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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98화 (98/116)

98화. 뜻밖의 손님 1

* * *

그 순간, 앞마당을 지나다 요희를 발견한 맹유천의 수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요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요희의 한쪽 뺨이 붉은 것이 안 봐도 무슨 사정인지 알 만했다.

“상서 어른께서도 참…….”

그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 마십시오. 조금만 지나면 상서 어른 기분이 풀리실 테니. 처소를 치워 두었으니 거기서 쉬고 계시면 곧 다시 찾으실 겁니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요희가 태연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게 사실은…… 요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이유 없이 역정을 내시는 일이 부쩍 느셨습니다. 아무래도 황궁 일이 마음대로 안 풀리시는 모양입니다.”

“황궁 일이라니?”

“태후마마께서 남총으로 들인 미소년들과 밤일을 치르다 쓰러지셔서, 환후가 위중하신 지 꽤 되었습니다. 그사이 황제 폐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

“…….”

“파직을 당했거나 귀양 가 있던 옛 중신들을 모조리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리고는 노골적으로 태후마마 측근들을 멀리하시는 탓에 국구(황제의 장인) 되시는 재상 어른의 입지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

“벌써 태후마마의 친인척이 몇이나 부정부패로 고변을 당하여 죽거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니 상서 어른께서도 자연 불안하실 수밖에요.”

요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자신이 기탄에 가 있던 사이, 안야국도 조용하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태후의 기세가 워낙 등등하여 거기 눌려 있었을 뿐, 황제는 머리도 양심도 있는 사내였다. 차마 어머니를 거스를 수 없어 숨을 죽인 채 때를 기다리고 있던 그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기다 지난달, 명국공부가 있는 삭주에서 기탄의 칙사가 왔다 갔는데……. 기탄에 새 대칸이 등극하신 걸 기념하여 양국 간 새로운 동맹이 맺어질 모양입니다.”

“뭐? 이렇게 빨리?”

삭주를 통해서라지만 기탄이 벌써 사신을 보낼 만큼 안정되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아까 맹유천이 한 말이 이것이었나.

‘뭐야? 설마 발타고가 살아 있는 건가? 내가 두고 온 술을 마셨다면 절대 그럴 리가……. 아냐, 어쩌면…….’

그러고 보니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발타고가 죽지 않고 살아서 황위를 차지했거나. 아니면 설사 발타고가 죽었다 해도, 그 어머니인 황후가 손자를 앞세워 황궁을 장악했거나.

하지만 칙사가 삭주에서 왔다는 건 어딘지 석연찮았다. 발리안의 수하들이 순순히 발타고나 황후의 명을 따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역시 황후로군. 발리안을 죽이는 대신 그를 인질로 잡고 삭주의 군사들을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해.’

요희가 수하에게 물었다.

“혹 누가 기탄의 새 대칸이 되었는지 아나?

“그건 저도 잘……. 황궁에서도 쉬쉬하며 추진하는 일이라 상서 어른도 잘 모르시는 눈치더라고요.”

수하가 멋쩍게 고개를 긁적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서 어른께서 효령 장공주님이 돌아오시길 더욱 고대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장공주님이라면 혹 자신의 방패막이가 될까 하여…….”

역시 맹유천다운 생각이었다. 끝까지 이기적이고 비겁한 게.

요희가 맹유천의 수하에게 말했다.

“내가 충고 하나 할까?”

“예?”

“여기 너무 오래 붙어 있지 마. 그러다 나 같은 꼴밖에 더 당하겠어? 너무 늦기 전에 당신도 당신 살길을 찾아.”

말을 마친 요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미련 없이 대문 밖으로 나선 그녀는 이내 뉘엿뉘엿 지는 저녁노을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여느 때라면 모두가 퇴청하고도 남았을 늦은 시각.

황궁은 오늘따라 휘황한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궁 안 곳곳에 내걸린 각색 주단과 대련(對聯)이 복을 부르는 홍등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거기, 아름다운 꽃을 피운 화초와 나무들이 내뿜는 향기가 스며들어 그윽한 정취를 더했다.

잔치를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봄날의 한가운데. 관복을 차려입은 중신들이 하나둘 안야국 황궁을 향해 모여들었다.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은 중신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이 밤중에 느닷없이 연회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글쎄요. 나도 조금 전에야 전갈을 받았지 뭐요? 듣자 하니 기탄의 대칸을 환영하는 연회라던데…….”

“그, 그게 무슨 말이오? 기탄의 대칸이라니?”

“나도 무슨 영문인지 도통 모르겠소. 그러고 보니, 지난가을 기탄에 새 대칸이 등극했단 소릴 들은 것 같긴 하오만.”

“그럼 작년에 왔던 발타고 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한데……. 딱히 알려진 것이 없으니 나도 확신은 못 하겠소이다.”

“하긴. 그간 태후마마께서 쓰러지시고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느라, 거기 신경 쓸 여력이 없긴 했소.”

