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뜻밖의 손님 2
* * *
“기탄의 대칸과 황후, 그리고 공주님께서 드십니다.”
연회 책임자가 엄숙히 대칸의 등장을 알렸다.
‘거봐. 이미 황후가 있잖아.’
‘그럼 역시 우리 중에서 후궁을 뽑겠단 얘기잖아. 어, 어떡하지?’
잔뜩 겁을 먹은 장공주들이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중신들은 중신들대로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기탄의 대칸이라면 일 년 전에 왔던 태자 발타고겠지?’
‘아마 그렇겠지. 놈이 이번에는 또 무슨 억지를 부릴지 걱정일세.’
‘우리에게 더 무엇을 빼앗아 갈 게 있다고. 이제 기탄 놈들이라면 진저리가 나는구먼.’
모두가 저마다의 계산과 생각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사한 봄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 연회장을 잠식한 가운데.
저벅저벅.
드디어, 시원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연회장 앞으로 난 연도(輦道)를 통해 커다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중을 압도하는 커다란 키와 단단한 풍채. 당당한 걸음걸이. 그리고 저녁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어딘지 낯익은 장면에 장공주들은 물론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 설마…….’
‘아니, 저자는……!’
‘저, 저 사람……!’
마침내,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의 소유자가 불빛 아래 얼굴을 내비쳤다.
맙소사!
누구보다 경악한 것은 형부 상서 맹유천과 재상 추엽이었다.
‘발리안 저놈이 여긴 어떻게……!’
‘서, 설마 저자가 기탄의 새 대칸?’
그들이 경악으로 얼어붙은 찰나. 장공주들 사이에서 큰 동요가 일었다.
“얘, 얘들아. 저, 저기…… 저기 좀 봐!”
“세상에! 저게 누구야?”
“효, 효령아!”
“뭐, 효령이?”
“저, 정말 효령이야?”
놀란 장공주들이 조금 전까지의 두려움도 잊고 앞다투어 몸을 내밀었다. 누구라도 감탄할 만한 외모의 대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의 여인.
안야국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몸의 곡선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화려한 의복을 입은 여인 중 하나는 분명 효령이었다.
혼이 나간 듯 넋을 잃은 사람들 틈에서 황제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칸. 안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발리안보다 두 살 어린 그가 자연스레 말을 높였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소, 황제.”
발리안이 여유로운 미소로 응수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기탄의 대칸 발리안이오.”
“칙사를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새 대칸으로 추대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황제께서 이렇게 환대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나 역시 이곳에 다시 오게 되어 무척 기쁘오. 그리고…… 황제께 소개할 사람이 있소.”
발리안이 양팔을 벌려 뒤에 서 있던 두 여인을 앞으로 밀었다.
“이쪽은 황제께서도 잘 아는 사람이오. 안야국 이름은 진효령, 기탄에서는 연제록산이라 불리는 내 황후요.”
효령이 황제를 향해 살며시 무릎을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라버니.”
“효령아. 아니, 반갑소, 황후.”
황제가 기쁨으로 환히 웃었다.
“그리고 이쪽은…….”
발리안이 남은 한 여인을 소개했다.
“황후인 연제록산의 자매이자 연제 부족의 공주 연제야요.”
연제야가 당돌하게도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안야국 말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제야라 합니다, 황제 폐하.”
“…….”
“폐하?”
멍하니 넋을 놓은 것 같던 황제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바, 반갑소. 먼 길 오느라 고생했소, 공주.”
황제가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으흠. 헛기침을 한 그가 발리안에게 말했다.
“긴 이야기는 앉아서 하지요. 자, 이쪽으로.”
“그럼…….”
황제가 발리안과 효령, 연제야를 연회장 정중앙에 있는 상석으로 안내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대단사관 모개와 단사관 시타, 친위대장 아굴가와 대도위 호독니, 그 외의 수하들이 아래쪽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착석하자 황제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안야국과 기탄이 혼인 동맹을 통해 새로운 혈맹으로 거듭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오. 나 안야국 황제 진충헌은 기탄의 공주 연제야를 후궁으로 맞아 기탄에 형제의 의를 다할 것을 맹세하오.”
발리안이 뒤를 이었다.
“나 기탄의 대칸 발리안은 안야국 장공주 진효령을 황후로 맞아 안야국에 형제의 의를 다할 것을 맹세하오.”
“이로써 두 나라의 동맹이 성립되었으니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다 함께 잔을 듭시다!”
황제와 발리안을 필두로 모든 중신들이 잔을 높이 올렸다.
“감축드립니다, 황제 폐하!”
“감축드립니다, 대칸!”
악단의 연주와 함께 무희들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 근심으로 어둡던 안야국 중신들의 낯빛이 어느새 환해졌다.
기탄이 괜한 트집이라도 잡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중신들도, 장공주들도 안도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모두, 아니 몇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이 유쾌하게 연회를 즐기는 동안, 발리안과 황제가 허물없는 정담을 나눴다. 이미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 터라 서로가 낯설지 않았다.
