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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93화 (93/116)

93화. 하늘의 뜻 1

* * *

발리안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축제 중이라 사방에 악단과 공연단들이 있을 게다. 당장 수하들을 풀어 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대도위인 내 명이라 하고 북을 울리라 해라.」

「뭐?」

「긴급 사태임을 알리는 북을 치게 하란 말이다. 황궁의 북을 쓸 수 없으니 그들을 이용하는 수밖에. 주도에 있는 모든 악단이 한꺼번에 같은 북소리를 낸다면 누구도 실수나 장난이라 치부하지 못할 것이다.」

긴급 사태나 전쟁을 알리는 북이 울리면 사내란 사내들은 뭐든 무기를 들고 황궁 앞 공터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기탄인들은 흥건하게 술에 취해 있다 가도, 순식간에 대열을 갖추고 태세 전환을 하는데 능했다. 오랜 세월 전쟁에 시달리며 살아온 전력 때문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발상에, 연제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궁으로 몰려오는 백성들을 이용하잔 말이지?」

「몰려오는 건 그들뿐이 아닐 것이다. 각 부족의 세자며 군사들도 그 북소릴 듣고 가만있진 않겠지.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황궁 군사들의 주의가 흐트러질 것이다. 그때…….」

「……?」

「수비가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간다. 황궁 밖 경계에 치중하느라 궁 안쪽의 군사들은 비교적 적을 테니 해볼 만할 거다.」

「알았다. 뭣들 하느냐? 당장 대도위의 명을 시행하지 않고.」

연제준의 명에 이십여 명의 수하들이 재빨리 말에 올랐다.

시타가 발리안의 팔을 붙들었다.

「대, 대장. 그럼 우리 동료들은…….」

「그들은 내가 직접 구한다. 연제준.」

「뭐냐? 말만 해라.」

「수하 열만 빌리자. 황궁에서 돌려주마. 거기서 다시 만나자.」

「알았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발리안은 시타, 열 명의 구림 군사들과 함께 자신의 숙영지로 향했다.

* * *

아슬아슬했던 그때를 떠올린 연제준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나?”

차뉴 칸이 물었다.

“리안 그 영리한 놈, 아니 대도위가 숙영지 근처 초지에 불을 놓았습니다.”

기탄에서 풀은 곡식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말들이 무사히 겨울을 나려면 한 포기의 풀과 건초라도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 했다. 게다가 풀이 마르는 가을에 일어나는 불은 매우 위험했다.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주변 숙영지며 황궁까지 번질 수 있어서였다.

때문에, 발리안의 숙영지를 에워싸고 있던 군사들은 포위를 포기하고 당장 강으로 달렸다.

가죽 부대에 강물을 담은 그들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발리안과 시타는 가뿐히 동료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저와 제 군사들은 남쪽 담을 넘어 곧장 회의장으로 왔습니다. 이어 발리안의 수하 절반이 저희와 합류했고요. 발리안은 대칸을 구하러 남은 군사들과 함께…….”

연제준이 말을 이었다.

“그땐 대칸께서 돌아가셨는지 여부를 확실히 몰랐으니까요. 혹 인질로 잡히셨거나 어딘가에 갇혀 계실 경우를 대비해 발리안이 살피러 갔습니다. 나머지는 아시는 바대로입니다.”

하투 칸이 물었다.

“하면 이 자리에 왜 리안은 오지 않은 겐가?”

“여긴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랍니다. 게다가 그놈…….”

연제준의 얼굴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신이 직접 태자 전하를 죽였다 했습니다. 해서 칸들의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그건 리안 잘못이 아닙니다.”

연제준이 마치 제 일처럼 나서 발리안을 변호했다.

“자살할 생각이셨는지 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치사량이 넘는 앵속을 드셨습니다. 하여 리안이 어쩔 수 없이…….”

전장이 아닌 곳에서 병에 걸려 죽거나 자살을 하는 것은 기탄의 사내, 특히 전사들에게는 최고의 불명예였다. 그걸 알기에 연제준은 굳이 불필요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제발 그 녀석을 용서해 주십시오. 놈이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겠지.”

구림 칸이 대꾸했다. 막계 칸도 말을 보탰다.

“게다가 태자는…… 대칸을 죽인 중죄인이오. 태자의 자리가 아무리 존귀하다 한들 절대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 더구나 대도위는 대칸의 중앙군을 이끌고 있으니 그 행동이 과하다 할 수 없소.”

하투 칸이 차뉴 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대칸의 유고 시, 가장 지위가 높은 분은 발씨이신 차뉴 칸이시오. 차뉴 칸께서 내 아들놈의 처분을 결정하시오.”

“아니.”

차뉴 칸이 고개를 저었다.

“왕족 회의가 처음 왜 생겨났소? 대등한 여러 칸이 모여 대칸이 될 지도자를 뽑기 위해서였소. 지금도 다를 것 없소. 우린 다 같은 처지이니 기탄없이 의견을 말하시오. 난…….”

그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대도위에게 죄가 없다 생각하오. 만약 대도위에게 죄를 물으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태자나 의붓자식을 죽인 황후마마의 죄는 다 어찌할 것이오. 그들의 일족으로서 나는 대도위의 죄를 물을 자격이 없소.”

“나도 대도위의 죄를 묻지 않겠소.”

막계 칸이 나섰다.

“대도위의 죄를 묻는다면 그에 의해 목숨을 구명 받은 나와 여러 칸들은 뭐가 되오? 대도위에게 죄가 있다면, 분연히 일어나 우리 기탄의 분열과 멸망을 막은 것뿐이오. 그걸 어찌 죄라 할 수 있소?”

