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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86화 (86/116)

86화. 폭풍 전야 4

* * *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그 멍청한 오라버니가…….」

연제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무예 대회에서 우승하는 걸 돕겠다고 여기저기 사람들을 풀어놨던 모양이에요. 오, 오해하지 말아요. 난 이제껏 전혀 몰랐으니까.」

「압니다. 설사 상대의 전력을 안다 해도 우승이 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죠. 그날의 승리는 온전히 공주님의 실력이 이뤄낸 결과입니다. 절대 의심하지 않습니다.」

「고마워요, 대도위.」

그제야 연제야의 얼굴이 풀어졌다.

「무예 대회가 끝난 후에도 오라버닌 절도 칸 쪽의 감시를 풀지 않았죠. 허올란 공주와의 연락을 위해서요. 한데…….」

「…….」

「오라버니 말이 절도 칸의 숙영지에서 군사들이 대거 빠져나갔다고……. 왕족 회의를 앞둔 데다 절도 칸이 아직 황궁에 있는데 그들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뒤를 밟으라고 했단 말입니까?」

연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들이 우리 구림 땅에 들어서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연제야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창지로 들어가는 걸 보고 목적지가 파음이라는 걸 눈치챘죠. 그래서 급히 구림의 왕궁에 가 군사들을 이끌고 지름길로 왔어요. 우리 구림 부족보다 이곳 사막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랬군요.」

「진작 저자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일단 멀리서 몸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니까. 그러다 뜻밖에도 태자 전하의 수하들과 맞부딪쳤죠.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원래 많은 수의 군사들이 무장한 채 다른 부족의 영지에 들어설 때는 그 방문 목적을 미리 통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를 어길 시엔 적의 첩자나 선전포고의 의미로 간주되어 해를 당할 수 있었다.

태자나 절도 칸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도위가 여기 파음엔 무슨 일이죠?」

「제게 중요한 분의 무덤이 이곳에 있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거기 참배하러 왔습니다.」

「그랬군요. 그렇담 태자 전하나 절도 칸이 왜 대도위를 공격했는지는 아나요?」

「아뇨.」

발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저도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평소 저를 미워하신다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절 죽이려 드시다니. 절도 칸이라면 혹 지난번 내기에 패한 일로…….」

「아뇨. 그 이유는 아마…… 나 때문일 거예요.」

연제야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 대칸 사이에 오간 말들 때문이에요. 대칸께서 나와 대도위의 혼인을 명하셨거든요.」

「하지만 그 얘긴 지난번에 없던 일로 하겠다고…….」

「그건 내 생각이고요. 대칸과 아버지의 생각은 다르셨던 거죠.」

그녀가 말을 이었다.

「대칸께선 대도위를 나와 혼인시켜 칸으로 삼을 작정이세요. 아직은 비밀이지만 왕족 회의 말미에 정식 의제로 다뤄질 거예요.」

「예?」

「어차피 대칸의 영토에서 영지를 내주실 것이니 다른 부족의 칸들이라면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죠. 절도 칸과 태자 전하만 빼면…….」

왕족 회의의 참석자는 대칸과 다섯 명의 칸, 그리고 태자 발타고까지 총 일곱 명이었다.

대칸은 회의를 주재하되 의결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나설 때는 삼 대 삼으로 의견이 양분될 때뿐이었다. 이번 일은, 표결에서 밀릴 것을 짐작한 태자와 절도 칸이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제가 살아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아마 대칸의 뜻대로…….」

「아뇨.」

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치는 않을 겁니다. 전 대칸의 양자이고 그분의 직속 부대를 거느린 대도위입니다. 절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반역에 준하는 처벌이 내려질 겁니다.」

「그럼…….」

「백여 명이 넘는 군사들을 움직이면서, 설마 절도 칸이 이 일이 들통나지 않으리라 간단히 생각했겠습니까?」

절도 칸은 요란한 허세와 거드름에 비하면 꽤 소심한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허세가 본인의 능력이 아닌 권력을 쥔 황후에 기대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후의 허락이나 명 없이 그가 자신의 부족보다 군사력에서 앞서는 구림 부족의 비위를 함부로 건들 리 없었다.

만약 나중에라도 이 일이 밝혀져 구림 부족이 항의라도 하고 나오는 날에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될 터.

그럼에도 절도 칸이 그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건,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내막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분명 절도 칸, 아니 그 배후에 계신 황후마마께서는 이 일이 문제가 된 이후까지 대비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그 말은…….」

발리안이 날카로운 눈으로 연제야를 내려다보았다.

「대칸과 다른 칸들의 목숨이 위험하단 뜨……!」

그리고 효령과 남은 자신의 수하들도…….

쿵. 발리안이 말을 맺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원래 얼굴과 머리는 다쳤을 때 다른 부위보다 피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과도하게 흘린 피 때문에 한계에 다다른 그가 그예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이봐요, 대도위. 대도위!」

발리안의 몸을 흔들던 연제야가 수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대도위를 옮기지 않고……!」

그녀의 비명에 구림의 군사들이 그녀 곁으로 달려왔다.

