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폭풍 전야 2
* * *
“뭐라, 발리안을 놓쳐? 게다가 구림 부족까지?”
발타고의 설명을 들은 황후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면목 없습니다, 어머니.”
“어째 네놈은 하는 일마다……!”
하아. 속이 터진 황후가 가슴을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데는 약도 없다더니. 아들 발타고가 딱 그 짝이었다.
어떻게 번번이 벌이는 일마다 이 모양인지. 발타고라면 도무지 못 미더워하는 대칸의 심정이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 놓고 화를 낼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필 이 일에 구림 부족이 끼어들다니…….
발리안이야 이미 절도 칸의 수하들이 붙잡았으니 다행이지만, 구림 부족이 이 일과 엮인 건 전혀 계획 밖의 일이었다. 발타고가 저지른 짓이 약삭빠른 구림 칸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건 끝이었다.
그가 이 일을 고하겠다고 당장 대칸을 찾는다면…….
최대한 사태를 키우지 않으려 했건만, 역시 칸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안 될 모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사실이 주도에 알려지기 전 모든 걸 속히 마무리 지어야 했다.
황후가 발타고에게 말했다.
“너는 내일 날이 밝는 즉시 대칸의 이름으로 칸들에게 전갈을 보내라. 황자들을 죽인 진범을 잡았으니 속히 황궁에 들라고.”
“그다음은요?”
“그들을 모두 죽여야지.”
“하면 차뉴 칸 숙부님과 절도 칸 형님에게는 미리 언질을…….”
“멍청한 놈!”
황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일을 꾸민 게 너라는 걸 만천하에 떠벌리기라도 할 셈이냐?”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칸들이 죽으면 그 부족들이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을 성싶으냐? 다들 이 일의 진위를 밝히라 난리를 칠 텐데 그들 앞에 네 목이라도 던져줄 셈이냔 말이다.”
황후가 발타고 앞으로 바짝 고개를 내밀었다.
“잘 들어라. 대칸과 다른 칸들을 죽인 살인자는 발리안이다. 그가 스스로 대칸이 되고자 이런 엄청난 짓을 벌인 게야.”
“그 말씀은……!”
발타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버지의 죽음이며, 파음에서의 일이며.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린 이 골치 아픈 상황을 한꺼번에 해결할 기막힌 묘수였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차뉴 칸과 절도 칸이 죽어야 한다. 그들이 죽어야 발리안의 짓이란 네 말을 사람들이 믿을 것 아니냐?”
“역시, 어머님이십니다.”
그제야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발타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혹시 몰라 제 수하들을 보내 발리안의 숙영지를 포위하라 했습니다. 거기 남아 있는 놈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건…… 잘했다.”
모처럼 듣는 칭찬에 발타고가 요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두 이 사람 생각입니다. 발리안 그놈이 주도에 나타났을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해서…….”
황후가 힐끗 요희를 쳐다보았다.
‘영악한 년. 머리 쓰는 건 기가 막히다만……. 이 일이 마무리되면 다음은 네 차례다. 네년이 내 아들을 손아귀에 쥐고 이 나라를 말아먹는 꼴은 절대 못 보지.’
황후가 속내를 감추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했다. 덕분에 근심거리를 덜었구나.”
“감사합니다, 황후마마. 어려울 때일수록 지혜를 모아야지요.”
요희 역시 가식적인 미소로 응수했다.
‘망할 할망구. 내가 당신 속을 모를 줄 알고? 난 절대 쉽게 당하지 않아. 두고 보라지.’
두 여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발타고가 입을 열었다.
“한데 어머니. 만에 하나 발리안 그놈이 구림 부족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땐 어찌합니까?”
절도 칸이 발리안을 잡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했다는 걸 알 리 없는 발타고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
순간, 황후의 눈이 날카로이 번득였다. 그러고 보니 구림 칸만 해결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구림에는 아비 못지않게 영악한 세자가 있지 않은가. 그가 자신들의 거짓말에 쉬이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둬야 했다.
마음의 결정을 마친 황후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긴. 반역죄를 저지른 죄인을 숨겨준 자 역시 역도란 것을 모르느냐? 그들 역시 죽여야지.”
“하지만 구림 칸이 다른 칸들과 같이 죽어 버리면, 구림 부족을 역도로 몰기에는 무리가…….”
“말은 만들기 나름이고 이유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아비규환의 다툼 속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니냐?”
“……그 말씀은…….”
“발리안은 무엄하게도 구림 칸과 연합하여 대칸과 다른 칸들을 죽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을 막는 과정에서 구림 칸이 죽었다. 당황한 발리안은 수하들을 버리고 혼자 구림 부족에게로 달아났다.”
“놈이 거기서 원군을 끌고 다시 주도로 쳐들어오려던 것을 우리가 붙잡았다?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래.”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머니. 그러려면 우선 친위 대장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어리석기는. 무슨 일을 그딴 식으로 하는 게냐?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서야 그를 포섭하려 들다니. 그러다 그가 거절이라도 하면 그땐 어찌하려고?”
“그, 그게…….”
순간 황후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친위 대장은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내 이미 오래전, 부대장을 포섭해 두었거든. 내일 칸들이 황궁에 들어오는 즉시 그가 궁 주변을 에워싸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을 것이다.”
