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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95화 (95/116)

95화. 하늘의 뜻 3

* * *

“왕족 회의에서 칸들이 너를 내 황후로 인정하셨다.”

“네? 뭐,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대장?”

“여러 칸들께서 네가 정식으로 내 아내가 되는 걸 허락해 주셨다고.”

“정말요?”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효령은 아까 다와와 산시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몇 번이고 발리안을 위해 황후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참이었다.

한데 그 문제가 이렇게 쉽사리 해결되다니. 도무지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절 황후로 인정하신다니……. 다른 부족의 공주님 중에서 고르는 게 아니고요?”

“그게…….”

피식 웃어 보인 발리안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 *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저 같은 놈더러 대칸이라니……. 다들 기탄을 말아먹을 작정이라도 하신 겁니까?」

회의장으로 쳐들어간 발리안은 예의고 뭐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칸들에게 한껏 불만을 쏟아 놓았다.

「농담도 정도껏 하십시오. 차뉴 칸도 계시고 황손도 계신데 왜 하필 접니까? 제가 어떤 놈인지 몰라 이러십니까?」

흥분한 그에게 칸들이 엄정한 얼굴로 말했다.

「대칸. 이곳은 기탄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왕족 회의장입니다. 아무리 기분이 상하셨다 해도 그에 걸맞은 예의를 지키십시오.」

「우린 미치지도 않았고 술에 취한 것도 아닙니다. 긴 회의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차기 대칸을 선출했습니다. 우리를 욕보일 생각이 아니라면 더는 무례히 굴지 마십시오.」

「황궁에 벌어진 이 뜻밖의 불행을 수습하고 기탄을 다시 하나로 묶을 사람은 대칸뿐이라는 게 우리 결론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돌아가신 선대 대칸과 하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발리안의 입을 막은 칸들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대칸께서는 선대 대칸의 유지를 받들어 구림 부족의 공주 연제야를 황후로 맞이하시고 속히…….」

「아뇨.」

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전 연제야 공주님과 혼인할 수 없습니다. 저에겐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기탄 출신이 아닙니다.」

「그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대칸이 되시면 어느 나라 여인이든 후궁으로 들이실 수…….」

칸들이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어림없었다.

「아니요. 이미 연제야 공주님께도 설명을 드리고 양해를 구했습니다만……. 제게 아내는 그 사람 하나면 충분합니다. 더는 누구도 필요 없습니다.」

발리안이 단호히 말을 이었다.

「전 대칸의 그릇이 아닙니다. 절대 그 사람과 헤어질 생각도 없고, 원치 않는 여인과 혼인할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니 이참에 대칸이 되란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의 강경한 반응에 칸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발리안이 대칸의 자리를 마다할 줄이야. 그것도 기껏 여인 하나 때문에.

특히 구림 칸은 누구보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껏 딸인 연제야가 황후가 되리라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칸께서 선대 대칸의 유지를 이렇게 쉽사리 저버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땅 출신이 아닌 자가 기탄의 황후가 되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구림 칸의 곁에 있던 다른 칸들도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발리안을 대칸으로 추대했건만, 그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나올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양쪽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결국 하투 칸이 중재에 나섰다.

「대체 그 상대가 누구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우선 말씀이나 들어보지요, 대칸.」

「칸들께서도 잘 아시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대칸께 새끼 청마를 하사받은…….」

「예? 그자라면 그때 그? 설마…… 그자가 여인이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발리안의 말에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세상에, 사내도 아닌 여인의 기지와 견식이 그토록 뛰어나다니. 그때의 놀람과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특히 말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던 기탄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마지막 내기는 지금까지도 술자리의 단골 이야깃거리였다.

이제야 칸들은 발리안이 축제의 춤 상대로 그녀를 고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자가 대단하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황후의 자리는 학문의 깊이 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이제껏 이어져 내려온 기탄의 전통을 함부로 깰 수는 없습니다.」

하투 칸이 타이르듯 말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대칸. 그 여인을 아끼는 대칸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그렇다고 그 여인이 기탄보다 더 중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이키시는 게…….」

「제가 마음을 돌리는 것보다는 칸들께서 절 포기하는 게 더 빠르실 겁니다. 전 대칸의 자리와 그 여인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연제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아까 발리안을 뒤따라온 이후 줄곧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잔뜩 기분을 상한 구림 칸이 아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차뉴 칸이 그를 말리고 나섰다.

「그러지 마시오, 구림 칸. 지금은 누구의 지혜라도 빌려야 할 때가 아니오? 그래, 세자.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게.」

「더는 불필요한 다툼을 계속하실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신 선대 대칸의 유지도, 현 대칸의 뜻도 해치지 않을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의 말에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지루한 승강이를 끝낼 방법이 있다니. 가뭄 끝에 단비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그게 뭔가? 어서 말해 보게.」

차뉴 칸이 연제준을 재촉했다.

