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94화 (94/116)

94화. 하늘의 뜻 2

* * *

회의장에는 적막이 흘렀다.

누구도 감히 나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었다. 한동안 무겁고도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걸 깬 사람은 뜻밖에도 연제준이었다.

“전 차뉴 칸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제껏 리안이 맨손으로 이뤄낸 일들을 보십시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이번 일로도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

“그 급박한 순간에 그런 기지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리안이라면 분명 기탄을 잘 이끌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칸들이 하나같이 고민에 빠졌다.

대도위 발리안의 능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를 대칸으로 추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황궁 친위대의 반발은 물론, 후에 황손 발도근을 둘러싸고 다시금 혈통 문제로 인한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주저하는 사이, 막계 칸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차뉴 칸. 정말 대칸의 자리를 대도위에게 물리고도 후회하지 않겠소?”

차뉴 칸이 미소를 지었다.

“내 나이 이미 예순이 넘었소. 대칸이 된다 한들 몇 년이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겠소? 어차피 내 자식놈들은 이미 전쟁터에서 다 죽어 내 선택을 따지고 들 놈도 없소.”

“그래도…….”

“형님의 남은 아들 중 하나로 후계를 삼을 작정이었는데 그마저 헛꿈이 되었으니. 내 마지막 소망은 발도근으로 내 뒤를 잇게 하는 것뿐이오. 여러분과 대도위가 그 아이에게만은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면 좋겠소.”

차뉴 칸이 의연한 얼굴로 말했다.

“자, 한시가 급한 문제이니 그만 거수로 결정합시다. 대도위가 대칸이 되는데 찬성하는 칸은 손을 드시오. 난 찬성이오.”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차뉴 칸의 뜻이 정 그렇다면야…….”

막계 칸도 못 이기는 척 손을 들었다.

“나도 찬성이오. 선대 천군이 그를 지목했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있나. 이제 기탄에도 새 시대가 오려나 보오.”

구림 칸까지 손을 들었다. 이미 죄인 취급을 받는 절도 칸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하투 칸뿐이었다.

“하투 칸은 어찌 생각하시오?”

차뉴 칸의 질문에 하투 칸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리안은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 버렸소. 미욱한 아비 눈에야 제 아들놈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내 입으로 차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가…….”

막계 칸이 웃으며 하투 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찬성이란 말을 참으로 어렵게도 하는구려. 하투 칸이 이렇게 주저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오.”

“그러게나 말이오.”

“자, 자. 이제 결론을 내립시다.”

차뉴 칸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것으로 왕족 회의는 대도위이자 황족인 발리안을 대칸으로 삼을 것을 선포하오. 구림의 세자 연제준은 당장 가서 새 대칸을 모셔 오라.”

“예.”

연제준이 시원스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말해 봐, 오라버니. 어떻게 알고 우릴 구하러 온 거야?”

기다림에 지친 산시가 시타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지금 발리안은 홀로 태자 발타고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수하들은 밖에 정렬한 채 왕족 회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대열의 맨 뒤에 시타와 함께 서 있던 산시가 몸을 꼼지락거렸다.

“얼른 말해 봐. 궁금하다고.”

“그게…….”

시타가 산시의 귀에 속삭였다.

시타는 발리안과 함께 황궁에 들어왔다. 대칸을 찾기 위해 그의 처소로 가기 전, 발리안은 시타를 비롯한 십여 명의 수하들에게 황궁 북쪽에 있는 지하 감옥을 정탐하고 오도록 시켰다.

만약 대칸이 처소에 없다면 그곳에 갇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로 가다가 다와를 만났지 뭐야?”

“우리 어머닐?”

다와는 발리안이 파음에서 공격을 당했다는 호독니의 말을 들은 이후, 곧장 궁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발리안을 죽이려 했는지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그 끝에 오늘, 발리안의 수하 몇 명이 궁에 끌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기 여자도 끼어 있다는 말에 그게 산시임을 깨달은 그녀는 급히 감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어머니가 무얼 할 수 있다고 그 무시무시한 감옥엘 와?”

“군사들을 매수해서 네가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했대. 너 말고 또 누가 갇혀 있는지도 알아보고. 모개가 그랬어. 세상에 다와가 마음먹어 못 하는 일은 없다고.”

시타가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아냐? 우리가 안 왔으면 술에 약이라도 타서 군사들을 죄 잠재웠을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보니까 여자들이 사내들보다 몇 배는 더 무섭더라.”

“그야 전쟁으로 자릴 비운 남자들 몫까지 다 해내려니까 그럴 수밖에. 힘이 달리면 머리라도 써야지 않겠어?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그건 그렇지만. 하, 언제쯤 우리도 전쟁 걱정 없이 맘 편히 살아 보려나?”

시타가 중얼거리는 사이, 효령이 그들 곁에 다가와 섰다. 발리안의 겉옷을 걸치고 있는 효령을 보고 다와가 입을 만한 걸 찾아주겠다며 데리고 갔던 차였다.

“아직이야?”

효령이 발리안에 대한 처분이 내려졌는지를 물었다.

“아직. 왜 이렇게 회의가 길어지지? 너무 시간이 걸리니까 좀 불안하……!”

산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연제준과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드디어 결정이 내려졌나 보다.”

꿀꺽. 효령과 시타를 비롯하여 거기 선 발리안의 수하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연제준이 발타고의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만 일어나라, 리안.”

