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폭풍 전야 5
* * *
“뭐가 그렇게 재미나요? 좋은 건 우리 함께 나누자고요.”
발타고의 침상에서 잠시 눈을 붙였던 요희가 느슨한 옷차림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발타고는 보란 듯 요희를 자신의 처소로 데리고 왔다. 더는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당신이 대칸이 되는 날이…….”
요희가 발타고의 무릎에 앉아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황후가 되는 날이기도 하지.”
발타고가 요희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탁. 요희가 요염하게 웃으며 그 손을 떼어 냈다.
“중요한 날에 부정 타면 안 돼요. 아무리 급해도 조금만 참아요. 앞으론 사람들 눈을 의식할 필요 없이 온종일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그녀가 발타고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지금 있는 태자비는 어쩔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그 여자가 황후가 되어야 하는데…….”
발타고가 한껏 인상을 구겼다.
“태자비가 황후? 웃기지 말라고 해.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누가 그따위 못생긴 걸 쳐다나 본다고.”
“정말 그 여자를 치우는 게 가능하겠어요? 둘 사이에 아들도 있다면서…….”
“하, 아들? 말도 마. 꼭 절 닮은 못나고 둔한 걸 아들이랍시고 낳아 놔서는……. 겨우 그딴 걸 낳자고 내가 내키지도 않는 힘을 썼다고 생각하면…….”
짜증스럽게 말한 발타고가 요희의 허리를 냉큼 끌어당겼다.
“그러지 말고 그쪽이 날 닮은 놈으로 하나 낳아. 그럼 당장 태자로 삼아주지.”
“정말요? 그럼 나야 더 바랄 게 없지만, 과연 당신 어머니가 가만 계실까요? 그분이 반대하고 나서면 내가 황후가 되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발타고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어머니도 이젠 현실을 인정할 때가 됐어. 기탄의 대칸은 나지 어머니가 아니라고. 그걸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태자비를 처리해야겠어.”
둘이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태자 전하. 급히 아뢸 일이 있어 왔습니다.”
“들어 와라.”
발리안의 숙영지에 보냈던 수하 중 하나가 바삐 안으로 들어왔다. 발타고의 무릎에 앉아 있는 요희를 본 그가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모르는 척 고개를 숙였다.
“대도위의 숙영지를 몰래 빠져나가는 자들이 있어 붙잡아 왔습니다.”
“저희만 살겠다고 도망치다니, 쥐새끼 같은 놈들. 당장 놈들을 죽여 버려라.”
“아니, 안 돼요.”
요희가 발타고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서 놈들을 끌고 와라.”
그녀가 발타고 대신 명을 내렸다. 얼핏 발타고의 눈치를 살피던 수하가 그의 고갯짓에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당신이 원한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그깟 잔챙이들을 봐서 뭐 하려고?”
“언제든 죽이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인질로 쓸 만한지 살펴보려고요.”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군. 발리안 놈을 괴롭힐 거리가 늘면 나야 좋지.”
“데려왔습니다, 태자 전하.”
수하의 목소리와 함께 곧 밧줄에 묶인 사람 몇이 안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
그중 한 사람을 본 요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효령 장공주.’
며칠 사이 몰라보리만큼 얼굴이 핼쑥해졌지만 분명 효령이었다. 그녀 곁으로 산시와 교기가 강제로 꿇어 앉혀졌다.
“네놈은 얼마 전 절도 칸과 내기를 벌였던 안야국 놈 아니냐?”
발타고도 효령을 알아보았다.
“발리안이 네놈을 꽤 아끼는 것 같던데……. 정말 인질로는 딱이로군.”
“……!”
효령이 창백한 얼굴로 발타고를 올려다보았다.
“태자 전하.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거죠? 대도위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 그분을 죽이려는 건가요?”
훗. 발타고가 얼굴 가득 비소를 지었다.
“끌려온 놈치고는 배짱이 제법이로구나. 좋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내 말해 주마. 발리안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 따지자면 끝도 없지.”
“…….”
“아무것도 아닌 놈이 그간 주제를 모르고 너무 설치고 다녔다. 겨우 대도위 주제에 안야국 황제를 꿈꾸더니 그것으로 모자라 내 자리까지 노렸으니. 어떠냐, 이 정도면 충분히 죽을 만하지?”
“마, 말도 안 돼요. 대도위님은 절대 그런 적이……. 이봐요, 당신. 대체 태자 전하께 무슨 말을 한 거예요?”
효령이 요희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발타고의 입에서 다른 것도 아닌 안야국 황제 이야기가 나오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일 사람은 요희뿐이었다.
하. 요희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랫것들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대도위나 그 수하나 안하무인인 건 똑같네. 이봐.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곧 죽게 될 거야. 그러니 그 입 닥치는 게 어때? 응?”