어머니 태후가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가을. 황제는 새 대칸이 된 발리안의 서신을 받았다. 이번엔 또 무슨 무리한 요구를 하려나 긴장했던 것도 잠시.
「……!」
전혀 예상 밖의 내용에 황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신은 효령을 아내로 청하는 진솔하고 정중한 글이었다. 그 안에 담긴 진심에 황제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에 황제 역시 정직으로 화답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발리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전에 이곳 황궁에서 한 번 만난 것으로 발리안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효령이라는 매개가 있어서인지 두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말이 잘 통했다.
“대칸. 미리 언질을 주셨기에 망정이지 정말 놀랄 뻔했습니다. 이렇게 효령일 다시 보게 되다니. 게다가 보내 주신 그 많은 금이며 무기, 소금…….”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혼례를 청하는 선물이라기에는 너무 과했습니다. 유용하게 쓰기는 했지만 정말 그걸 다 받아도 되는지…….”
그동안 삭주를 통해, 황제가 황궁을 장악하고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사람이 바로 발리안이었다. 태후와 맹유천에게 혹사당하면서도 제대로 된 녹봉조차 받지 못하던 군사들의 마음을 사고, 호위군을 대폭 늘려 주변을 든든히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발리안이 보낸 자금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의 인사에 발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아내를 얻기 위해선 당연한 일이오. 효령 같은 재원을 기탄으로 영영 빼앗아 가는데 그만한 값도 치르지 않는 데서야 말이 되겠소?”
“하지만 그건 나도 같은 처지가 아닙니까? 저토록 아리따운 공주를 데려오는데 우리 안야국으로선 그만한 여력이…….”
황제의 어깨가 슬그머니 처졌다. 반면, 아리땁다는 소리를 알아들은 연제야의 뺨은 발그레 달아올랐다.
“내가 바로 안야국이 그렇게 되는데 일조한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그 빚을 갚는 거라 생각하시오. 대신…….”
“……?”
“할 수 있는 한 여러 분야의 많은 서책들을 보내 주시오. 우리에겐 그것이 금보다 더 가치가 있으니.”
“정말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그렇소.”
“대칸께서 곡식을 원하실 줄 알았는데…….”
“지금 굶주림에 시달리는 안야국 백성들이 한둘이 아니잖소. 그러니 다들 삭주로 몰려오는 게고. 걱정하지 마시오. 곧 우리도 식량을 확보할 다른 길이 생길 것 같소. 한참 교섭 중이오.”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황제께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이제 우리가 혈맹이 되었으니 응당 삭주를 돌려주어야 마땅하지만…… 약속된 기한까지 그대로 우리 쪽에 맡겨 줬으면 좋겠소.”
발리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그곳을 안야국의 높은 학문과 문화를 배울 전진 기지로 삼고 싶소. 또 원래 의도대로 교역의 장소로도 활용할 것이고. 대신 거래는 공정하고 정확하게.”
“…….”
“안야국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은 없도록 하겠소. 그리고 여느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황실에 조세도 내겠소.”
“그럼 우리로서는 딱히 손해날 일이 없지만 대칸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실은 우리 둘…… 모두를 위해서요. 앞서 말했듯이 난 안야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또…….”
“…….”
“연제야가 황궁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기까지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차원이오. 필요에 따라 삭주에 있는 내 군사들은 황제의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오.”
발리안의 눈이 힐끗 저만치에 앉아 있는 맹유천을 향했다.
“황제께서 언제든 골치 아픈 승냥이를 사냥할 때……. 적어도 다른 놈들이 덩달아 날뛰는 일이 없도록 견제하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황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직접 나설 수 있음에도 안야국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발리안의 배려가 느껴졌다.
“그렇군요. 그러잖아도 이 땅 여기저기 승냥이와 한편인 교활한 여우들이 널려 있어서……. 제대로 된 사냥은 시도도 못 하던 참입니다.”
“…….”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가 산적해 있는데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습니다.”
“황제의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나길 기원하겠소. 그런 의미에서…….”
같은 뜻에 도달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둘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사이, 효령은 조용히 연제야를 데리고 장공주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제가 야만족 후궁을 들인다는 사실에 열을 받은 안야국 황후는 병을 핑계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덕분에 효령과 연제야는 그녀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
“세상에, 효령아. 살아 있었구나. 이렇게 널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장공주들이 반가운 얼굴로 효령을 맞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기탄의 황후라니……. 저 사람, 아니 대칸과는 어떻게…….”
“아니, 그보다 저 사람, 그때 사신으로 온 사람 맞지? 근데 어떻게 저 사람이 대칸이 된 거야? 응?”
질문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효령은 차근차근, 기탄이나 발리안에게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에둘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럼 지금 한창 신혼이겠네?”
“대칸께서 잘해 주시니? 겉보기엔 좀 차가워 보이시는데…….”
“그게…….”
효령이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