「그건…….」

연제준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 아버지께서 그 여인의 양부가 되시는 것입니다.」

「뭐, 뭐라? 양부?」

「예. 그렇게 되면 구림 부족의 공주로 황후를 삼으려던 선대 대칸과 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대칸께서도 억지로 다른 여인을 아내로 들이실 필요가 없잖습니까?」

* * *

“일이 그렇게 되었다.”

발리안이 한숨을 쉬며 팔짱을 끼었다.

“칸들께서 그렇게까지 양보를 하며 권하시는데 더는 거절할 수 없어 대칸의 자릴 받아들였다.”

하.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효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적에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데요, 대장.”

그녀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구림 칸께서 순순히 절 양녀로 받아들이시겠대요? 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요?”

“그러잖아도 그런 말이 나오긴 했다. 그냥 공주 자리면 몰라도 장차 황후가 될 사람인데 근본도 모르는 사람을 들일 수는 없다고.”

“그래서요?”

“어쩔 수 없이 네가 안야국 장공주임을 밝혔다. 그랬더니…….”

“그, 그랬더니요?”

“제일 먼저 너와 7황비 사이를 물으시더군.”

쿵, 효령의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럴 만했다. 효령이 안야국 장공주라면 요희와는 자매간이 되기 때문이었다. 기탄에 앵속을 들여오고 태자인 발타고와 정을 통한 7황비에 대해 칸들이 호의적일 리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절도 칸이 내기에서 낸 첫 번째 문제를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요희의 진짜 정체를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안야국과 효령이 그간 기탄과 선대 대칸을 속였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그래서요? 뭐라고 했어요?”

당황한 효령이 발리안에게 답을 재촉했다.

“자매가 맞긴 하지만…… 너는 내내 비접을 나가 있어 7황비의 이름만 겨우 알 뿐 안면은 없다 했다. 그간 안야국 황실과도 거의 교류가 없었다고…….”

후. 지혜로운 발리안의 대처에 효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발리안과 혼인도 하기 전에 나쁜 인상부터 심어줄 뻔했는데. 역시 발리안은 발리안이었다.

그제야 효령은 비로소 모든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럼 아까 말한 슬픈 소식은 뭐예요?”

그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발리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게…… 우리 혼례는 선대 대칸의 장례 후에 치러질 게다. 한데 문제는…….”

“……?”

“손님들이 참여하는 장례 절차는 7일이면 끝나지만, 난 다른 의례들까지 모두 마쳐야 해서……. 그땐 이미 추위가 시작된다. 혼례를 치르기엔 무리야.”

장례를 비롯하여 영혼을 떠나보내는 의식이 완전히 마무리되기까지는 총 49일이 걸렸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이미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기탄의 가을과 겨울은 안야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추웠다. 10월 말부터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땅이 얼어붙었다. 11월부터 시작되는 한파는 사람도 짐승들도 견뎌내기 어려웠다. 때문에, 사람들은 거처에 칩거하며 봄이 오기까지 바깥 활동을 삼갔다. 자연 손님이나 부족 간의 왕래도, 전쟁도 중단되는 시기였다.

그런 날씨에 혼례라니 어불성설이었다.

“해서 우리 혼례는 날이 풀리는 봄에나 가능할 것 같다.”

“네? 그렇게 늦게요?”

조금 심각해지는가 싶던 효령의 얼굴이 이내 펴졌다. 안야국에서도 국상 후 일정 기간은 혼례를 올리지 않는 것이 법도 아니던가. 안야국에 대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늘 같이 있을 건데 혼례가 조금 늦어지는 것쯤…….”

후. 발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야 내가 굳이 슬픈 소식이라고 말할 까닭이 없지. 글쎄 연제준 그 망할 놈이…….”

발리안이 말을 하다 말고 빠드득 이를 갈았다.

「이제 효령은 구림 부족의 공주가 되었으니 우리 부족의 예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 정도는 이미 잘 알고 계시겠죠, 대칸?」

왕족 회의에서 발리안과 효령의 혼인이 결정되자, 연제준은 기회라도 잡은 듯 신이 나 이죽거렸다.

「아버지는 이번 겨울이 효령에게 기탄과 우리 구림 부족의 전통에 대해 가르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시던데…….」

「뭐……?」

「연제야도 언니가 생겼다면서 어찌나 기뻐하던지. 효령에게 안야국에 대해 묻고 싶은게 많다면서 잔뜩 기대하고 있지 뭡니까?」

효령을 구림 부족의 땅으로 데려가겠단 말에 열을 받은 발리안이 연제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이러려고 효령을 네 누이로 삼겠다고 나선 거냐?」

연제준의 입가에 얄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대칸? 제가 허올란과 뜨거운 겨울을 보낼 동안 어디 혼자 잘 견뎌 보십시오. 아니지. 기탄을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하느라 딴생각할 겨를이 없으시겠군요.」

어찌나 그 얼굴이 얄미운지 하마터면 주먹이 날아갈 뻔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연제준이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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