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다시 만난 연인 2
* * *
“그 무딘 호독니 천장까지 알고 있던데 오라버닌 몰랐어?”
산시가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시타가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야! 니, 니들도 알고 있었냐?”
“어.”
“그런데?”
뜻밖의 반응에 시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호독니 천장한테서 들었다.”
“맞아. 숙영지에서 포위당했을 때, 그때 천장이 그랬다. 대장과 효령일 닮은 꼬맹일 못 보고 죽는 게 서운하지만, 두 사람이 무사하니 그것으로 됐다고.”
“죽을 때 죽더라도 멋지게 싸우다 죽자고도 했지. 나중에라도 우리 대장 쪽팔리지 않게.”
코끝이 시큰해진 다와가 얼른 코를 훔쳤다.
“암, 그 정도는 돼야 우리 왕자님 군사들이지. 호독니도 이젠 제법 천장 티가 나네.”
그 곁에서 시타가 망연자실 중얼거렸다.
“세상에. 남들이 다 알도록 대장의 최최최측근인 내가 그 사실을 모르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그가 죄 없는 교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럼 넌? 너도 알고 있었냐? 효령이가 여자라는 거?”
옆에서 산시가 해주는 설명을 들은 교기가 시퉁하게 반응했다.
“당연하지. 내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그렇게 고운 분을 두고 여자인 걸 몰라보다니. 너처럼 둔한 놈은 처음이다. 그래도 너무 충격받지 마라. 대장도 너만큼이나 둔한 것 같으니까.”
산시가 그들의 대화 틈으로 끼어들었다.
“맞아. 제일 둔한 사람은 왕자님이라니까. 매일 데리고 주무시면서도 효령이가 여자란 걸 모르시다니. 도대체 언제 아신 건지 모르겠지만 축제 때까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다고.”
“하, 다행이다!”
도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시타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차피 이놈들도 호독니 천장이 아니었으면 전혀 몰랐을걸? 둔탱이인 건 이놈들도 마찬가지라고. 야, 사실대로 말해 봐. 너희들도 그동안 효령이가 여자란 거 짐작도 못 했지? 안 그러냐?”
“아니 난…… 처음에 딱 보고 알았다. 솔직히 효령이가 좀 많이 예쁘잖냐?”
한 녀석이 하는 말에 다른 동료가 콧방귀를 뀌었다.
“거짓말 작작 해라, 인마. 효령이 보고 사내놈이 계집애도 아니고 너무 곱상해서 재수 없다고 한 놈이 누군데?”
“내, 내가 언제? 그러는 너야말로,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놈들이 알고 보면 다 변태라며? 저런 비실비실한 놈들이 뒤로는 여잘 더 밝힌다고.”
“야, 이놈들아. 쓸데없는 걸로 싸우지 마라. 그보다 난 정말 신기하다. 세상에 우리 대장이 모르고 지나는 게 있다니.”
“그러게. 그러고 보면 우리 대장, 생긴 거하고 다르게 참 순진하다니까. 안 그러냐?”
“맞아. 우리 대장, 너무 인간적이야. 정말 감동이다.”
그들이 아주 이상한 지점에서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산시가 어이없어 혀를 찼다.
“이런 바보들!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요. 왕자님이나 그쪽이나 그렇게 둔하니까 다들 이제껏 장가를 못 간 거야. 여자 손이라도 잡아 보고 죽으려면 적어도 눈치코치는 있어야지.”
발리안과 효령이 밖으로 나오기까지 산시의 잔소리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 * *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황궁의 정비를 마친 칸들과 연제준, 그리고 각 부족의 세자들과 좌우 장군이 모두 회의장에 모였다.
좌장군과 우장군이 좌정한 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데려온 외곽 수비군들로 주도 전체의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주도 밖 군사들도 명이 있을 시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채비를 마쳤습니다.”
갑옷을 입은 채 한쪽에 서 있던 연제야가 말을 이었다.
“현재 황궁의 수비는 제가 데려온 천여 명의 구림 부족 군사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연제준이 무거운 얼굴로 칸들을 바라보았다.
“발리안이 7황비마마의 처소에서 대칸의 시신을 발견하여 정중히 모셨습니다. 대칸께서는 칼에 등을 찔리셔서 돌아가셨답니다.”
“형님께서 7황비의 처소에서 돌아가시다니? 그럼 7황비가 형님을?”
대칸의 동생인 차뉴 칸이 비통한 얼굴로 물었다.
“아뇨. 급소를 정확히, 그것도 단칼에 깊이 찔리신 것으로 보아 태자께서 저지르신 일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궁녀들 말이…….”
“…….”
“일찍부터 태자와 7황비마마께서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오셨다고. 아무래도 두 분 사이를 대칸께 들킨 것 같습니다.”
“하, 태자가 7황비와?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현재 7황비마마는 종적이 묘연합니다. 난리 통에 목숨을 잃으신 것인지 아니면 몸을 피하신 것인지. 발리안의 수하들이 지금 그분을 찾고 있습니다.”
“그럼 황후마마는?”
연제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손자이신 황손께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앵속을 과도하게 드신 듯싶습니다.”
“뭐라, 앵속? 그, 그럼…….”
