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폭풍 전야 1
* * *
호독니는 수하 둘을 데리고 서둘러 파음으로 말을 달렸다.
그러나 파음의 어디서도 발리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흔적을 찾긴 했다. 다만 그것은 발리안이 살아 있다 장담하기 어려운 암울한 것들이었다. 사막 여기저기 튀어나온 돌부리마다 거뭇하게 말라붙어 있는 피. 게다가 그 양이 무시 못 할 만큼 많았다.
「젠장!」
꼬빡 하루를 미친 듯 뒤졌으나 헛수고였다.
「어, 어떡하죠, 천장? 설마 대장이 진짜 죽은 것은 아니겠죠?」
호독니와 같이 온 수하들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재수 없는 소리 마라. 언제 대장이 약속을 하고 안 지킨 적이 있냐? 기, 길이 어긋난 것뿐이다.」
불안감을 감추며 호독니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것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당장 주도로 돌아가자. 대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다.」
그러나 주도의 입구에서 다시 만난, 효령을 데리고 먼저 출발했던 수하들은 발리안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하필, 호독니가 수하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효령이 듣고 말았다.
「거, 거짓말. 거짓말…… 이죠? 대장이 사라졌다니…… 그 말 못 믿어요. 마, 말 좀 내줘요. 당장 대장에게 가 봐야겠…….」
그 말을 끝으로 효령은 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일이 그렇게 되었소, 다와.”
호독니가 참담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맙소사. 정말 대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시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렸다. 산시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
다와는 말을 잃은 채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았다. 침상 한쪽을 붙들고 간신히 몸을 버티고 있던 그녀가 이내 호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정신 차려! 우리 왕자님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야. 호독니, 왕자님이 뭐라고 했다고?”
“태자가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 다들 조심하라 했소. 그리고 주도에 돌아가는 즉시 당장 수하들을 무장시키고 대기하라고도. 남들 모르게 은밀히…….”
“그럼 가서 그 일을 해.”
“다와.”
“축제라고 다들 술독에 빠져 있을 테니 가서 뺨이라도 때려 일으켜 세워. 우리 왕자님은 절대 허튼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야.”
다와의 시선이 이번엔 시타와 산시를 향했다.
“산시 너는 가서 여자들에게 해장할 거리를 만들라고 해. 이왕이면 속이 풀리는 뜨듯한 걸로. 그다음엔 곧장 돌아와 효령일 지켜봐.”
“네, 어머니.”
“시타는 사람을 몇 명 데리고 가서 말들에 안장을 채워 둬. 왕자님께 연락이 오는 대로 언제든 달려 나갈 수 있게.”
“알았어요, 다와. 근데 다와는요? 효령일 산시에게 맡기고 무얼 하려고요?”
다와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왕자님을 공격한 게 누군지 알아봐야지. 누가 무슨 이유에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는지, 대체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누구든 걸리기만 해 봐.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테니까.”
“……!”
무시무시한 그녀의 기세에 시타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다들 뭐 해? 어서 움직이지 않고!”
추상같은 명령에 화들짝 놀란 모두가 서둘러 궁려를 달려 나갔다.
* * *
황후는 무서우리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평소 권력을 다지기 위해 궁 안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둔 그녀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발타고가 앵속에 중독된 이후, 대칸의 죽음까지 염두에 두고 있던 그녀가 아니던가.
제일 먼저, 황후는 요희의 처소 앞을 지키고 있던 대칸의 호위들부터 처리했다.
「7황비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대칸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시네. 당장 가서 술을 빚은 궁녀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끌고 오라 하시네.」
황후가 자신의 궁녀에게 고갯짓을 했다.
「네가 안내하거라.」
「예, 황후마마.」
멋모르고 궁녀의 뒤를 따라갔던 호위들은 한적한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황후의 수하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다음은 황후의 처소를 조사하던 단사관이었다. 융단 아래에서 발견한 앵속을 들고 막 대칸에게 가려던 그가 느닷없이 나타난 황후를 보고 주춤거렸다.
「화, 황후마마께서 여긴 어떻게……!」
「이런, 기어이 그걸 찾아내다니. 자넨 어지간히도 운이 없군그래.」
「화, 황후마마. 왜, 왜 이러십…… 으, 으아아!」
그 역시 황후 수하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숨이 떨어졌다.
황후가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해결하는 사이. 발타고는 아버지 대칸의 시신과 함께 요희의 처소에 있었다. 양털 이불로 대칸을 덮어버린 요희가 이번에는 차를 타 발타고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들어요.”
각성에 좋다는 약재들만 모아 만든 것이었다.
“정신이 바짝 들 거예요. 손 떨림이나 식은땀도 덜 할 거고.”
요희가 황후에게 말한 앵속의 해독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중독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지만, 효과는 꽤 좋았다. 이거라면 한동안 황후를 속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해 내내 감춰 뒀던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다급한 바람에 요희는 스스로 자신이 가진 마지막 패를 풀었다. 지금 이 마당에 발타고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언제 또 다른 변수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황후마마가 단사관이나 대칸의 호위들을 처리한다고 해도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에요. 대칸의 죽음에 대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예요. 자칫하다간 칸들이 반발하고 나서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끄응. 발타고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니 결단은 빠를수록 좋아요. 칸들이 자신의 영지를 떠나온 지금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다고요.”
