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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97화 (97/116)

97화. 토사구팽

* * *

내실 안에서 여인의 애교 섞인 콧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상서 어른. 이러다 저 죽겠습니다.”

“언제는 죽여 달라더니 그새 마음이 변한 것이냐? 이런 요망한 것.”

“아이참, 상서 어른도. 제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조금만 쉬었다 하자고 했지. 근데 좀 전에 주신 그 약은 뭡니까? 너무 쓰던데…….”

“여인에게 아주 좋은 것이다. 몇 번만 더 먹으면 평생 지금처럼 어여쁘고 젊은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약.”

“정말입니까? 그럼 내일도 또 주십시…….”

요희는 천천히 내실을 가린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가득 차지한 화려한 침상 위. 벌거벗은 남녀가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

그중 하나는 너무도 낯익은 얼굴. 놀랍게도 다른 하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러나 요희는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상서 어른.”

난데없는 부름에 맹유천이 퍼뜩 몸을 일으켰다.

“아니 너는? 요희가 아니냐? 언제 돌아온 것이냐?”

마치 해라도 본 듯 맹유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습에 요희가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은 찰나, 그가 요희의 뒤를 보며 물었다.

“그래, 효령은? 지금 어디 있느냐? 같이 온 것이냐?”

요희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침상에 있던 여인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비단 이불로 아슬아슬 가슴 아래를 가린 채였다.

“상서 어른. 그자는 뭡니까? 효령은 또 누구고요?”

아직 어린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 하지만 제법 고집도 세고 질투심도 많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내, 이 사람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밖으로 나가자.”

간신히 바지에 다리를 꿰어 넣은 맹유천이 요희를 내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요희를 반강제로 의자에 눌러 앉힌 그가 서둘러 그 맞은편에 앉았다.

“어서 말해 보아라. 효령은? 효령은 어디 있느냐? 안야국까지 무사히 데리고 왔겠지?”

“……상서 어른.”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던 요희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 제가 없는 사이 새로 들이신 첩입니까? 꽤 반반한데요.”

“역시 그렇지?”

맹유천이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거렸다.

“소나 잡는 천한 포정(庖丁) 놈에게 저렇게 예쁜 딸년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옥에 처넣겠다 겁을 줬더니 알아서 바치더구나.”

“혹 저 아이에게도 부자탕을 먹이신 겁니까?”

“그래. 몇 번 품지도 않았는데 혹 아이라도 배면 골치 아플 것 아니냐? 저 아이를 때 빼고 광내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금세 몸매가 망가져서야 쓰나?”

“그러다 영영 아이를 갖지 못하면 어쩌려고요?”

“첩에게서 자식을 낳아봐야 어디 쓸데가 있다고. 내겐 이미 죽은 아내가 낳은 아들이 둘씩이나 있다. 어차피 그놈들도 곁가지긴 하지만. 내 뒤를 이을 아들은 효령이 낳아줄 것이다.”

맹유천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나와 효령을 쏙 빼닮는다면 정말 대단한 놈이 태어나지 않겠느냐? 뛰어난 외모와 학식은 물론 고귀한 혈통까지. 그야말로 완벽하지.”

순간 요희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내실에 있는 저 아이…… 효령 장공주님을 닮았습니다.”

맹유천이 힐끗, 안쪽을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역시 네 눈에도 그리 보이지? 처음 본 순간 어찌나 놀랐는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하지만 출신이 어디 간다더냐? 아무리 예뻐도 천것은 천것이다. 고아한 맛이 없어.”

그가 불만스럽게 말을 뱉었다.

“색기가 넘쳐 품는 맛은 제법 괜찮다만, 그러니 자연 행동도 천박할 수밖에. 그보다 효령은 지금 어디 있느냐? 사신들과 같이 오는 것이냐? 아니면…….”

요희가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만, 효령 장공주님은 모셔 오지 못했습니다.”

“……!”

순간, 맹유천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모셔 오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장공주님은 아직 기탄에……!”

요희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 맹유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효령이 아직 기탄에 있다니?”

“명하신 대로 기탄의 대칸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떠나올 때 상황이 워낙 급박하여 장공주님까지 챙길 여력이…….”

“그러니까 그 말은…….”

그녀를 내려다보는 맹유천의 눈썹이 분노로 바르르 떨렸다.

“네년이 혼자 살겠다고 효령을 거기 버려두고 왔다는 말이 아니냐?”

“말씀드렸잖습니까, 상서 어른?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효령 장공주님을 모셔 오진 못했지만, 상서 어른의 명령은 완수했습니다. 기탄은 지금 무질서와 혼란으로……!”