“맞소이다. 나도 그리 생각하오. 대도위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큰일이 벌어졌을지…….”

구림 칸의 말에 절도 칸이 거들며 나섰다.

“나 역시 여러분과 같은 생각…….”

순간, 막계 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대칸의 중앙군을 이끄는 대도위를 죽이려 한 주제에 무슨 낯이 있어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오?”

“맞소이다. 대칸께선 일찍이 자신의 군대를 건드리는 건 곧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하셨소. 엄밀히 말하면 절도 칸 역시 대칸께 반역을 한 중죄인이나 다름없소.”

“저, 이보시오. 그, 그게…….”

살벌한 분위기에 밀린 절도 칸이 변명을 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하투 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부족한 내 아들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어 정말 감사하오. 그럼 이것으로 리안의 죄는 묻지 않는다, 결론지어도 되겠소?”

절도 칸을 제외한 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시급한 건 다음 대칸을 정하는 일이오. 무림제의 마지막 날, 왕족 회의 결과를 백성들에게 알릴 때. 그때 새 대칸을 발표하고 추대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옳은 말이오. 황궁에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이미 모든 백성이 알고 있는데, 합당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것이오.”

“맞소이다. 돌아가신 대칸의 장례를 진행하고 황궁 친위대의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새 대칸을 선출하는 것이 시급하오.”

“그럼 다음 대칸은 누구로 정하는 게 좋겠소?”

하투 칸의 질문에 막계 칸이 물었다.

“그러는 하투 칸은 다음 대칸으로 누굴 생각하시오?”

“다행히도 돌아가신 대칸께는 황손이 계시오. 하나 그 나이가 너무 어려 황위를 잇긴 어렵다 생각하오. 그러니 대칸의 아우이신 차뉴 칸께서 차기 대칸이 되시는 것이…….”

“나 역시 찬성이오. 황손은 대칸의 손자가 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죄인인 태자의 자식도 되오. 나 역시 황손보다는 차뉴 칸이 대칸이 되는 게 도리에 맞다 생각하오.”

“나도 같은 생각이오. 어린 황손으로는 당장 당황하고 놀랐을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는 무리요.”

하투 칸이 차뉴 칸을 바라보았다.

“절도 칸을 제외하고 남은 칸들의 생각이 모두 같으니 이로써 차기 칸은…….”

“아니. 사양하겠소.”

뜻밖에도 당사자인 차뉴 칸이 거절을 하고 나섰다.

“이제 형님도 안 계시고 태자도 없으니…… 내가 이 말을 한다 해도 형님께 누가 되지는 않겠지.”

후. 긴 한숨을 내쉰 차뉴 칸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 대도위에게 왜 발씨란 성을 하사하신 줄 아시오?”

차기 대칸을 거론하는 도중 다시금 튀어나온 발리안의 이름에 모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형님이 대도위를 총애했다 생각하겠지만……. 사실 형님은 대도위를 누구보다 아끼는 동시에 두려워했소.”

“대칸께서 대도위를 두려워하다니 무엇 때문에 말이오?”

“그건…….”

차뉴 칸이 잠시 숨을 골랐다.

“죽은 선대 천군의 예언 때문이오. 선대 천군은 죽기 직전, 형님의 뒤를 이을 후계에 대해 일러 주었소.”

“…….”

“형님이신 대칸의 뒤를 이어 차기 대칸이 되는 자는 기탄 역사상 유일무이한 타르칸(위대한 황제)이 될 것이라 했소. 기탄은 그를 통해 가장 너른 영토를 이룰 것이라고도.”

차뉴 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자는 나도 아니고, 태자인 발타고도 아니었소. 황손인 발도근은 더더욱 아니오. 왜냐하면…… 그는 무부무성인 자라 했으니까.”

무부무성. 아비도 성도 없다……. 그 말에 누구보다 경악한 사람은 하투 칸이었다. 그게 누구를 이르는 말인지 눈치채지 못할 자는 여기 아무도 없었다.

“서, 설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하투 칸을 두고 차뉴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선 대도위가 차기 대칸이 되는 걸 막으려고 성을 하사하신 거요. 아무리 못나고 부족해도 어떻게든 발타고에게 황위를 잇게 하고자……. 대도위를 그의 사람으로 붙여두려 하신 것이오.”

“그럴 수가…….”

모두가 경악으로 말을 잃었다.

“하지만 다들 보아 알잖소? 발타고의 그릇이 어떤지. 최근 급격히 쇠약해지신 형님은 고민이 많으셨소. 이제야말로 기탄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차뉴 칸이 침통한 얼굴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형님은 끝내 발타고를 버리지 못하셨소. 대신 대도위를 혼인시켜 칸으로 삼고 가장 좋은 영지를 하사하려고 하셨소. 부디 발타고를 끝까지 잘 보필해 달라 부탁하기 위해서.”

“…….”

“아무리 기탄의 대칸이라 해도 형님 역시 아비였던 게요. 하지만 결국…… 제 아비의 깊은 사랑을 헤아리지 못한 자식놈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소.”

“…….”

“이제야 알겠소. 형님은 아들인 발타고를 위해 대도위를 발씨로 만들었지만, 그건 다 하늘의 뜻이었던 게요. 지금의 대도위는 황손이나 나와 다름없는 황족이며 엄연한 대칸의 아들이니 말이오.”

차뉴 칸이 모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보다 더…… 대칸의 자리에 어울리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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