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하늘의 뜻 4
* * *
「야, 인마, 이 형님의 깊은 속도 모르고 뭘 그렇게 째려봐?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건데.」
미간을 잔뜩 구기는 발리안을 보고 연제준이 쯧쯧, 혀를 찼다.
「네놈은 어째 여자 마음을 눈곱만큼도 헤아릴 줄 모르냐? 나 원, 기가 차서. 잘 들어라, 인마.」
연제준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내 아버지의 양녀가 됐다 해도 효령은 엄연히 안야국 장공주다. 고국과 거기 남은 친척들에게 제대로 작별을 고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황후가 되면 영영 기탄을 떠나지 못할 것이 아니냐?」
「…….」
「혼자 있는 동안 그 대책을 세워보란 말이다. 어떻게 해야 효령이 안야국 일을 잘 정리할 수 있을지. 안 그랬다간 나중에 효령에게 원망 듣는다. 그리고…….」
「……?」
「네놈, 늘 나더러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데 지금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게 딱 그 말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냐?」
연제준이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여기 황궁에 가득 찬 후궁마마들은 어쩔 셈이냐?」
「……!」
연제준의 말에 발리안이 마치 칼에 찔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그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니.
새로이 대칸이 된 자는 선대 대칸의 후궁을 물려받는 게 기탄의 법이었다. 태자가 황위를 이을 경우, 친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여인이 그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발리안은 한술 더 떠 선대 대칸의 후궁은 물론 발타고의 후궁들까지 이어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자그마치 그 수가 사십여 명.
황후가 되면 효령은 후궁들에게 포위를 당하게 될 처지였다.
「내일 네놈이 정식으로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그들은 공식적으로 네 후궁이 된다. 그들을 어찌할지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걸? 그 처분이 늦어질수록 효령만 상처받을 테니까.」
「…….」
「자기 사낼 남과 나누고 기분 좋을 여자는 없다는 거 알지? 그래서 그동안 내가 효령일 데리고 있어 준다는데……. 너 지금 나에게 엎드려 절을 해도 시원찮다는 거나 알아 둬라. 이 모자란 놈아.」
거들먹거리던 연제준의 얼굴을 떠올린 발리안이 효령 모르게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걸 잘 아는 놈이 그렇게 여러 여자를 후리고 다닌다고? 너나 잘해, 인마.’
왜 그때 그 말을 연제준 면전에서 못했는지 이제 와 후회막급이었다.
효령이 그런 발리안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구림의 세자 저하께서 뭘 어쩌셨는데요?”
“아니 그게…….”
발리안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축 처졌다.
“그 녀석 말이, 구림 칸께서 혼례 전까지 널 구림의 왕궁에 데리고 있겠다고 하셨다는데……. 그게 그쪽 전통이란다.”
“제가 구림에요?”
“싫지? 내가 미리 거절해 봤지만 연제준 그놈이 하도 막무가내로…….”
“아뇨. 전 좋아요. 곧 기탄의 황후가 될 처지인데 제가 먼저 나서 기탄의 전통을 깨서야 되겠어요?”
효령이 미소를 지으며 발리안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우리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리고 나…… 솔직히 궁금해요.”
“뭐가?”
“연제야 공주님요. 그분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기탄의 여인들이 어째서 그렇게 당당하고 대담한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효령아.”
“안야국에서 여인들은 대부분 남자의 그림자로 살아요. 난 이제껏 기탄이 야만족의 나라라고만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멋진 남자들과 그보다 더 멋진 여자들이 많은 곳인 줄 몰랐다고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대장과 떨어지는 건 정말 서운하지만, 다시 만날 땐 나도 기탄 여인들처럼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 있을게요. 그래서 누구라도 자랑스러워할 기탄의 황후가 될 거예요.”
훗. 발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조금은 안심한 듯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서운한 표정이었다.
그가 덥석 효령의 허리를 낚아챘다.
“대신 오늘 밤은 아무리 사정해도 안 놔줘.”
그가 짓궂은 얼굴로 효령을 안아 들었다.
“오늘은 무조건 내 욕심대로 할 테니까 각오해.”
“대, 대장. 우리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가 자신을 침상으로 데려가는 데 당황한 효령이 속삭였다.
“우린 아직 혼인 전이잖아요. 누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알면 뭐 어때서? 잊었어? 난 기탄의 대칸이야. 내가 곧 기탄의 법이라고.”
“하지만…….”
아직 선대 대칸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효령이 하려던 말은 곧장 발리안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효령을 침상에 누인 발리안이 얼굴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옷자락을 풀었다.
‘이, 이러면 안 돼요. 제발 나 좀 놔줘요, 대장. 잠깐 내 말 좀 들으라고요.’
그러나 어찌나 막무가내로 입술을 빨아대는지 곧 효령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발리안의 몸이 사정없이 겹쳐지고 가슴 언저리에서 서늘한 손이 느껴진다 생각한 순간.
