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폭풍 전야 3
* * *
대장을 닮은 아들이라니. 어, 어떻게 호독니가……!
효령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호독니가 무섭게 눈을 번득였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네놈이 여자라는 걸.”
언젠가 효령이 달거리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날 호독니는 우연히 발리안의 방에 갔다가 모개가 그녀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장을 좋아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안다. 효령이 네가 대장 마음에 처음 스며든 사람이라는 거.」
「만약 네가 여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더는 여기 있을 수 없다. 이곳의 군기와 군율이 얼마나 엄한지는 너도 잘 알지?」
그때를 떠올린 호독니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날로 당장 네놈을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네놈만 보면 환히 웃는 대장 때문에……. 그래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호독니가 효령 앞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대장을 행복하게 해줘라. 알았냐?”
효령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거친 말속에 호독니의 진심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럴…… 게요, 그럴게요, 호독니.”
효령이 어금니를 깨물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순간, 문이 열리고 시타가 교기와 함께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호독니. 말한 대로 교기를 데려왔어요. 말도 끌고 왔고.”
호독니가 효령의 멱살을 놓으며 물러섰다.
“시타. 산시와 효령일 데리고 다와의 집으로 피해라. 서둘러.”
시타가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호독니? 동료들을 두고 나만 도망가라니. 절대 그럴 수…….”
“멍청한 놈! 누군가는 대장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 할 것 아니냐?”
호독니가 시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놈들이 우리 같은 잔챙이를 노리고 왔겠냐? 놈들의 목표는 대장이야. 대장은 여기 오는 순간 죽는단 말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몰라?”
“……호, 호독니.”
“네놈을 믿고 효령이와 산시를 맡기는 거니까 똑바로 해.”
무섭게 엄포를 놓은 호독니가 서둘러 궁려를 나섰다.
“어, 어떡하지?”
시타가 겁먹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산시가 잔뜩 졸은 그에게 지청구를 날렸다.
“어쩌긴. 호독니 천장 말 못 들었어? 당장 여길 빠져나가야지. 얼른 우리 집으로 가자.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잠깐만 산시야.”
산시를 말린 효령이 시타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시타. 나와 교기는 산시를 따라갈 테니, 시타는 당장 구림의 세자 저하께 이 사실을 알려요.”
“여, 연제준 저하?”
“축제 때 보니 그분, 짓궂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분명 도와주실 거예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시타 오라버니가 혼자 무슨 수로 대장을 찾고 여기 상황을 알리겠어? 세자 저하께서 나서면 일이 한결 쉬워질 거야.”
산시의 말에 시타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알았어.”
“그럼 다들 출발하죠. 산시, 나 좀 도와줘.”
산시가 얼른 효령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그들이 나갈 수 있도록 시타가 문을 열었다. 한발 앞서 밖으로 나온 교기가 효령을 안아 말에 태웠다.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저만치에 숙영지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횃불이 보였다. 밤바람에 펄럭이는 불빛이 이렇게 위협적으로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다른 숙영지에서 이상하다 눈치채 주면 좋으련만. 남은 축제를 즐기는 백성들이 여기저기 피운 불 때문에 그마저도 불가능할 터.
“다들 정신 바짝 차려라. 놈들이 누구든, 그 수가 얼마든 상관없다. 우리는 대칸께서 직접 임명하신 그분의 중앙군이다. 온 천하가 두려워하는 대도위군이란 말이다.”
쩌렁쩌렁. 어둠 속에서 호독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공격할 낌새를 보이는 즉시 박살을 내버린다.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본때를 보여 주잔 말이다. 알았냐?”
‘호, 호독니…….’
효령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가야 해, 효령아.”
“아, 알았어.”
어둠을 틈타 효령과 산시, 시타와 교기의 말이 숙영지의 서쪽 숲을 향했다. 창백한 달빛이 힘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 * *
사방이 어둠에 잠긴 이른 새벽.
밤을 넘기며 타올랐던 장작불이 가느다란 연기와 함께 끝내 사그라졌다. 모두가 고요히 잠든 숙영지를 차가운 갈바람이 홀로 휘젓고 다녔다. 그 짙푸른 어스름 속에 느닷없는 인기척이 났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그림자가 다급히 궁려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저하. 기침하셨습니까, 저하?”
“……!”
연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간신히 눈을 떴다. 아버지 구림 칸과 긴 이야기를 나누느라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건만. 그가 피곤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이른 시간에…….”
“공주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랍니다.”
