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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91화 (91/116)

91화. 다시 만난 연인 1

* * *

“그만 멈추십시오, 형님.”

마치 저승에서 들여오는 것 같은 서늘한 목소리.

발타고와 효령의 눈이 동시에 문을 향했다.

“발리안!”

“대, 대장!”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그는 분명 발리안이었다.

그를 발견한 효령의 눈에서 안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부르기 전까진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밖을 향해 소리친 발리안이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발타고가 그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래, 잘 왔다, 이놈. 천신께서 마침내 내 소원을 들어주셨구나.”

약효를 능가하는 증오 때문일까. 발타고는 발리안을 제대로 알아보았다.

“모든 게 다 끝났습니다. 그만하십시오, 형님.”

“누구 마음대로!”

발타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내 앞에 있고, 네 계집이 내 손 안에 있는데 끝나긴 뭐가 끝나?”

비소를 지은 발타고가 효령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이 순식간에 발타고의 손안에 그러쥐어졌다.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그땐 이 계집의 숨통을 끊어 놓을 테다.”

발리안이 분노를 삼키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이건 우리 둘의 싸움입니다. 효령은 이 일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놓아주십시오.”

“내가 왜 이 계집을 놓아준단 말이냐? 누구 좋으라고?”

“형님!”

발리안의 미간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부디 제가, 제 손으로 형님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주십시오.”

“뭐? 누가 누굴 죽여? 겨우 대도위 놈 따위가 태자인 날 죽이다니, 네놈이 반역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것이냐?”

“아뇨. 설사 제가 형님을 죽인다 해도 그건 반역이 아니라, 대칸을 시해한 죄인을 처단하는 것뿐입니다.”

“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발타고가 효령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효령의 비명은 아예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가슴을 가리고 남은 한 손으로 발타고를 수도 없이 때리며 밀쳤다. 그러나 발타고는 보란 듯 끝까지 제 욕심을 채웠다.

“……!”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발리안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쾅.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진 발리안이 성큼성큼 침상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그냥 당할 발타고가 아니었다. 그는 잽싸게 효령을 떼어 내며 다시금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멈춰라, 발리안. 이 계집이 내 손에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흠칫. 발리안이 그 자리에 멈췄다. 발타고가 교활하게 웃었다.

“네놈이 왜 이 계집을 아끼는지 알 만하다. 겉보기보다 훨씬 더 단 입술이로구나. 품는 맛은 더 좋을 테지. 그러니 너같이 매정한 놈이 환장하고…….”

순간, 발리안이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눈 감아, 효령아.”

제 말을 무시하는 발리안 때문에 발타고의 화가 머리끝에 달했다.

“발리안!”

그러나 발리안은 거기 반응하는 대신 효령에게 외쳤다.

“당장 눈 감으래도!”

‘대, 대장.’

목이 눌려 대답을 할 수 없는 효령이 그의 말대로 질끈 눈을 감았다.

“발타고. 정말 네놈은 끝까지 어리석구나.”

발리안이 이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외사촌 형님이라고 내가 봐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발에 채는 말똥보다 못한 너 같은 놈은 진작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했어.”

“……!”

“한데 내가 왜 오물이나 다름없는 알량한 네놈을 이제껏 참아줬는지 아나? 네놈이 무서워서? 아니면 황후마마가 두려워서?”

발리안이 몰아치듯 말을 쏟아 놓았다.

“난 은혜는 마음에 기리고 원한은 뼈에 새긴다. 은혜도 원한도 반드시 그 열 배로 갚지. 네놈이 오늘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

“내게 한없이 너그러우셨던 네놈의 아버지, 대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더는 내가 네놈을 봐줘야 할 이유가 없지. 대칸을 죽인 순간, 넌 스스로 네 무덤을 판 셈이다.”

“…….”

“이제 와 네놈이 죽는다 해도, 천신께서도, 대칸께서도 널 외면하시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잘 가라, 발타고.”

“네 이놈 발리안!”

발타고가 미치광이처럼 눈을 부릅떴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그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이 때려죽일 놈. 오냐,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라. 그런다고 내가 혼자 죽을 줄 아느냐? 적어도 네놈의 계집만은…….”

“꿈 깨라. 난 효령일 너 아닌 어떤 놈에게도 빼앗길 생각이 없으니까.”

“그게 네 뜻대로 될 줄……!”

흐윽.

발타고는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당장 효령을 죽이려던 그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순식간에 그의 검은 눈동자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허연 흰자가 드러났다. 효령의 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예 그의 몸이 기우뚱,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재빨리 침상으로 다가간 발리안이 효령을 끌어안았다.

“효령아.”

그의 말과 동시에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발타고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공을 향해 눈을 부릅뜬 그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언제 날아왔는지 모를 발리안의 단검이 꽂혀 있었다.

“대, 대장……!”

그제야 눈을 뜬 효령이 발리안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흐느끼는 그녀의 몸 아래로, 다 늦게 매듭이 풀어진 천이 흘러내렸다.

