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역변 2
* * *
“거기 산시 있니?”
“어, 어머니?”
뜻밖의 부름에 산시의 눈이 커다래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와였다. 재빨리 감옥 문으로 다가온 그녀가 산시가 있는 옥사의 문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여긴 어떻게?”
“이야긴 나중에 하고 서둘러.”
다와가 교기가 갇힌 곳의 문을 여는 사이, 먼저 계단을 올라간 산시가 밖을 살폈다.
“시타 오라버니!”
밖에는 시타와 몇몇 동료들이 기절한 군사들을 묶고 있었다. 산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시타가 물었다.
“교기는?”
“나 여기 있다!”
막 감옥 문을 빠져나온 교기가 대답했다.
산시가 어머니 다와의 팔을 붙들었다.
“당장 태자 전하의 처소에 가야 해요. 효령이가 거기 붙잡혀 있어요.”
“어쩐지 효령이만 안 보인다 했더니. 지름길을 안내할 테니 모두들 나를 따라와라.”
다와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 * *
마침내 회의장 밖을 지키던 친위대가 무너졌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가운데 남은 자들이 칼을 버리며 항복했다.
연제준과 그 군사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회의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항복해라. 이미 진 싸움이다! 태자 전하와 부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다 거짓이다. 대칸께 위해를 가한 자는 리안이 아니라 태자 전하 본인이시다.”
연제준이 말을 이었다.
“대칸을 모시는 친위대라는 놈들이 그런 태자에게 빌붙어 무고하신 칸 전하들을 죽이려 들다니.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칼을 버리는 자에게는 더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하나…….”
연제준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끝까지 저항하는 놈은 내 손으로 직접 목을 벨 것이다.”
챙그랑.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친위대 군사가 칼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잖아도 부대장님 말을 믿기 어려웠는데…… 죄송합니다, 저하.”
“송구합니다. 저하.”
“저희도 이럴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챙그랑. 챙그랑.
그를 시작으로 다른 군사들도 하나둘 칼을 버렸다. 평소 존경하던 칸들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 역시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깊은 밤, 느닷없이 대칸과 친위대 대장의 부고를 전해 들은 까닭에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워낙 경황이 없어, 전적으로 태자와 부대장의 말에 휘둘려 움직인 상황이었다.
당황한 부대장이 수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 네놈들! 당장 칼을 집지 못하겠느냐? 태자 전하의 말씀 못 들었느냐? 대칸과 친위 대장을 죽인 건 대도위…….”
“죽은 후 시신이라도 온전히 부지하고 싶으면 그만하는 게 좋을 거요, 부대장.”
연제준이 칼을 들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궁지에 몰린 부대장이 재빨리 눈을 굴렸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보려 애쓰는 그의 머리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날아와 부딪쳤다.
털썩. 벌인 짓에 비하면 어이없게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 하투 칸이 그를 내려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겨우 이딴 놈이 친위대 부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니.”
연제준이 남은 친위대에게 외쳤다.
“다들 밖에 나가 대열을 갖추고 새로이 명이 내려지기까지 대기하라. 궁 안이 정리되는 데로 너희들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세자 저하.”
고개를 숙여 보인 친위대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구림 칸이 죽다 살아난 얼굴로 연제준에게 다가왔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 역시 내 아들이로구나.”
다른 칸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네, 세자. 그대가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개죽음을 당할 뻔했네.”
“우리가 세자에게 큰 빚을 졌구먼.”
“자네가 제때 와 주어 정말 다행이네.”
하투 칸이 연제준을 향해 말했다.
“정말 자네의 지혜와 용기에 탄복했네. 그 적은 군사로 우릴 구하다니. 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이 일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칭찬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연제준이 하투 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하투 칸 전하.”
“자네. 그, 그 말은…….”
하투 칸의 얼굴이 햇살처럼 환해졌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드릴 테니 다들 저 좀 도와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황궁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제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금 제 누이 연제야가 주도 외곽을 수비하는 좌우 장군들을 설득해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사이에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알았네.”
하투 칸이 다른 칸들에게 말했다.
“다들 황궁 문을 하나씩 맡아 정리합시다.”
“어떻게 말이오?”
“백성들을 안심시켜 돌려보내고 그곳을 지키는 친위대들부터 설득해야 하오. 만약 각 부족 군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최소한만 들이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황궁 전체가 상하거나 파괴되는 일은 없어야 하오.”
“알았소.”
하투 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반항하는 친위대 군사들이 있을지 모르니 다들 조심하시오.”
“알겠소, 하투 칸. 서쪽 문으로 내 아들이 들어왔다 하니 그쪽은 내가 맡지요.”
막계 칸이 그를 거들었다. 구림 칸도 나섰다.
“난 동쪽을 맡겠소.”
하투 칸이 차뉴 칸을 향해 말했다.
“그럼 난 정문을 맡을 테니 차뉴 칸은 절도 칸과 함께 북쪽을 맡으시오.”
“그럽시다.”