“뭐, 연제야가? 들어 오너라.”
화들짝 잠을 깬 연제준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가 흐트러진 옷자락을 여미는 사이, 수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탁. 연제준이 누이 연제야가 보냈다는 서신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바삐 글을 읽어 내리던 그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빌어먹을!”
연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리, 리안이 의식불명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연제준이 서신을 콱, 움켜쥐었다.
* * *
올가미에 묶인 채 말에 끌려다니던 발리안은 끝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의 주위로 순식간에 절도 칸의 수하들이 몰려들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시체처럼 널브러진 발리안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다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당장 대도위를 생포했음을 알리는 전서구를 띄우고, 어서 그를 말에 실어라. 여기서 더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랬다간 크게 역정을 내실 게다.」
우두머리의 명에 군사 두 사람이 커다란 덩치의 발리안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를 끌다시피 하여 간신히 말 위에 얹었다. 순간.
“으악!”
팔꿈치로 자신을 붙든 군사를 가격한 발리안이 전광석화와 같이 말 위로 뛰어올랐다.
히이잉. 삽시간에 그를 태운 말이 저만치로 달려 나갔다.
툭.
몸을 묶었던 올가미마저 벗어던진 발리안이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벌리며 사막의 아지랑이 사이로 멀어졌다.
당황한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당장 대도위를 잡아라!」
우르르. 군사들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발리안의 뒤를 쫓았다.
「말을 노려라. 사람 말고 말을 맞추란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사들이 일제히 발리안이 탄 말을 향해 활을 겨눴다.
「쏘아라, 어서!」
우두머리의 재촉에 선두에 선 자의 화살이 막 시위를 벗어나려는 찰나.
휘이익.
간발의 차이로 먼저 날아온 화살이 그의 어깨에 박혔다.
「으아아아!」
그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온 화살이 위협하듯 그들의 발아래 무수히 꽂혔다.
이어 와아! 하는 엄청난 함성과 함께 발리안이 향하고 있던 모래 언덕에서 무장한 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수였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당황한 우두머리가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이, 일단 철수하라. 철수해, 당장!」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가 말머리를 돌렸을 때. 맞은편 역시 수백여 개의 화살이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 군사들의 뒤쪽엔 앞서 발리안을 공격했던 발타고의 수하들이 모조리 묶여 있었다.
「제길!」
퇴로마저 막힌 절도 칸의 수하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순식간에 물샐틈없이 포위당한 그들이 마지못해 손을 들며 투항했다. 그들이 강제로 무장 해제를 당하는 사이. 발리안 역시 앞을 가로막은 군사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를 향해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아까 화살을 쏘아 위기에 처한 발리안을 구한 자였다. 그가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대도위?」
투구 밑으로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을 쏟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연제야였다.
「정말 무모하군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아나다 저들의 화살에 맞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운이 좋은 줄 아세요.」
비틀거리며 말에서 내린 발리안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가 원래 운이 좋긴 하지만…… 막무가내로 벌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요?」
「아까 말에 끌려다닐 때. 모래 능선 위로 얼핏 사람 머리통이 보였습니다. 누군가가 거기 몸을 낮추고 숨어 있다는 걸 알았죠. 물론 절 구해 줄 분이 공주님이라고는 예상 못 했지만.」
맙소사. 연제야의 입이 벌어졌다.
「그,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우리가 보였다고요?」
「그보다 공주님이 어떻게 여길…….」
아! 퍼뜩 정신을 차린 연제야가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가 보라고 해서요.」
「연제준이 말입니까?」
「저기요, 대도위. 그건 나중에 설명할 테니 지금은 치료부터…….」
연제야의 말마따나 한바탕 사막을 쓸고 다닌 발리안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누더기처럼 너덜거리고 그 팔과 등에는 온통 돌에 찢긴 상처였다. 벌어진 옷 틈 여기저기서 아직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다친 머리 때문에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모래마저 붉은색으로 변했다.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한데…… 태자 전하의 수하들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절도 칸의 수하들까지 절 노린 것인지……」
연제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들이 절도 칸의 수하들이란 걸 안 거죠?」
「전 한 번 본 얼굴은 안 잊습니다. 저들 중에 하얀 띠를 두르고 무예 대회에 참가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연제야가 속한 구림 부족이 파란색을 사용하듯 하얀색은 절도 부족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역시. 발리안의 눈썰미에 연제야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맞아요. 저들은 절도 칸의 군사들이에요. 오라버니 말이…….」
연제야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주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