발타고의 곁에 서 있던 요희가 효령에게로 다가왔다. 효령의 턱을 들어 올린 요희가 그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날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쯤 잘 알 텐데……. 적어도 대도위의 얼굴을 보고 죽으려면 성질 죽이는 게 좋을 거야.”
요희가 효령에게 엄포를 놓은 순간. 발타고의 또 다른 수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태자 전하. 방금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막 칸들께서 궁에 당도하셨답니다.”
“그래?”
발타고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놈들을 끌고 가 내 명이 있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 가둬둬라. 그리고 숙영지에 남아 있는 발리안의 수하들은 모두 죽여라.”
“예, 태자 전하.”
“아, 안 돼요.”
효령이 비명을 질렀다. 발타고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당장 이것들을 끌고 가지 않고.”
“잠깐만요.”
요희가 재빨리 발타고의 팔을 붙들었다.
“여기 이자는 남겨두고 갈래요?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위아래도 모르는 이자의 못된 버릇을 내가 직접 고쳐주고 싶은데…….”
“흐흐, 얼마든지.”
발타고가 수하에게 말했다.
“남은 놈들을 끌고 가라.”
“예.”
발타고의 수하들이 산시와 교기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효, 효령아.”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순식간에 산시와 교기가 밖으로 끌려 나갔다.
“잘하고 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요희가 문으로 향하는 발타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지.”
탁. 발타고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 * *
발타고가 나가고 그의 처소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묶인 채 바닥에 꿇어 앉혀져 있던 효령이 날 선 눈으로 요희를 노려보았다.
“당신 설마……. 태자와는 무슨 사이죠? 당신은 대칸의 황비잖아요. 근데 당신이 여긴 왜…….”
도무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느슨한 옷차림으로 발타고의 침소에 있는 요희라니. 그녀가 발타고와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건 어린애라도 알 수 있었다.
효령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당신 무슨 속셈이에요? 태자를 부추겨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글쎄요, 무슨 속셈일까요?”
요희가 여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우습네요. 안야국 장공주란 분이 원수인 기탄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 기탄에 난리가 나면 우리에겐 좋은 일 아닌가요? 아…….”
요희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잘난 발리안 때문인가요? 장공주님이야말로 설마 그 야만인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나, 난…….”
“사내에 눈이 팔려 나라는 안중에도 없는 장공주님이 절 나무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래 봬도 전 지금 안야국을 위해 일하는 중이랍니다.”
순간, 누군가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마마.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알았다.”
밖을 향해 외친 요희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내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꽤 큰 크기의 나무함이 들려 있었다.
“대화 중에 미안해요. 별로 오래 기다리진 않았죠? 남은 말 계속할까요?”
침상으로 다가간 요희가 나무함을 거기 내려놓았다.
“곧 이곳이 소란스러워질 거예요. 태자를 통해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툭. 말을 하는 요희의 몸에서 옷이 떨어져 나갔다.
하나둘. 허물처럼 바닥에 옷이 쌓이고 마침내 터질 듯 탐스러운 그녀의 맨몸이 드러났다.
“……!”
민망해진 효령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지, 지금 뭘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장공주님을 또다시 색욕에 빠진 변태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전 한 사람을 상대로 두 번이나 같은 방법을 쓸 만큼 시시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요희가 느긋한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몸에 달라붙는, 말을 타기 좋은 사내의 옷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옷을 걸치며 말했다.
“장공주님과 보내는 시간도 이것이 마지막이니 알려드리죠. 기탄의 대칸은 이미 죽었어요. 태자의 손에 남은 칸들도 곧 죽을 거예요.”
“뭐라고요?”
놀란 효령이 요희를 바라보았다.
“야만인이 괜한 야만인이겠어요? 수틀리면 부모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더라니까요.”
요희가 효령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대칸이 죽었으니 당분간 기탄은 혼란스럽겠죠? 상대적으로 우리 안야국은 안전해지는 거고요. 어때요, 이만하면 제가 웬만한 장공주보다 더 낫지 않나요?”
“…….”
“저 아닌 다른 사람이 여기 왔다면 이런 엄청난 성과는 꿈도 못 꿨을 거예요. 안 그래요?”
요희가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형부 상서가 원하던 건가요?”
“네. 대칸이 죽고 발리안이 안야국에서 물러나야 그분과 태후마마가 안심하고 오래도록 영화를 누리실 테니까요.”
“그게 안야국을 위한 거라고요?”
“그럼 아닌가요?”
효령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태후마마나 형부 상서가 없는 편이 안야국에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우린 생각이 많이 다르네요.”
“장공주님.”
“솔직히…… 당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여인의 몸으로 험한 이곳에 올 결심을 하는 거 쉽지 않을 테니까.”
“…….”
“이 모든 게 안야국이 아닌 형부 상서만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어느 누가 당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걸 수 있겠어요? 심지어 당신 자신까지…….”
“사, 사랑한다니 누가요?”
순간, 요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항변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상서 어른은 제 주인일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