하. 그제야 발타고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나, 어머니의 대처는 빠르고 빈틈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반발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사들이 필요하다. 그러니…….”
“…….”
“일단 칸들이 죽으면 그 즉시로 좌장군과 우장군을 불러 대칸의 군권이 네게 귀속되었음을 알려라. 그리고 황궁과 주도의 경계를 강화하고, 주요 길목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라 명해라.”
그녀가 바짝 목소리를 낮췄다.
“명심해라. 내일 일은 신속하고 정확히 해치워야 한다. 칸들 중 하나라도 놓쳤다간 우리 계획이 허사로 돌아간다. 알겠느냐?”
“예, 어머니.”
“내일 하루만 무사히 넘긴다면, 발리안과 구림 부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신중을 기하고 더는 섣부른 짓은 마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발타고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다려라, 발리안. 드디어 내 손으로 네놈의 숨통을 끊어 놓게 되었구나, 흐흐.’
암흑보다 짙은 어둠이 깊어 가는 사이. 멀리서 파란을 예고하는 불길한 올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 * *
“효령아, 정신이 들어?”
산시가 이제 막 눈을 뜬 효령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사, 산시. 내가 여긴 어떻게…….”
창백한 낯빛에 뺨이 푹 꺼진 효령이 바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어지러운지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괜찮아?”
산시가 그녀를 부축했다.
“두 시진 전쯤 호독니 천장이 널 데려왔어. 아직은 움직이면 안 돼.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누워 있어.”
“아니, 괜찮아.”
애써 정신을 차린 효령이 산시의 팔을 붙들었다.
“대장은? 대장에게선 아직도 소식이 없어?”
“그게…….”
산시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아직 대장 소식은 없지만, 분명 살아 계실 거야. 어머니가 그랬어. 이보다 더한 상황도 이겨내셨다고. 그러니까 우선은 네 몸 먼저 추슬러야 해.”
효령을 다독인 그녀가 얼른 화로 곁으로 다가갔다.
“우리 어머니 말은 믿어도 돼. 왕자님께 무슨 일만 생길 것 같으면 꿈을 꾸시거든. 대부분 잘 맞고. 좋은 상황은 아니라도 아직 최악은 아냐. 그러니까 기운 내.”
산시가 따뜻하게 데운 양젖을 그릇에 담아 효령에게로 가져왔다.
“좀 마셔. 그동안 너 도통 먹은 게 없다며? 나중에 왕자님이 돌아오셔서 네 모습을 보시면 기함하실라.”
그제야 효령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렇게 엉망이야?”
“미안하지만 그래. 빠진 살 되돌려 놓으려면 한참 걸리겠어. 시타 오라버니 말이 자기 주변 남자들은 다 살집 있는 여자들을 좋아한대. 아마 대장도…… 엄마야!”
산시가 말을 하다 말고 자기 입을 때렸다.
“하여튼 나도 주책이라니까. 아픈 애 앞에서 별소릴……. 암튼 너 지금 상태로는 안 돼. 힘들 때일수록 더 잘 먹고 더 잘 자야 한다고. 그래야 기운을 내서 문젤 해결하지. 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효령이 그릇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시 말이 옳았다. 어떤 상황이건 이렇게 낙담하고 주저앉아 있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랑한다, 효령아. 사랑해…….」
평생 같이하겠다던, 어떤 순간에도 지켜 주겠다던 발리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그 맹세와 함께 자신의 뺨으로 떨어졌던 뜨거운 눈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두려움과 절실함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자신을 향한 따뜻하고 다정한 몸짓.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또렷이 느껴졌던 충만함과 환희. 발리안과 하나 됐던 그 행복한 밤을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아직 사랑한단 말도 못 했는데…….
그를 만나면 하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또 해 주고 싶은 것들도. 그와 함께 할 미래를 위해서라면 효령은 못 할 것이 없었다.
‘사랑해요, 대장. 그러니까 부디 무사히 내게 돌아와 줘요.’
효령의 눈이 저도 모르게 젖어 들었다. 눈물을 감추려 효령이 부러 더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정말 고소하고 맛있다. 속도 따뜻하고. 나 한 잔만 더 줘, 산시야. 얼른 기운 내게…….”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산시가 신이 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순간.
벌컥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호독니였다.
“당장 일어나라.”
거두절미하고 다급히 외치는 소리에 효령과 산시가 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아픈 사람에게 뭐 하는……?”
호독니가 산시의 말을 에누리 없이 잘라 버렸다.
“지금 정체불명의 군사들이 숙영지를 에워쌌다. 놈들이 무장한 상태로 봐선 아무래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
“뭐, 뭐라고요?”
“금방 나가 봐야 해서 길게 말 못 한다. 효령이 너.”
산시를 밀치고 다가온 호독니가 효령의 멱살을 붙들었다.
“약속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겠다고.”
“……예?”
그 기세에 놀란 효령이 어깨를 움츠렸다.
“대장은 죽지 않았다. 반드시 돌아와. 그때 네놈이 없어 실망하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호, 호독니…….”
“내가 시간을 끌 테니 그 틈에 여길 빠져나가라. 살아서 꼭 대장을 만나고, 그래서 언젠가 대장에게…… 대장을 똑 닮은 아들을 낳아 줘라. 약속할 수 있나?”
“……!”
효령이 일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