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역변 1
* * *
거만한 목소리와 함께 발타고가 회의장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대칸을 지척에서 호위하는 친위대의 부대장이 따라 들어왔다.
“잘 왔소, 태자. 한데 대칸은 어찌 안 보이시는 것이오? 그리고 부대장은 여기 왜…….”
발타고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께선 못 오십니다. 간밤에 잔악무도한 놈에게 피습을 당해 돌아가셨거든요.”
대칸의 아우이자 발타고의 숙부인 차뉴 칸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피, 피습이라니? 태자, 그게 무슨 말이오? 대체 누가?”
“대도위 발리안의 짓입니다.”
“말도 안 돼오!”
하투 칸이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리안은 지금 일이 있어 먼 곳에 갔소. 그런 리안이 대칸을 죽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태자.”
구림 칸이 그를 거들고 나섰다.
“맞소이다. 대칸께서 대도위를 그리 신임하고 아끼시는데 대도위가 대칸을 해치다니. 누가 그 말을 믿는단 말이오?”
“태자.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오. 대도위는 절대 그럴 사람이…….”
발타고가 막계 칸의 말을 끊어버렸다.
“역시…… 이럴 줄 알았습니다.”
비소를 날린 그가 섬뜩한 눈으로 칸들을 쏘아보았다.
“내가 모르는 줄 아십니까?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발리안 그놈과 손잡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뭐, 뭐요?”
“태자!”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어서 작별 인사라도 할까 해서 왔는데……. 역시 괜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발타고가 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 역도들을 처단하지 않고!”
순간, 친위대 부대장의 뒤로 와르르 군사들이 몰려 들어왔다.
챙, 챙, 챙.
칼을 뽑아 든 그들이 삽시간에 칸들이 앉은 탁자 주변을 에워쌌다.
“지금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오, 태자?”
차뉴 칸이 미간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발타고가 그를 향해 선득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숙부님. 숙부님께 정말 실망했습니다. 유주에 독을 넣어 아버지를 죽이려 하시다니. 하늘에서 아버지를 만나거든 부디 잘못했다 비시길 바랍니다.”
“태자!”
어이가 없어 목소리를 높이는 차뉴 칸을 밀치고 절도 칸이 앞으로 나섰다.
“태, 태자. 자, 장난 그만 치시오. 설마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은 아니지요? 당장 황후마마를 불러주시오, 당장.”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하니 발타고가 숙부인 차뉴 칸과 외사촌 형인 자신까지 죽이려 들 줄이야. 이건 말이 안 됐다.
“황후마마라니. 어머니 말씀이신 모양인데 이젠 태후마마라고 불러야지요. 이런 말 미안하지만 형님. 대칸을 시해한 죄인은 그게 누구라도, 설사 형님이라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이 어머니라 사정을 봐 드리긴 어렵겠습니다.”
발타고가 마치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이죽거렸다.
“그리고 태자비 말인데……. 가시는 김에 같이 데리고 가십시오. 그동안 형님을 닮은 그 못생긴 얼굴을 참아주느라 여간 비위가 상한 게 아닙니다.”
“태자……!”
절도 칸의 얼굴이 경악으로 창백해졌다.
“그럼 다들 안녕히 가십시오.”
발타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친위대들이 칸들과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젠장!”
“비, 빌어먹을!”
끼이익, 끼이익. 탁자와 의자가 밀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어느새 칸들은 너른 회의장의 한쪽 구석으로 몰렸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절도 칸이 급기야 손을 모으고 애원했다.
“이, 이보게, 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나 절도 칸일세. 태후마마의 조카란 말일세. 내가 대칸을 죽이다니. 말도 안 되네. 그러니 제발, 제발 나 좀 보내주게. 절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니…….”
“이보시오, 절도 칸!”
“그 입 다무시오.”
“당신이 그러고도 기탄의 칸이오?”
절도 칸을 향해 다른 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절도 칸은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제발 나, 나 좀 살려주게. 내 절대 자네들의 은공은 잊지 않을 것이니…….”
그러나 헛수고였다. 친위대들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물샐틈없이 칸들을 조여오고 있었다.
“오냐. 죽일 테면 어디 마음대로 해보아라.”
제일 먼저 하투 칸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비록 엄청난 열세이긴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회의장 안이 꽤 넓다 해도 실내인 까닭에 상대 군사들도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잘만 하면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터. 그사이 누군가 이 소란을 눈치채고 와주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 쉽게는 죽지 않을 것이니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게다.”
이내 막계 칸과 구림 칸, 차뉴 칸도 비장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타고가 친위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끝내지 않고.”
친위대들이 일제히 칼을 고쳐 쥐며 하늘로 쳐들었다. 순간.
챙챙챙.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
으아아아!
으악!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뜻밖의 상황에 발타고가 당황하여 눈썹을 꿈틀거리는 사이, 밖을 지키고 있던 친위대 군사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태자 전하. 지금 바, 밖에 구림의 군사들이…….”
“구림의 군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구림의 세자 저하께서 칸들의 안부를 확인해야겠다며 군사들과 함께…….”
