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폭풍 전야 6
* * *
“아뇨.”
효령이 요희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당신의 마음이 충성심일 뿐이라면 삭주에서 내게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요.”
“……!”
“형부 상서가 날 원한다는 건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나에게, 당신을 겁탈하려 했다는 애먼 죄를 씌워 죽이려고 했죠. 질투 때문에. 아닌가요?”
“지, 질투라니 말도 안 돼.”
“난 지금 당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안타까워 그러는 거예요.”
효령이 말을 이었다.
“형부 상서가 당신의 모든 걸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요? 당신이 그를 생각하듯 그도 당신을 생각해 주나요?”
“……!”
효령의 말에 요희가 말을 잃고 얼어붙었다.
“제 이익을 위해 자신의 여인을 다른 사내 품에 넘기는 사람. 끊임없이 당신 아닌 다른 여인에게 한눈을 파는 사람. 그런 사내를 위해 당신 인생을 바치는 거…….”
“…….”
“그래도 좋을 만큼 당신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냐고 묻는 거예요, 난……. 그런 사내 밑에서 당신이…… 안야국이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요희가 미간을 구기며 효령에게 다가왔다. 요희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그녀 스스로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진실이었다.
맹유천에게 있어 요희는 특별한 애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가 맹유천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잠자리에서와 그의 적을 해치울 때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굳이 요희를 불임의 몸으로 만들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시인하는 순간, 자신의 삶은 온통 헛된 물거품이 되어 버릴 테니까.
“그럼 당신처럼 이것저것 따지는 게 사랑인가요, 장공주님? 대가가 있어야만, 돌아오는 게 있어야만 하는 게 사랑이냐고요. 그래요, 난 어리석게도 나 아닌 다른 여자에게 목을 매는 사내를 사랑해요.”
요희의 눈이 사납게 번득였다.
“그게 뭐 어때서요? 내가 그분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이봐요.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세상엔 당신만을 아껴줄 좋은 사람이……!”
“그 입 닥치랬지?”
인내심이 바닥난 요희가 효령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게 다 누구 탓인데 멋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내 앞에서 주둥일 함부로 놀려?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그분께 꼬리만 치지 않았어도…….”
요희가 분에 가득 차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 사이엔 아무 문제 없었어. 너만 없었으면 그분은 나밖에 몰랐을 거야. 우리 사이를 망친 게 바로 너란 말이야.”
“…….”
“너와 발리안 사이라고 다를 것 같아? 너희 둘 사이는 흠 없고 영원할 것 같냐고.”
요희가 효령의 눈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기쁜 소식 하나 알려 주지. 네가 죽고 못 사는 발리안. 아무래도 살아 있는 거 같아. 아직 죽었단 소리가 없거든.”
“……!”
“하지만 넌 절대 그와 못 이어져. 왜인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살벌한 표정을 한 요희가 무시무시한 힘으로 효령의 옷을 잡아 내렸다.
순식간에 옷이 어깨 밑으로 내려가며 천으로 동여맨 가슴이 드러났다.
“지금쯤이면 발타고가 칸들을 모두 죽여 없앴겠지. 이 일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발타고는 내게 돌아올 거야. 그리고 나 대신 널 발견하겠지.”
요희가 다시금 효령의 머리채를 붙들었다.
“발리안이 끔찍이 아끼던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그가 과연 널 가만 놔둘까?”
요희가 악신처럼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발리안이 널 구하러 올 거라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아. 그는 제때 못 와. 지금 너무 먼 곳에 있거든. 설사 그가 널 구한다 해도…… 이미 다른 사내에게 더럽혀진 널 받아줄까?”
“다, 당신……!”
효령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사라졌다.
“네 사랑에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어디 한번 직접 확인해 봐. 이게 내 사랑을 모욕한 네가 치러야 할 대가야. 알았어?”
말을 마친 요희가 그대로 효령의 머리를 옆의 기둥에 박아 버렸다.
쾅. 엄청난 충격에 효령은 곧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요희가 그 모습을 보며 싸늘히 속삭였다.
“세상엔 건드려도 될 것과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이 있어. 넌 내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렸어. 온전한 모습으로 여길 빠져나가고 싶었다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고. 이건 다 네가 자초한 거야. 네 잘못이라고.”
변명처럼 마지막 말을 뱉은 그녀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요희는 나무 상자로 다가가 두툼한 털옷을 꺼내 걸쳤다. 그리고 발타고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있으면…… 죽음의 순간이 꽤 황홀할 거예요, 태자.’
“이걸로 지긋지긋한 기탄과도 영원한 이별이로군.”
요희는 곧 태연한 얼굴로 처소를 걸어 나갔다.
* * *
“비, 빌어먹을!”
연제준이 일그러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대칸께서 오늘 하루, 칸들을 제외한 모든 분들의 황궁 출입을 막으라 하셨습니다. 해서 칸들을 보좌하는 단사관은 물론 호위들까지 다들 숙영지로 돌려보냈습니다.」
조금 전, 황궁의 친위대 군사들은 그렇게 말하며 연제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 보니 황궁 주변은 수도 없는 군사들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었다.
연제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칸께서 무슨 이유로 그런 명을 내리셨단 말이냐?」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그럼 하나만 묻자. 마지막 칸이 도착하신 게 언제냐?」
「방금 전입니다.」
그것으로 연제준은 상황 판단을 끝냈다.