연제준이 발타고의 시신 곁에 앉아 있는 발리안을 불렀다.

발리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수하들의 처분은?”

그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칸들께 제대로 전했나? 내 수하들은 태자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독니와 다른 수하들이 칸들을 구한 전공을 봐서라도 그들만은…….”

“네 수하들의 일을 왜 나에게 묻냐?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뜻 모를 소리에 발리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수하들을 내 마음대로 하라니 그게 무슨……?”

순간, 연제준이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구림의 세자, 연제준. 왕족 회의를 대신하여 칸들의 뜻을 전합니다. 발씨 황족인 대도위 발리안은 오늘부로 기탄의 새로운 대칸이 되셨습니다. 신 기쁜 마음으로 대칸을 뵙습니다.”

“……?”

벙한 표정으로 연제준을 내려다보던 발리안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너 지금 뭐 하냐? 하여튼 네놈 짓궂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농담이 하고 싶냐?”

“대칸.”

“야, 인마. 농담도 때와 장소는 가려야 하는 거다. 나 지금 기분 별로다. 장난 그만하고 빨리 내 수하들이 어찌 되는지부터 말해라.”

“농담이 아닙니다, 대칸.”

“너 죽을래?”

급기야 발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성을 내었다. 그에 질세라, 연제준이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이런 망할 놈이! 남은 모처럼 진지한데 어디서 농담 타령? 야, 인마. 너 대칸이 됐다고. 그러니까 네 수하들 처분은 네놈 맘대로 하란 말이다. 아직도 내 말 못 알아듣냐?”

연제준이 발리안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그거 아냐? 가끔 보면 네놈 완전 멍텅구리 같다는 거. 내가 아무리 속이 없어도 그렇지, 이 상황에 누가 그딴 걸로 장난을 치겠냐? 이 돌대가리야!”

폭포수 같은 반격에 발리안이 흠칫했다.

“설마…… 지금 그 말이 사실이라고?”

“당연하지. 지금 칸들께서 회의장에서 널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

“다들 미치셨군.”

기뻐하기는커녕 불경스러운 소리를 내뱉은 발리안이 빠른 걸음으로 처소를 빠져나갔다.

“야, 리…… 아니, 대칸. 멈추십시오, 대칸!”

다급히 문을 닫고 따라 나온 연제준이 발리안을 쫓아 뛰었다.

“……!”

순간, 그곳 앞마당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발리안의 수하들이 충격으로 넋을 놓은 채 하나같이 얼어붙었다. 잠시 후. 마치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 방금 그, 그 소리 들었냐?”

“너도 들었냐? 지, 지금 저게 무슨 소리냐?”

“그러게.”

“대, 대칸이라니. 누가?”

“글쎄. 그거 서, 설마 우리 대장을 두고 하는 소린 아니겠지?”

“에이, 설마…….”

모두가 제 귀를 믿을 수 없어 볼을 꼬집고 서로의 뺨을 때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 * *

“지금 당장 저희를 따르시지요.”

이미 어두울 대로 어두워진 밤. 효령은 궁녀들의 인도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대칸께서 모셔 오라 했습니다.」

조금 전 궁녀들이 했던 말을 떠올린 효령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발리안이 대칸이 되었단 사실이 기쁘면서도 가슴 한편이 조여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리안이 대칸이 되었다는 건, 효령에게 있어 안야국과의 이별을 의미했다.

외사촌 동생 한유와 명국공부, 삭주의 익숙한 풍경들이 눈앞을 스치며 마음이 저릿하니 아파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다.

이제 효령에게 있어 발리안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기에.

하지만 그녀가 처한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 왕자님이 대칸이 되시다니, 더없이 기쁘긴 한데, 효령이 널 생각하면……. 이를 어쩌면 좋니?」

「그러게. 대칸의 황후는 기탄의 공주 가운데서 뽑는 게 전통이라…….」

발리안이 대칸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다와와 산시는 안타까움에 미간을 구겼다.

“…….”

후. 효령의 입에서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발리안과 자신을 둘러싼 고난이 이제야 끝나는가 싶었건만. 그를 다른 여인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렵게 손에 쥔 행복을 눈앞에서 빼앗긴 기분이었다.

‘대장…….’

그녀가 애써 감정을 다스리는 사이, 황금으로 지붕을 올린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들어가시지요.”

궁녀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그곳의 문을 열었다. 그 안쪽 저만치에서 발리안이 등을 보인 채 효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

효령이 부러 밝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효령아!”

뒤를 돌아본 발리안의 얼굴에 당장 화색이 돌았다.

“대장, 아니 대칸! 대칸이 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효령이 재빨리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이러지 마라. 우리 사이에 무슨!”

발리안이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효령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다들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어요. 다와는 눈물을 흘리느라 정신없고요. 모두들 근사한 숙소로 안내를 받았는데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어안이 벙벙하다. 당장 녀석들 얼굴도 보고 싶고. 그보다 효령아…….”

발리안이 그윽한 목소리로 효령을 불렀다.

“급히 할 말이 있어 시간이 늦었는데도 불렀다. 너에게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전해야 해서…….”

“네? 그게 무슨……!”

순간, 효령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예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더는 피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효령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 대장도 나만큼이나 괴로울 거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내가 먼저 대장 짐을 덜어주는 게…….’

어렵게 마음을 다잡은 효령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발리안에게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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