* * *

[머리를 심하게 다친 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대.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서신의 말미에 적혀 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 연제준이 초조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태자와 절도 칸이 모두 나서 리안을 공격하다니. 설마…….’

연제준의 눈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너만 알고 있어라. 오늘 9황자와 11황자가 죽었다. 앵속 중독이라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 일로 오늘 왕족 회의가 중단되었다.」

어젯밤 아버지 구림 칸이 한 말이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느닷없이 두 황자가 비명횡사한 것 하며, 저들이 발리안을 죽이려 드는 것 하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태자가 자신의 것이 될 땅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려 직접 나선 모양이로군. 절도 칸이 움직였다는 건 황후마마도 같은 생각이라는 뜻이고. 그럼 그다음은…….’

그가 불안감을 다스리려 애써 생각에 몰두한 사이. 다른 수하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달려 들어왔다.

“저하. 급히 아뢸 말씀이…….”

수하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저하를 꼭 뵈어야 한다며 난동을 부리는 자가 있어…….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바람에…….”

“이 이른 시간에 대체 누가 말이냐?”

“지난번에도 온 적이 있는 대도위님의 수하입니다. 시타라고…….”

낯익은 이름에 순식간에 연제준의 표정이 바뀌었다.

“시타? 시타가 왔단 말이지. 어서 들여라.”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그가 밖에 나가 시타를 데리고 들어왔다.

“저하!”

연제준을 보기 무섭게 시타가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도와주십시오, 저하!”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시타?”

시타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대장이 일이 있어 파음에 갔는데 행방불명이 됐답니다. 거기 대고 지난밤, 처음 보는 군사들이 우리 숙영지를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처음 보는 군사들?”

“예. 숫자가 엄청났습니다. 분위기도 살벌하고요. 도와주십시오, 저하. 당장 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시타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호독니 천장 말이 태자 전하께서 우리 대장을 죽이려 한다고……. 그러니 절대 숙영지에 돌아오면 안 된다고 전하라 했습니다.”

“진정해라, 시타. 리안은 지금 내 누이와 함께 있으니. 내 곧 연락을 취하마.”

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 대장이 공주님과 함께 계십니까? 무사하신 거죠, 우리 대장?”

“그래. 부상을 입은 모양이다만, 워낙에 질긴 놈이 아니냐? 곧 무사히 돌아올 게다.”

연제준이 흥분한 시타를 생각해 일부러 희망적인 소식만 전했다.

“그보다 너희를 포위한 군사들 말인데……. 그들이 정확히 언제 너희 숙영지에 나타났느냐?”

“그, 그게 자정이 좀 넘어서…….”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에 그 많은 군사들이 움직였다?”

역시 발리안의 염려대로 뭔가 석연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너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라. 일단 아버님을 뵙고…….”

“송구합니다만, 저하.”

아까 시타를 데리고 왔던 수하가 그들의 대화 틈으로 끼어들었다.

“칸께서는 조금 전 황궁에 가셨습니다. 황궁에서 급히 전갈이 와서…….”

연제준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렇게 일찍 말이냐?”

지금은 왕족 회의를 열기엔 일러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시간에 칸들을 소집한 것을 보면 역시 두 황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일 터.

‘황자들이 앵속 때문에 죽었다면 그 범인은…….’

천군을 비롯하여 다들 7황비를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연제준의 생각은 달랐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7황비가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리도 없거니와, 지난번 절도 칸이 발리안을 상대로 앵속을 사용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질 급하고 아둔한 절도 칸이 스스로 그런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을 리는 없고.

연제준이 의심하는 앵속의 출처는 바로 황후였다.

‘황후마마나 태자가 그 밤에 군사들을 보내 리안의 숙영지를 에워쌌다는 건…….’

그들은 이미 발리안을 죽이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동생 연제야가 발리안을 구하는 과정에서 놓친 절도 칸이나 태자의 군사가 이 사실을 황후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상황은 절대 발리안과 자신들 구림 부족에 유리하게 돌아갈 리 없었다.

대칸은 물론 칸들의 안위가 염려된다던 발리안의 말이 어느새 현실이 되고 있었다.

허공을 노려보던 연제준이 이내 결단을 내렸다. 그가 자신의 수하들에게 말했다.

“너는 당장 여기 있는 군사들을 소집하여 무장하고 내 명을 기다리라 해라. 그리고 수하 몇을 보내 리안의 숙영지를 살펴라.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내게 알리고.”

“예, 저하.”

연제준이 이번에는 시타를 향해 말했다.

“시타 너는 나와 함께 궁으로 가자.”

“아, 알겠습니다. 저하.”

연제준이 앞장서 궁려를 걸어 나갔다.

* * *

어느새 하늘에 번지기 시작한 뿌연 새벽노을이 새날의 시작을 알렸다.

드디어 열리게 된 자신의 시대를 앞두고 발타고는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 따윈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곧 있을 핏빛 광란의 시간을 떠올리니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모두들 그동안 날 조롱하고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의 눈이 허공을 향해 매섭게 번득였다.

‘발리안. 네놈은 가장 마지막에 죽여주지. 기대해라, 내가 네게 어떤 죽음을 안길지, 흐흐.’

발타고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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