“그만 돌아가자, 시타.”
“하, 하지만 저하.”
시타가 당황하여 그를 붙들었다.
“여기 있어 봐야 소용없다. 어서 돌아가재도.”
연제준이 시타에게 은밀한 눈짓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저하.”
말머리를 돌리는 연제준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돌아가는 낌새로 보아 역시나 황궁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자들의 죽음이 그 이유라 보기엔 어딘지 석연찮았다. 이미 7황비가 범인으로 지목된 상황에서 겨우 그녀 하나를 잡자고 이 난리를 피울 리 없었다.
무엇보다 수상쩍은 점은 칸들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그 호위들의 출입마저 막았단 사실이었다. 이는 전시에조차 취하지 않던 조처였다.
‘리안, 아무래도 네놈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런 빌어먹을!’
전시보다 위험한 상황이라면 단 하나…… 역변뿐이었다. 이대로 가면 대칸은 물론 아버지와 다른 칸들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연제준이 서둘러 말을 몰았다.
그와 시타 두 사람은 이내 숙영지에 도착했다. 수하들은 그의 명에 따라 이미 무장한 채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너희들은 지금 당장 나를 따라 황궁으로…….”
순간, 연제준의 곁으로 수하 하나가 바삐 달려왔다.
“저하. 말씀하신 대로 대도위님의 숙영지에 다녀왔습니다만, 그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을 포위한 군사들이 이미 공격 대형을 갖췄습니다.”
“뭐라, 이렇게 빨리? 그들이 이 환한 시각에 공격을 감행한단 말이냐?”
“지금은 축제라서 사방이 음악과 공연 소리로 시끄럽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패싸움도 벌어지고요. 아무래도 그걸 노린 것 같습니다.”
“저하. 제 동료들을 구해 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그들 모두가 죽습니다.”
시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연제준에게 애원했다.
“젠장!”
연제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황궁을 둘러싼 군사들이며 발리안의 숙영지를 포위한 군사들이며. 겨우 이백에 불과한 자신의 군사들로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이를 어쩐다? 다른 부족의 세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더구나 이렇다 할 증거조차 없는데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고 따라줄지도 의문이었다.
‘리안.’
최악의 상황에 다다르니 발리안이 더욱 간절해졌다.
왕자라는 배경을 버리고 혼자 몸으로 시작하여 수천의 군사를 이끌기까지. 그는 말도 안 되는 적은 수의 군사로 번번이 대군을 상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발리안이라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연제준의 뇌리로 문득, 언젠가 발리안이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났다.
「연제준 너더러 머리가 좋다니. 어떤 골 빈 놈이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거냐? 그렇게 많은 군사로 이기는 건 누구나 한다. 문제는 그럴 만한 군사들이 없을 때지.」
「그거 아나? 검독수리는 사냥할 때 지형을 이용한다는 거. 저보다 큰 산양과 영양을 절벽에서 밀어 죽이고 뾰족한 바위에 거북이 등갑을 부순다. 그놈도 너보다 더 머리를 쓴단 말이다.」
「영리한 자에겐 세상 모든 게 내 군대고 무기다. 그렇게 안일한 생각만 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건 뭐든 내게 유리하게 이용하란 말이다. 옆을 지나치는 사람, 풀 한 포기까지!」
‘정말 네 녀석 말이 맞았다. 많은 군사로 이기는 건 누구나 해.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지? 리안, 제발 네놈의 지혜를 좀 빌려다오.’
연제준이 입술을 깨물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순간, 한 군사가 놀란 얼굴로 그를 향해 외쳤다.
“저, 저하. 저, 저기…… 저기 좀 보십시오.”
“……!”
그가 가리키는 곳을 향한 연제준의 눈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졌다.
* * *
한편, 회의장에서는 바깥 사정을 알 리 없는 칸들이 모여 앉아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자들을 죽인 범인이 잡혔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마지막으로 도착한 막계 칸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나도 막 연락을 받고 온 참이오. 며칠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해결된 모양이오.”
“그럼 범인은…… 역시 7황비였던 겐가?”
“하. 이러니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고 하는 모양이오. 기가 센 기탄 여인들과는 다르다 생각했더니만.”
“그러게 말이오. 독을 쓰다니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소. 멋모르고 대칸이나 우리가 그 유주를 마셨다면 어찌 되었을 뻔했소?”
“으.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구려.”
모두가 치를 떠는 틈에서, 유주를 들이라 명했던 차뉴 칸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면목이 없소. 하마터면 나 때문에 모두가 큰일을 당할 뻔했으니. 지금도 어제 일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소이다.”
“그게 어떻게 차뉴 칸의 잘못입니까? 그런 못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나쁜 것이지. 정말 기탄을 멸망시킬 작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그런 간 큰 짓을…….”
조용히 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투 칸이 입을 열었다.
“대칸께서 많이 늦으시는군.”
“그러게 말이오. 급히 모이라 연락을 하신 분이 이렇게 늦으실 리가…….”
평소 단 한 번도 늦은 적 없는 대칸의 부재가 묘한 긴장감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태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 아니오?”
“사람을 불러 물어보는 것이…….”
차뉴 칸이 단사관을 부르러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것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