“그나저나 그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대칸이 어느 틈에 여길 왔다는 것인지. 그것도 ‘온다 간다’ 한마디 언질도 없이 이렇게 느닷없이 말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아까 조회 때까지만 해도 아무 소리가 없더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원. 꼭 무엇에라도 홀린 기분이구려.”

말없이 중신들의 뒤를 따라오던 맹유천이 재상 추엽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붙었다.

“형님. 지금 저게 무슨 소립니까? 기탄의 대칸을 환영하는 연회라니요?”

후. 추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묻지 말게. 나도 조금 전 궁에 도착해서야 겨우 알았으니.”

“아니, 재상이신 형님께서 그런 중대사를 모르시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추엽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자네와 내 눈앞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질 않나? 그러잖아도 황제 폐하께서 최측근들만 싸고도시며 뭔가를 감추신다 싶더니……. 이 일이었던 모양일세.”

“기탄에서 여기가 하루 이틀 길도 아니고, 대칸이 어떻게 소리 소문도 없이 안야국에 왔단 말입니까?”

“이건 내 짐작이네만, 이미 삭주에 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 거기서 여기라면 며칠이면 도착하지 않나? 봄이 되고 부쩍, 삭주에서 칙사가 자주 왔다 갔던 걸 보면 틀림없지, 싶네.”

“으음. 정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한데 말입니다, 형님.”

맹유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황제 폐하께서 기탄의 대칸이 온다는 사실을 이제껏 숨기신 걸까요? 대체 무얼 감추시려고?”

“난들 아나? 요즘 황궁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일이 더 많네. 황제 폐하께서 날 멀리하신 지 이미 오래잖나? 요즘 같아선 도통 황궁에 나올 맛이 나지 않아.”

어두운 안색의 그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난 잠시 태후마마께 들렀다 갈 테니 먼저 가게. 있다 연회장에서 봄세.”

“알겠습니다.”

“오늘은 차도가 좀 있으시려나 모르겠네.”

나지막이 중얼거린 추엽이 태후궁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빌어먹을!’

홀로 남은 맹유천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안야국 제일의 권력으로 통하던 추엽과 자신의 처지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 요즘 도통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지난겨울, 효령을 데려오겠다며 떠난 요희는 아예 소식이 끊겼고, 친형제나 다름없던 위주 도독도 얼마 전 파직을 당했다. 위주 도독이라도 있으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삭주 쪽을 살펴보라 시키기라도 하련만.

태후의 상태가 저 지경이니 휘하의 비밀 조직을 동원하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황제는 물론이고 다들 자신의 꼬투리를 잡으려 혈안인 이 마당에 그들을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자금 사정도 엉망이었다.

태후가 대던 조직의 운영 자금이 날아간 것은 물론, 뒷주머니나 다름없던 뇌물마저 끊기니 당장 돈 들어올 곳이 없었다.

지금 맹유천의 상황은 한마디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나 다름없었다.

‘이럴 때 요희가 있었으면 무슨 대책이라도 세울 텐데…….’

그가 속으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이, 어느새 연회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요희, 그 계집은 대체 어디 처박혀서는. 젠장!’

화가 치민 맹유천이 애먼 화풀이를 해대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 * *

손님맞이 준비를 마친 연회장은 화려한 겉치레와는 달리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황제와 중신들이 긴장된 기색으로 대칸을 기다리는 사이. 그 맞은편에 앉은 장공주들 사이에서도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지난해 혼례를 치르고 궁을 떠난 그녀들은 오늘 황제의 초대로 특별히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은 황명에 따라 남편과 갈라서 홀몸이 된 상태였다.

태후의 일가붙이였던 남편들이 벌을 받을 때, 누이들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걸 염려한 황제의 배려였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아직 불안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 열리는 연회의 성격 때문이었다.

“혹 폐하께서 우릴 기탄에 후궁으로 보내시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폐하께서 우릴 얼마나 생각해 주시는데…….”

“아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다급해지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라고. 기탄 쪽에서 요구하면 폐하께 무슨 힘이 있어 거절하겠니?”

“그 말이 맞아. 이건 비밀인데…….”

한 장공주가 바짝 소리를 낮췄다.

“오늘 이 자리에서 혼인 동맹이 맺어질 거래. 기탄의 대칸이 안야국 장공주 중 하나를 아내로 달라 청했대.”

“아내? 후궁 말이야?”

“아니, 황후.”

“뭐, 황후?”

듣고 있던 장공주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기탄은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면 황후로 삼지 않는다며? 뭔가 잘못 알았겠지.”

“맞아. 황후라니, 말도 안 돼. 게다가 황후든 후궁이든 기탄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하. 다른 장공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굳이 우리들까지 이 자리에 부르시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런 거였구나. 정말 싫다, 우리 처지가.”

“맞아. 억지 혼인은 한 번으로 족해. 더는 싫어, 싫다고.”

그녀들이 몸서리를 치는 도중, 한 내관이 황급히 연회장으로 달려왔다.

“폐하. 기탄의 대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그런가?”

안야국 황제가 경직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에 앉은 장공주들 역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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