절도 칸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 염려 마시오. 내 이번만은 차뉴 칸을 도와 제대로 해낼 테니.”
그제야 연제준이 안심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여러 칸 전하들만 믿고 태자 전하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러게. 어서 가 보게. 우리도 서두르지요. 일을 마치는 대로 다시 여기 모입시다, 그럼.”
연제준을 필두로 모든 칸들이 줄지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 * *
헉헉.
자신의 처소에 도달한 발타고가 숨을 몰아쉬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는 땀이 한가득이었다.
요희가 먹였던 각성제의 효과도 떨어져 다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던 군사들도 몇 개의 문을 지나치는 사이 현격히 줄었다. 대칸의 친위대들은 떨어져 나가고 남은 자라고는 평소 그가 거느리던 수하들뿐이었다.
제기랄.
“7황비, 7황비! 일이 틀어졌다. 어서 나와……!”
거칠게 처소의 문을 열어젖히던 발타고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요희는 간데없고 그녀가 아무렇게나 벗어 둔 침의만이 침상 아래 흩어져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순식간에 발타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상황인지 족히 짐작이 갔다. 밖에 난리가 벌어졌다는 걸 안 요희가 이미 몸을 피한 것이었다.
‘기다리겠다고 했으면서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혼자서 어디로 간 거냐고!’
당황한 그의 시선 안으로 침상 저만치에 널브러져 있는 그림자가 들어왔다. 아까 요희 손에 맡겨 두고 간 발리안의 수하, 효령이었다.
발타고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봐. 7황비는 어디 갔나? 어디 갔……!”
반강제로 효령을 일으켜 세우던 그가 멈칫하여 동작을 멈췄다.
어깨 밑으로 끌어 내려진 옷 때문에 천으로 칭칭 동여맨 효령의 가슴이 보였다.
‘이놈이 여, 여자였다고? 설마……!’
발타고의 눈앞으로 축제 때 발리안이 그녀와 다정히 춤을 추던 모습이 스쳐 지났다.
어쩐지. 연인끼리 추는 춤의 상대로 사내놈을 선택한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만.
놀란 발타고의 눈이 다시금 효령의 가슴으로 향했다. 희미하지만 그 주변에 발리안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사랑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발타고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이젠 다 끝났다 포기하려던 참인데. 한 줄기 희망이 비쳤다.
‘적어도 발리안 네놈에게 복수는 하고 죽을 수 있겠구나.’
거기 생각이 미치니 불안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래. 7황비도 달아나고 어머니는…….
발타고는 황후에게 가려던 생각을 접었다. 자신을 찾는 놈들이 이곳보다 먼저 가 볼 곳이 바로 거기였다.
어머니는 지금 어쩌고 있을까. 그녀 스스로 차뉴 칸과 절도 칸마저 저버린 바람에 더는 그들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그녀도 살아남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어차피 이렇게 끝날 바에야 발리안 놈이 나타나 주면 좋으련만. 그래야 그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며 웃으며 죽을 텐데…….
반쯤 넋이 나가 실실거리는 발타고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이 보였다. 요희가 그를 위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것이었다.
“7황비가 두고 간 건가? 하, 정말 기가 막힌 선물이로군.”
웃으며 탁자로 다가간 그가 병을 들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코와 혀가 톡 쏘이는 느낌이 들면서 목구멍이 싸해졌다. 이내 술기운이 퍼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시끄러운 바깥소리도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 막히던 긴장감 대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면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일렁였다.
술병을 내려놓은 발타고가 겉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효령을 안아 침상으로 데려갔다.
쫘아악.
그는, 반쯤 벗겨진 채 거추장스럽게 걸려 있는 효령의 옷을 아예 찢어버렸다. 그녀의 몸을 묶고 있던, 걸리적거리는 밧줄도 치워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가슴을 동여맨 천으로 손을 뻗었다.
“……!”
살에 닿는 선득한 느낌에 퍼뜩, 효령의 의식이 돌아왔다. 지금 막 나락에서 올라온 야차와 같은 섬뜩한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악!”
놀란 효령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쳐냈다. 워낙 급작스러운 공격이었던 탓에 발타고가 비틀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이년이……!”
발타고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술 속에 든 치사량에 가까운 앵속 때문이었다.
앵속 중독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지금 발타고에게는 일말의 이성도 양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오직 요희와의 잠자리에서 느꼈던, 극도로 짜릿했던 쾌감뿐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쉰 그가 달아나려는 효령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녀를 험하게 침상 위로 쓰러뜨렸다.
“곧 너도 좋아 소리를 지르게 될 게다.”
다리로 효령의 몸을 짓누른 발타고가 가슴을 가린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떼었다.
“놔요. 이거 놓으란 말이야!”
효령은 발타고를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그의 힘을 당해내기는 무리였다.
몇 번이고 칭칭 동여맸던 천의 매듭이 뜯기면서 눌려있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발타고가 짐승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거기 손을 뻗은 순간.
쾅. 요란하게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