짝! 순간 요희의 얼굴이 한쪽으로 홱, 하니 돌아갔다.

“사, 상서…… 어른…….”

자신이 당한 일을 믿을 수 없어 요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네가 무슨 명령을 완수했다는 게냐? 이미 지난달부터 새 대칸이 보낸 기탄의 사신이 뻔질나게 황궁에 드나드는 마당에 뻔뻔하게 그딴 거짓말을 입에 담다니!”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러 말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효령뿐이다. 그러니 어서 가서 효령을 내 눈앞에 데려와. 당장 데려오란 말이다!”

“상서 어른. 지금 기탄에 갔다간 전 죽습니다.”

맹유천이 요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네년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여기 있어도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니 얼른 가 효령을 데려와라. 효령과 함께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볼 생각은 마라.”

“…….”

미친 듯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요희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 알겠습니다. 상서 어른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진작 그리 나올 것이지.”

그제야 맹유천이 그녀의 멱살을 풀었다.

“…….”

잠깐의 침묵 끝에 끼이익, 의자를 민 요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 가면 다시는 못 뵐 것입니다. 내내 만수무강하…….”

“빌어먹을! 괜히 기분만 잡쳤군.”

맹유천은 그녀의 작별 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

요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내실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온 요희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거칠 것 없이 시야가 탁 트였던 기탄과 달리, 지붕으로 막힌 복도식 통로며 높은 건물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예전엔 화려하게만 보였던 붉은 기둥과 창살, 문들이 왠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한껏 젖히지 않으면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훗.”

어느 순간 그녀의 입에서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것이었구나, 말로만 듣던 토사구팽이란 게. 천하에 두려울 것 없던 내가 이렇게 완벽하게 버림받을 줄이야.

조금 전, 어린 새 첩과 엉겨 붙어 있던 맹유천을 발견한 순간 깨달았다. 이제껏 효령 하나만 떼어 내면 끝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아둔하고 어리석었는지를.

효령이 여기 있든 없든, 살았든 죽었든, 맹유천의 옆자리는 평생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 아닌 모두는 그에게 있어 잠시 쓰고 버리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 간단한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왜 저만은 그저 그런 첩들과 다를 거라 자신했을까.

정말 우스운 건 그걸 깨닫게 된 지금, 생각보다 분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예정된 결말을 맞은 것처럼 담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련하기까지 했다.

내가 아무래도 그동안 정신이 나갔었나 봐. 어쩌다 맹유천 같은 지질한 인간을 좋아하게 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었다.

“……!”

허탈한 한숨을 내쉬는 그녀 앞으로 문득 발타고의 모습이 스쳤다.

그 재수 없는 면상을 볼 때마다 밥맛이 떨어져 진저리를 쳤는데…….

‘그래도 당신…… 불만 끄면 꽤 괜찮았어요, 발타고.’

비록 요희란 인간 자체보다 그 몸을 더 사랑했지만 적어도 발타고는 매 순간 그녀에게 정직하고 충실했다. 오늘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발타고를 죽이지 않고 그냥 기탄에 눌러앉았다면 어땠을까.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서야 쓸데없이 그런 의문이 생겼다.

그러고 보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맹목적으로 맹유천을 따랐던 자신이야말로 세상이 흔히 말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 빤한 현실을 이제야 겨우 깨닫다니…… 기분이 거지 같았다.

그동안 나 무슨 짓을 한 거지? 겨우 저깟 인간의 마음에 들자고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내가 반드시 당신을 황후로 만들어 주지.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이거 내가 어렵게 구한 옥환이다. 두홍 너에게라면 무엇이든 아까울 게 없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내 남은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뭐라고? 혀, 형님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우, 울지 마. 사랑해, 가희. 여기서 기다려. 내가 당신의 복수를 해 줄 테니까. 그럼 우린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송지. 절대 날 버리지 않을 거지? 내겐 송지뿐이야. 아버님이 감춰둔 서신이 필요하다고? 아,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뭐? 이걸 마시면 아프지 않을 거라고? 고마워, 섭신. 날 생각해 주는 건 섭신 당신뿐이야.」

「제발 내 남편을 돌려줘요. 당신은 내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우리 애들과 나에겐 그 사람뿐이에요. 이렇게 빌게요, 그러니 제발…….」

「아앙, 아부지. 어머니…….」

수많은 기억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럽고 참담한 기억들.

“……!”

그녀가 뇌리를 파고드는 죄책감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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