경악하는 차뉴 칸을 향해 연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다른 두 황자님의 죽음에 황후마마께서 연관되신 것 같습니다. 대칸을 모시던 단사관과 호위들 역시 황후마마 수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절도 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급히 끼어들었다.
“내 딸……, 내 딸은 어찌 됐나? 혹 내 딸 소식도 들었나?”
“송구합니다. 태자비께서는 누군가의 검에 베여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궁녀들이 그 시신을 수습 중에 있습니다.”
“……!”
절도 칸이 말을 잃고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적에겐 자비가 없어도 가족만은 끝까지 지키는 것이 우리 기탄 사람들이건만. 황궁 안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벌어지다니.”
차뉴 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제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들 마음이 아프신 중에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지금 황궁 안 친위대들이 한곳에 모여 칸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어찌할 것인지 의견을 주십시오.”
아까부터 대칸의 빈자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하투 칸이 연제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전에 자넨 어떻게 우리가 위험한 걸 알고 황궁에 온 것인가. 그 경위부터 설명해 보게, 세자.”
“예, 하투 칸.”
연제준이 차분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 태자께선 군사들을 보내 파음에서 리안을 죽이려 하셨습니다. 그 일에는 저기 계신 절도 칸과 황후마마도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뭐? 절도 칸이?”
남은 칸들이 놀란 얼굴로 절도 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당황한 절도 칸이 손을 휘저었다.
“그, 그게…… 나도 원해서 한 일이 아니오. 황후마마께서 시키셔서 어쩔 수 없이…….”
하투 칸이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절도 칸의 죄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그래서 어찌 되었나?”
“황후마마와 절도 칸께서 우리 구림 부족의 양해도 없이 저희 영지에 많은 군사를 들인 걸 두고 리안은 곧 황궁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전조라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
“절도 칸께서 우리 구림 부족과의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대담한 일을 벌이셨을 리 없다고요. 특히 배후에 계신 황후마마라면 분명 이후의 대책까지 세워두셨을 거라면서요.”
“…….”
“그러면서 부족 간의 충돌을 하찮은 일로 만들 만큼 큰일은 대칸의 유고나 서거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 누이가 태자 전하와 절도 칸의 수하들을 모조리 붙잡았으니…….”
“…….”
“그 일을 덮기 위해서라도 우리 구림 부족, 특히 저희 아버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하여 제 누이가 그 사실을 알리려 제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는 것처럼…….”
연제준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안의 염려는 끝내 현실이 되었습니다.”
* * *
겨우 이백의 군사들로 아버지와 칸들을 구하고 태자, 황후와 맞서야 하는 상황.
너무도 다급하고 절박한 순간임에도 연제준에게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다. 무작정 황궁에 쳐들어갔다가는 아버지를 구하기는커녕 자신들마저 헛되이 개죽음을 당할 터.
거기에 당장 공격당할 위기에 처한 발리안의 수하들은 또 어찌한단 말인가.
손에 땀이 나도록 초조해진 연제준이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빌었다.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지? 리안. 제발 네놈의 지혜를 좀 빌려다오.’
바로 그때, 한 군사가 놀란 얼굴로 연제준을 향해 외쳤다.
「저, 저하. 저기…… 저기 좀 보십시오.」
「……!」
그가 가리키는 곳을 향한 연제준의 눈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졌다.
맙소사!
해를 등지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말 한 마리. 청량한 아침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발리안이었다.
「리안!」
너무도 기쁜 마음에 연제준은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말에서 내리기 무섭게 발리안은 연제준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리안, 리안!」
그러고 보니 발리안은 이마에 천을 동이고 있었다. 거기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리안.」
하아, 하아. 대답 대신 발리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무, 물 좀…….」
그 곁에 있던 연제준의 수하가 유주가 담긴 가죽 부대를 내밀었다.
벌컥, 벌컥. 발리안은 숨도 쉬지 않고 유주를 들이켰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리안? 너 혼자냐? 연제야는? 같이 온 거 아니었어?」
「그게…….」
구림의 왕궁에서 눈을 떴을 때. 발리안은 자신이 꼬박 이틀을 기절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칸과 칸들, 효령과 자신의 수하들이 위험에 처한 와중에 한가하게 정신이나 놓고 있다니.
「부탁이 있습니다, 공주님. 제게 말 좀 빌려주십시오.」
발리안은 부상을 입은 도도 대신 연제야의 말을 빌려 타고 이곳까지 달려왔다.
쓰러져 있는 동안 헛되이 버린 시간을 줄이고자 지난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않은 채였다.
그로서는 연제야와 구림의 군대가 준비를 마칠 동안 기다리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곧 공주님께서 군사들을 이끌고 도착하실 게다. 발타고 형님은 지금 어쩌고 있나? 아는 게 있으면 모두 말해라.」
당장 쓰러질 듯 벌건 눈을 하고도 발리안은 쉬기는커녕 연제준을 재촉했다. 연제준과 시타가 번갈아 가며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미안하다. 내 군사들 만으론 황궁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렵다. 도무지 무얼 어찌해야 좋을지. 아무래도 내 누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멍청한 소리 작작 해라. 그러다 모두 죽는다.」
남은 유주를 머리에 부어 정신을 차린 발리안이 날 선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