갑자기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사방이 조용해지면서 효령의 입안으로 급작스레 신선한 공기가 몰려들었다.
‘대, 대장……?’
급히 정신을 차린 효령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불과 조금 전 짐승처럼 덤벼들던 발리안이 거짓말처럼 순한 양으로 돌변해 있었다.
“대장, 대장?”
발리안의 몸을 흔들던 효령이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사람 잔뜩 긴장하게 해놓고는…… 이게 뭐야?’
쌔액 쌔액. 효령의 귓가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다치고 심하게 피를 쏟은 몸으로 이틀 밤낮, 잠 한숨 자지 않은 채 험한 길을 말을 달리고. 거기 더해 황궁을 에워싼 군사들과 싸움을 벌이고. 또 왕족 회의에 가 칸들과의 말씨름 끝에 대칸이 되고.
이 밤 이 순간이 되기까지 유주를 제외하곤 사흘 동안 제대로 된 끼니 한번 때우지 못한 발리안이 그예 기절해 잠이 든 것이었다.
선대 대칸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 민망한 일을 저지르지 않게 되어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무방비로 잠든 발리안을 보는 것도 싫지 않았다.
「기탄의 장례는 축제나 다름없어. 다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벌여.」
문득 언젠가 시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째서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됐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야 고단한 삶을 마치고 천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거기서는 땅과 초지, 말과 가축을 두고 다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물도, 먹을 것도 차고 넘칠 테니까 말이야.」
너른 땅덩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겐 굶주림과 전쟁이 일상인, 모든 게 부족한 땅. 그 땅의 미래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발리안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어쩌면 오늘의 이 고단한 잠이 앞으로도 평생 이어질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둘이 함께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자신이 있기에.
효령은 가만히 발리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사랑해요, 대장.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발리안이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기탄의 초원을 닮은 그 너른 품에 안겨 어느새 효령도 새록새록 잠이 들었다.
* * *
서산에 걸린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기나긴 말과 마차의 행렬이 안야국 국경에 들어섰다. 요희와 함께 기탄으로 향했던 사신단의 귀국 길이었다.
12월의 초순. 지금쯤 기탄은 산과 강, 심지어 하늘까지 얼어붙었을 테지만 안야국은 아직 첫눈도 내리지 않은 그저 쌀쌀한 날씨였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밟아보는 안야국 땅이냐?”
“그러게. 역시 내 나라가 최고라니까.”
“지긋지긋한 고생도 오늘로 끝이로구먼. 이제야 좀 살겠네.”
행렬을 호위하는 군사들의 입에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두 번 다시 그놈의 나라에 가나 봐라. 망할 놈의 기탄.”
으으. 한 군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기탄의 국경을 넘기 직전 마지막으로 겪었던 가을 추위를 떠올리니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다시 생각해도 거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땔감이며 궁려, 양털 이불과 털옷에 식량까지 단단히 챙겨 출발했음에도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군사들의 수가 많았기에 망정이지. 살을 에는 추위 하며, 굶주림에 겁도 없이 덤벼드는 야생 동물들 하며, 적북 지방에서 마주친 도적들 하며. 하마터면 험한 이국 땅에서 개죽음을 당할 뻔했다. 그러잖아도 일행 중 몇은 심한 고뿔로 사경을 헤맸다. 워낙 상태가 위중해서 대현국에 도움을 청하여 거기 남겨두고 온 상태였다.
사신들이 자신들을 마중하러 나올 안야국 관리들을 기다리는 사이.
곱상한 얼굴의 사내 하나가 마차에서 빠져나와 준비해둔 말 위에 올랐다. 그녀는 남장한 요희였다. 머리 모양이며 옷차림이 달라지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만 헤어지죠. 내가 사람들 눈에 뜨여서 좋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가 고삐를 쥐며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 혼자였다면 기탄을 탈출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노고에 대해 빠짐없이 상서 어른께 전해 드리지요.”
그녀를 따라온 사신단의 우두머리가 추운지 옷자락을 여미며 말했다.
“무사히 기탄을 빠져나온 것은 다행이나 효령 장공주님의 일로 상서 어른께서 상심하실 것을 생각하면…….”
후우.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상서 어른께서도 부득이한 상황이었다는 걸 이해하실 테니……. 크게 책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야 더는 바랄 게 없지만. 부디 잘 좀 말씀드려 주시오.”
“그럼 앞으로의 여정도 편안하시길 빌겠어요.”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인 요희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 나갔다.
그녀는 이내 작은 그림자가 되어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 * *
“상서 어른!”
요희가 기쁜 얼굴로 맹유천 처소의 문을 열었다.
“……!”
맹유천의 수하가 여기 있다 일러주기에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맹유천이 늘 앉아 일을 보는 탁자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빈 술병과 술잔이었다.
그가 내실에 있는 모양이라 여긴 요희가 서둘러 방을 가로질렀다.
“상서 어른. 접니다. 저 요희입니다. 제가 돌아왔……!”
막 내실에 들어서려던 요희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