재빨리 허리띠를 푼 발리안이 자신의 옷자락으로 환히 드러난 그녀의 등을 감쌌다.

“늦어서 미안하다.”

“대장, 대장…….”

효령은 마치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대장을 외치며 울먹였다.

“그래, 나 여기 있다.”

발리안이 커다란 손으로 연신 품에 안은 효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장. 그날 파음에서……. 그때 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나 다시는 대장을 못 보게 될까 봐 너무나 무서웠어요. 내 마음을 영영 전하지 못하게 될까 봐, 다시는 대장 앞에 설 수 없는 몸이 될까 봐 너무나 두려…….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하는 효령의 마음이 눈물이 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그걸 알기라도 하듯, 발리안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말 안 해도 알아. 사랑한다, 효령아.”

“……!”

발리안의 얼굴이 효령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나로 겹쳐진 두 개의 입술이 애타게 서로를 구했다.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만난 대지처럼. 마음을 적시는 숨결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진한 사랑의 탄성이 몇 번이고 공기를 뒤흔들도록 두 사람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대장, 왜 이렇게 안 나와요? 안에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서, 설마 대장! 대장 정말 괜찮아요? 살아 있는 거 맞죠? 대장……!”

다급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간,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

그러나 쾅. 이내 문이 닫혔다.

허억!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 시타가 비틀거리며 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시타?”

다와가 놀란 얼굴로 시타를 다그쳤다.

효령을 구하겠다고 뒤늦게야 도착한 그들은 동료들로부터 발리안이 먼저 와 안에 들어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발리안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지 오래.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걱정이 된 시타가 말리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덥석 문을 연 것이었다.

그런데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시타가 말을 잃고 멍하니 얼어붙었다.

대장과 효령이 친밀한 사이라는 걸 알긴 했지만, 그건 저나 다른 녀석들이 대장을 좋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둘이 저렇게 심각한 관계였을 줄이야.

“어떡하지? 크, 큰일 났어요, 다와.”

시타가 가슴을 움켜쥐며 겨우 입을 열었다.

“큰일이라니, 무슨? 설마 왕자님이 다치시기라도 한 거야? 아님, 효령이?”

시타가, 화들짝 놀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다와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니 그게 대장도, 효령이도 무사한데…… 지, 지금 두, 둘이…… 두 사람이…….”

“두 사람이 뭐?”

속이 탄 산시가 시타를 재촉했다. 주변을 둘러싼 동료들도 그를 재촉했다.

“빨리 말해, 인마. 사람 숨넘어간다.”

“그래, 어서 말 좀 해 봐. 대장과 효령이가 어떻게 됐다고?”

“그, 그게……. 다들 놀라지 마요. 지금 둘이……, 두, 둘이…….”

“아, 글쎄 둘이 어쨌다는 건데? 에잇, 차라리 내가 보고 와…….”

시타가 발을 떼려는 산시의 팔을 붙들었다.

“말해, 말한다고. 에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대장이 지금 효령이와 입, 그러니까 이, 입을…….”

산시가 시타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난 또 뭐라고. 지금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단 거잖아? 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괜히 사람 놀라게.”

너무도 시들한 반응에 시타가 벙한 표정을 지었다.

“산시 너…… 대장이랑 효령이가 입을 맞추고 있다는데, 그것도 아주 못 봐줄 만큼 진하게 쪽쪽 빨고 있다는데 아, 안 놀라?”

“아니, 사랑하는 남녀가 입을 맞추는 게 당연하지, 뭐 그렇게 신기한 일이라고. 우리도 걸핏하면 입을 맞추잖…… 엄마야!”

말을 하다 말고 제 실수를 눈치챈 산시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다와는 물론이고 다른 동료들까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째려보았다.

‘야, 그 말을 지금 여기서 하면 어떡해?’

식은땀이 난 시타가 얼른 다와 앞에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요, 다와. 진작 말을 하려고 했는데…… 대장 일도 있고 사정이 그래서……. 저, 정말, 정말 잘못했어요, 다와.”

있는 대로 미간을 구긴 다와가 무서운 기세로 시타 앞으로 다가왔다.

히익. 겁에 질린 시타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다와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왕자님께 고마워해. 왕자님과 효령이가 무사한 기념으로 허락해 주는 거니까. 만약 내 딸을 울리면 그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그녀가 시타의 눈앞으로 주먹을 들이밀었다. 시타가 냉큼 그 주먹을 붙들었다.

“거, 걱정 마요, 다와. 난 평생 산시에게 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테니까. 근데……?”

시타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대장이 효령이와 입을 맞추고 있다는데, 대장이 사내를 좋아한다는데 다들 왜 이렇게 시큰둥…… 에에?”

그제야 산시가 발리안과 효령을 두고 ‘사랑하는 남녀’라고 한 것을 떠올린 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사, 사랑하는 남녀라니? 설마 효령이가 여, 여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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