 관심의 대상이었다. 신랑과 신부는 3일 밤낮 진한 사랑을 나눈 후, 밖으로 나와 그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간혹 서로에게 푹 빠진 신랑 신부가 때를 모르고 시간을 넘기는 수가 있단다.

그간 기다림에 지친 손님들이 어떤 눈으로 자신들의 처소를 바라보고 있었을지 생각하니 효령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

훗. 그때를 떠올린 효령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이런 이야기를 안야국 장공주들에게 들려주기엔 무리였다. 다들 화들짝 놀라 눈살을 찌푸릴 것이 너무도 뻔해서였다.

하지만 효령은 그 낯뜨거운 일도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흘려버리는 기탄인들의 자유로움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어느새 반은 기탄 사람이 된 건가?’

순간, 그녀 가까이 있던 한 장공주가 말했다.

“너 정말 행복하구나, 효령아.”

기침과 사랑은 감출 수 없다더니. 말하지 않아도 효령이 느끼는 기쁨과 충만함이 밖으로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네. 정말 그래요, 언니.”

“다행이다, 정말.”

“그렇게 착하게 살더니 복을 받은 게지.”

장공주들이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예전에는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었는데…….

처음으로 친정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장공주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언니들.”

미소로 화답한 효령이 연제야의 손을 붙들었다.

“이쪽은 제 동생이에요. 언니들이 잘 좀 이끌어주세요.”

“안녕하세요, 연제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제야가 제법 정확한 안야국 말로 인사를 했다. 지난 몇 달간 효령에게 특훈을 받은 결과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도 잘 부탁해요.”

“이목구비가 또렷한 게 너무 예뻐요. 부러워요.”

“그 옷이랑 장신구 정말 신기하다. 만져봐도 돼요?”

“그럼요. 이것 말고도 특이한 게 많은데 나중에 구경 오실래요?”

“정말 그래도 돼요?”

연제야는 특유의 당당함과 친화력으로 금세 장공주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효령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맹유천이 들어간 처소 안에서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쾅, 콰당, 우당탕. 쨍그랑.

탁자며 의자, 도자기 나뒹구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망할 놈의 늙은이. 그게 재상이란 놈이 할 소리야?”

아까 연회에서 재상 추엽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맹유천이 분을 못 이기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형님? 효령은 태후마마께서 하사하신 내 여잔데 기탄의 황후라니요?」

「그 입 다물게. 그러잖아도 황제 폐하와 중신들이 자네나 나를 끌어내리지 못해 혈안인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셈인가? 당장 저승이 코앞인데 아직도 장공주 타령이냔 말일세.」

추엽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넨, 태후마마와 자네가 발리안 그자를 해치우려 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나? 그것이 들통나기라도 하는 날엔 그 즉시로 우리 목이 날아갈 걸세.」

「하지만 누님께서 내일이라도 회복되신다면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헛꿈 깨게. 아까 태의 말이 다행히 차도를 보인다 해도 태후마마께서는 반신불수를 못 면하신다 하니. 그러잖아도 난 내일 당장 사직할 생각일세. 그나마 그게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야.」

「혀, 형님.」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걸세. 그러니 앞으론 괜한 일에 나를 엮어 넣지 말게나.」

한편이라고 믿었던 작자가 겨우 그따위 소리나 하다니. 이제껏 태후와 재상을 위해 헌신한 세월이 아깝기 그지없었다.

“발리안 이 때려죽일 놈. 네놈이 감히 효령을…….”

맹유천은 당장 머리꼭지가 돌아 죽을 지경이었다.

효령을 데려오겠다며 떠난 요희는 그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먼 길이라 시간이 걸리겠거니 애써 참고 있다가 오늘 완전히 날벼락을 맞았다.

기탄의 새 대칸이랍시고 들어선 놈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발리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기함해 죽을 지경인데, 더욱이 그 황후가 효령이라니.

연회 도중 두 사람이 남들의 시선을 피해 주고받던 뜨거운 눈빛을 떠올리니 당장 욕지기가 치밀었다.

“효령…… 네년이 기어이 그 더러운 야만족 놈과 붙어먹었단 말이냐?”

맹유천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요희의 안부 따윈 관심도 없었다. 자기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분을 못 이긴 그가 다시금 손에 걸리는 화병을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효령만큼이나 기품 있는 삼채(三彩) 화병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내가 미쳤지. 야만인에게 함부로 몸을 내주는 그런 천박한 계집을 위해 이딴 걸 준비하다니.”

맹유천이 닥치는 대로 방안의 기물을 치고 쓰러뜨렸다. 최고급 장식품과 어렵게 구해 온 진기한 공예품들이 박살 나 부서졌다. 그 위로 정교한 조각이 아름다운 가구들도 엎어졌다.

지금 맹유천이 있는 곳은 그가 효령을 위해 꾸며둔 방이었다. 거기 놓인 어느 것 하나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모(바다거북) 껍질로 장식된 최고급 침상과 그 곁의 탁자. 장을 가득 채운 비단옷과 장신구들. 심지어 면경이며 분첩 따위의 화장용품까지. 일일이 맹유천이 직접 고른 것들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는 장에 든 효령의 옷가지들을 끌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 상서 어른.”

이 소란을 참다못한 새 첩이 그를 말리러 방안에 뛰어들었다.

“세, 세상에. 이 아까운 것들을……. 이렇게 버리시려거든 저나 주시지…….”

효령을 닮은 어린 첩이 바닥의 옷에 손을 뻗은 순간.

“그 더러운 손을 어디다 대는 것이냐?”

쫙. 맹유천의 손바닥이 첩을 향해 날아왔다.

“……!”

바닥에 쓰러진 첩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몇 날 며칠 품에서 놓지 않고 물고 빨 때는 언제고. 돌변한 그의 모습에 당황한 첩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이건 너 같은 천것이 쓸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이건…….”

발리안의 품에 안겨 사랑을 나누는 효령을 떠올린 맹유천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쫙, 쫙.

급기야 그가 미친 사람처럼 바닥에 널린 비단옷을 찢기 시작했다.

“……!”

여기 더 있다간 죽겠다 싶은 첩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쫙쫙.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는 최고급 비단옷들이 넝마가 되어 바닥에 쌓였다.

“두고 봐라, 이 연놈들아. 내가 이렇게 가만 당하고 있는지. 내 이 치욕을 반드시 갚고 말 테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몇 번이고 공기를 뒤흔들었다.

* * *

보름 가까이 이어졌던 기나긴 연회와 협상이 드디어 모두 끝이 났다.

그간, 황궁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발리안과 황제는 두 나라의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연제야는 황제와의 첫날밤을 무사히 치렀다. 예정했던 일들을 모두 마친 발리안은 내일이면 이곳 안야국의 주도 한경을 떠날 예정이었다.

커다란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모두의 긴장이 느슨해진 깊은 밤. 황궁의 지붕 위를 달리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복면 안에 얼굴을 감춘 이들이 마치 어둠과 한 몸인 듯 소리도 없이 조용히 움직였다.

휙휙, 바람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던 자객들이 삼 층 높이의 본전 지붕 위에서 멈췄다.

너희들은 저쪽, 우린 이쪽으로.

말을 대신하는 우두머리의 수신호에 자객들이 순식간에 두 덩이로 갈라졌다. 그중 한 무리는 장공주들의 거처로, 나머지 한 무리는 후궁 처소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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