백번 옳은 말이었다. 제아무리 어머니가 유능하다 해도 대칸의 죽음을 두고 칸들을 설득할 만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러다 자칫 그들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칸들 하나하나가 한 나라에 버금가는 영지를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들 중 두엇만 작심하고 덤벼들어도 발타고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치명타였다. 그걸 막는 길은 역시…….
“하지만 칸들에겐 그들과 같이 온 군사들이 있는데…….”
발타고가 약한 소리를 하자 요희가 지청구를 놓았다.
“그래 봐야 얼마나 된다고요. 게다가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는데 그들이 무얼 어쩌겠어요? 설사 소란이 인다 해도 황궁의 군사들로 해결할 수 있잖아요.”
“그, 그야 그렇지만.”
현재 무림제에 참여하면서 다섯 명의 칸들이 데려온 군사들의 수를 다 합하면 천여 명 남짓.
그중 절도 칸과 차뉴 칸은 자신의 편에 설 수도 있으니 그들의 군사를 제외한다면 육백.
그에 비해 황궁과 주변 숙영지를 수비하는 군사들은 그 몇 배에 달하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소리였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황궁의 군대를 책임지는 친위 대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거기 자신의 수하들과 황후의 수하들까지 합친다면…….
이미 끝난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쯤 사소한 문제들은 다 해결이 됐을 테니 당장 가서 황후마마를 만나요. 아직은 그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절대 그분 혼자 움직이게 둬선 안 돼요. 주도권은 반드시 당신이 잡아야 해요.”
“그럼 당신도 같이 가지. 앞으로 이 황궁의 안주인은 당신이 될 테니까.”
“좋아요.”
두 사람이 서둘러 처소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여기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대칸의 시신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호위에게 단단히 명을 내린 발타고가 막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후줄근한 모습의 무사 하나가 다급히 그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발리안을 죽이라고 보낸 수하 중 하나였다.
“태자 전하!”
“아니, 너는?”
상대의 꼬질꼬질한 행색에 발타고의 미간이 대번에 흐려졌다.
“네 몰골이 왜 이 모양이냐? 그보다 발리안은? 놈을 처리했느냐?”
“그게…… 송구합니다.”
무사가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대도위님을 놓쳤습니다.”
발타고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뭐, 뭐라?”
“거기다 남은 수하들마저…….”
무사가 미적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답답해진 발타고가 확 인상을 구겼다.
“어서 말을 해라. 그들이 대체 어찌 되었다는 것이냐?”
“그게…… 대도위님을 추격하는 도중 정찰을 나온 구림 부족의 군사들과 맞부딪치는 바람에…….”
“뭐라, 구림 부족? 빌어먹을!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발리안은 살아 있고 남은 수하들은 모조리 구림 부족에게 붙들렸단 뜻이 아니냐?”
“그, 그렇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들!”
발타고가 소리를 지르며 수하를 발로 걷어찼다. 윽. 바닥을 구른 수하가 재빨리 일어나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았다.
“소, 송구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요희가 손을 치켜드는 발타고를 붙들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만약 대도위가 이곳 주도로 돌아오는 날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발타고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만에 하나, 자신이 그를 죽이려 했단 사실을 안다면 발리안이 이대로 가만있을 리 없었다.
“젠장, 이를 어쩐다?”
요희가 날카로이 눈을 빛냈다.
“여기, 주도에 대도위의 남은 군사들이 있죠? 당장 사람을 보내 그들을 포위해요.”
“그들을 인질로 삼잔 말인가?”
“인질도 인질이지만, 대도위가 주도로 돌아왔을 때 그들과 합세하는 걸 막아야 해요. 나머진 황후마마와 상의해요. 서둘러요.”
발타고가 수하에게 말했다.
“너는 당장 군사들을 이끌고 가 발리안의 군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반항하는 놈은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
“아뇨, 그건 안 돼요.”
요희가 발타고를 말렸다.
“대도위의 수하들은 그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실력을 갖췄다고 들었어요. 싸움이 간단치 않을 거예요. 소란이 커지면 백성들이나 주변 숙영지에서 눈치챌 수도 있다고요.”
“그럼 어쩌라는 건가?”
“일단은 포위만 하라고 해요. 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
“칸들 문제를 해결한 후, 그들을 처리해도 늦지 않아요. 그때 뒤탈이 없도록 남김없이 모두 죽여 버려요.”
“그러지.”
발타고가 수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 가서 발리안의 숙영지를 에워싸고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지켜라. 이번에도 실수하면 제일 먼저 네놈 목부터 벨 테니 그리 알고.”
“예, 태자 전하!”
수하가 재빨리 자리를 떨고 일어나 달려갔다. 그의 뒤를 이어 발타고와 요희도 황후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