“뭐라? 감히 황궁 안에 군사를 끌고 들어와? 연제준 그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발타고가 군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대체 황궁 문을 지키는 놈들은 뭘 했길래 그놈이 궁 안까지 들어오도록 막질 못했단 말이냐? 놈의 군사가 몇이나 된다고. 더는 봐줄 것 없다. 놈들을 당장 해치워라.”
“그, 그게 여의치가 않습니다.”
군사가 쩔쩔매며 대답했다.
“지금 황궁 밖이 난리가 났습니다. 누가 치는 것인지 계속해서 비상사태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말도 안 된다. 황궁 안 쇠북이 잠잠한데 북소리라니?”
“하지만 사실입니다. 대칸을 구해야 한다며 도끼며 활을 든 백성들이 잔뜩 궁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느라 궁 밖 수비를 맡은 친위대들이 애를 먹고 있습니다. 게다가…….”
“……?”
“다른 부족의 세자 저하와 군사들까지 모두 황궁 안으로 들어오려는 통에 그걸 막는 데만도 사람이 부족합니다.”
“뭐라? 놈들이 어찌 알고 이렇게 한꺼번에 들이닥친단 말이냐? 황궁에서 일이 벌어진 걸 어찌 알고?”
“그, 그건 저도 잘…….”
발타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또 다른 수하가 다급한 얼굴로 나타났다.
“크, 큰일 났습니다. 전하.”
“큰일이라니? 이번엔 또 뭐냐?”
“황궁과 마주 보고 있는 숙영지 쪽에 큰불이 났습니다. 가을이라 초지가 바짝 마른 탓에 잘못하면 주도 전체가 불바다가 될 지경입니다.”
“뭐야?”
“해서 대도위군을 포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모두 불을 끄러 갔습니다. 그 틈에 대도위군이 그만 숙영지를 빠져나와…….”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방금 그들이 구림 부족 군사들과 합세를 했습니다. 지금 그들 손에 죽어나는 친위대가 한둘이 아닙니다. 거기다 서쪽 문이 뚫려 막계 부족의 세자 저하와 그 군사들까지 궁 안에…….”
그가 목청을 높였다.
“혹시 모르니 나갈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회의장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더 늦다간 구림 부족의 군사들이 당장 여기로 치고 들어올 겁니다, 전하!”
당황한 건 발타고 만이 아니었다.
당장 칸들을 죽이려 들었던 친위대 군사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거렸다. 얼굴이 일그러진 발타고가 그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칸들을 죽이지 않고. 저들이 살아 있다간 너희들과 나, 우리가 죽는단 말이다. 어서 죽여라, 어서!”
이얏!
그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부대장이 칼을 들고 하투 칸을 향해 덤벼들었다.
“네 이놈!”
고함을 친 하투 칸이 두 손으로 그 칼날을 붙들었다.
둘이 막상막하의 힘으로 고전을 벌이는 사이 다른 친위대도 칸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칸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들이었다. 칼날을 피해 친위대의 배를 치고 턱을 올려붙이고,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고.
하투 칸과 차뉴 칸, 막계 칸이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이 구림 칸은 옆의 탁자를 집어 들어 군사들에게 던졌다.
“죽기 싫으면 움직이시오, 절도 칸!”
“……!”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절도 칸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는 의자며, 기물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안이 아수라장이 된 틈에 발타고는 몇몇 군사들의 호위 아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제길!”
밖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문을 뚫어라. 당장 들어가 아버님과 칸 전하들을 구해야 한다!”
저만치에서 연제준이 이백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회의장 앞을 막은 친위대 군사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 옆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들아! 그것밖에 못 하냐? 빨리빨리 죽여 없애란 말이다. 우리 대도위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제대로 보여주라고!”
호독니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발리안의 군대는 그 수하 하나하나가 최소한 백 명 이상의 몫을 해낸다더니. 기탄 제일이라 꼽히는 대칸의 친위대들이 그들의 칼날 아래 추풍낙엽처럼 목을 떨구고 있었다. 채 오십여 명도 안 되는 발리안의 수하들이 연제준의 군사들보다 서너 배는 많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실정이었다.
이 기세로 가다간 회의장이 뚫리는 것은 물론이고 곧 황궁 안도 그들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어서 서두르셔야 합니다, 태자 전하.”
‘비, 빌어먹을!’
발타고가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어머니 황후가 세운 계획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한데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당장 어디로 가야 하냐고?
당황한 발타고가 갈피를 잃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7황비 요희였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 일단 내 처소로 가자!”
요희를 데리고 어머니에게 가야겠다 결심한 발타고가 서둘러 자신의 처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황궁의 북쪽 가장 외진 곳.
땅속으로 난 문과 계단을 한참 지나야 나오는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일어나라, 산시.”
“……!”
산시가 퍼뜩 눈을 떴다. 캄캄한 곳에 내내 쪼그리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를 부른 것은 맞은편 감옥에 갇힌 교기였다.
“밖에 누군가 왔다.”
흐릿하게나마 그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산시가 바깥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소란이 벌어졌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꽤 여러 사람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만약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당장 우리 공자님을 구해야 해.”
“알았어요, 교기 오라버니.”
산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바짝 긴장한 사이, 끼이익 소리와 함께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곧 누군가 계단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