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파란 5
* * *
“……!”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참상을 깨달은 발타고가 다 늦게 비틀거렸다.
조금 전만 해도 분노로 거침없던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겨우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알량한 도덕성마저 마비시킨 앵속의 약효가 그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털썩. 그가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죄책감 때문인지, 금단 현상 때문인지, 그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 앞에 황후도, 요희도 말을 잃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황후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암담함 속에서도 그녀는 살길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다들 그렇게 걱정할 것 없네. 우리에겐 아직 7황비 그 계집이 미처 생각 못 한 방법이 두 가지나 있네, 그년이 가진 패를 쓸모없게 만들 기막힌 방도가.」
자신이 했던 말이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
그 하나는 오래전 발리안이 그랬던 것처럼, 남은 형제들을 다 죽여 발타고를 유일한 후계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발타고가 앵속에 중독되었단 사실이 드러나도 대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을 터.
그를 위해 황후는 남은 두 황자들을 주저 없이 해치웠다.
그리고 남은 하나. 그럼에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아예 대칸을 죽여 발타고를 새 대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발타고의 상태가 문제가 된다면, 그 아들인 손자를 앞세워 자신이 정치 전면에 나설 작정이었다.
‘그래.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빠르게 셈을 마친 황후가 발타고에게 다가갔다.
“정신 차리고 이 어미 말 잘 들어라.”
그녀가 얼이 빠져 있는 발타고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 일은 모두 7황비, 저 계집이 저지른 일이다. 앵속을 써 두 황자를 죽였다는 것이 발각된 저년이 살기 위해 대칸을…….”
“아니요!”
순간, 발타고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요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잔 절대 못 넘겨줍니다.”
“정신 차려라, 이놈. 안 그러면 네가 죽게 생겼는데 지금 그깟 계집이나 챙기고 있을 때냐? 네놈이 제정신이야?”
“제정신이냐고요? 아니죠. 어떻게 제가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에 믿었던 어머니마저 절 버렸는데 제가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조금 전 아버지 대칸과 어머니가 나눈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태자에게 아들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코흘리개 어린아이입니다. 뒤를 받쳐줄 사람도 없이 그 아이로 태손을 삼았다가 대칸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뒤를 받쳐줄 사람이라…… 설마 그게 황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발타고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황후 자리는 포기 못 하겠다는 거요?」
세상에, 어머니가 절 넘어 제 자식놈까지 계산에 두고 있었다니.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은 손자만 있다면 자기를 버릴 수도 있단 이야기가 아닌가.
이쯤 되니 자신에게 앵속을 쓴 사람이 어머니라는 요희의 말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제 발타고가 믿을 수 있는 건 요희뿐이었다.
“어머닌 저를 버리실 수 있어도 전 이 여자를 못 버립니다. 아니, 안 버려요. 그러니 선택하십시오. 끝까지 제 어머니로 남으실 것인지 아니면 저와 영영 연을 끊으실 것인지.”
그가 황후를 향해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 이제 기탄의 대칸은 접니다. 어머니라도 제 말을 거역하면 살아남지 못……!”
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발타고의 뺨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이, 이런 못 돼먹은 놈. 이제껏 내가 널 어찌 키웠는데, 네놈이 감히……!”
그녀가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는 틈으로 요희가 끼어들었다.
“이봐요. 다들 소리 낮춰요. 밖에 있는 자들이 다 듣는다고요. 잘못하면 우리 모두 죽어요.”
요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황후마마. 억지도 정도껏 부리세요. 대칸이 단칼에 목숨을 잃었어요. 어떤 멍청한 인간이 연약한 여인인 내가, 나보다 키가 큰 대칸의 급소를 한 번에 찔러 죽게 만들었다고 믿겠어요?”
“……!”
그 말에 황후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맞는 말이었다. 대칸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전, 칸들이 직접 그 시신을 확인하는 것이 기탄의 법이었다. 다음 후계 구도를 정확히 하기 위해 정해진 절차였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칸들이 요희가 대칸을 죽였단 주장을 믿을 리 없었다.
상대를 단숨에 죽이고자 살집이 많은 배 대신 등을 노린 것 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에 깊이 꽂힌 칼날 하며. 여간한 사람, 특히 여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앵속 때문에 죽었다면 병으로 급사했다 둘러대거나, 요희의 짓으로 돌리기 좋았으련만.
막다른 길에 몰린 황후 대신 요희가 입을 열었다.
“태자를 구하려면 나 말고 다른 희생양을 찾아요. 아님, 아예 다른 말이 안 나오게 모두 죽여 버리거나. 이제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고요.”
“…….”
“빨리 사람을 보내 황후마마 처소에 간 단사관부터 해결하세요. 앵속이 나오면 황후마마도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겠죠? 밖에 있는 대칸의 부하들은 또 어쩔 건가요?”
“…….”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요. 이 밤 안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해요. 그들은 물론이고 칸들을 어찌할 것인지 밤 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요. 한정 없이 대칸의 죽음을 감출 순 없을 테니까.”
후. 숨을 고른 황후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우리 둘의 앙금을 해결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황후의 시선이 이번에는 발타고를 향했다.
“그렇게도 대칸이 되고 싶으면 내가 급한 불을 끌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부를 때까지 넌 여기 있어라.”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섰다. 황후가 요희의 처소를 빠져나감과 동시에 사방에서 피 냄새가 섞인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시타와 산시는 초조한 얼굴로 발리안의 처소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이 궁려를 힐끔거리며 소곤댔다.
“야, 언제까지 우리 사이를 비밀로 해야 해? 나 들킬까 봐 불안해 죽을 맛이라고.”
“오라버니는 그렇게 눈치가 없어? 지금 어머니 기분이 바닥이야. 이럴 때 말을 꺼냈다간 오라버니만 얻어터진다고.”
다와는 요즘 매일 발리안의 궁려로 퇴근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 어두운 안색으로 그의 침상만 쓰다듬다 돌아가곤 했다. 덕분에 시타와 산시까지 덩달아 좌불안석이었다.
“다와를 속이는 거 영 기분이 찜찜한데. 차라리 매도 일찍 맞는 게…….”
산시가 시타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핀잔을 놓았다.
“지금 왕자님과 효령이 때문에 어머니 걱정이 한가득인데 우리까지 꼭 어머니 속을 뒤집어야겠어? 조금만 참아. 적어도 호독니 천장이 돌아올 때까지라도.”
시타가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하여튼 다와는 걱정도 팔자라니까. 우리 대장이 어떤 사람인데 그깟 꿈자리 좀 사나웠다고 호독니를 그 멀리까지 보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말 탄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앗, 호독니다!”
호독니를 발견한 시타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호독니. 대장이랑 효령인……!”
삽시간에 시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호독니의 품 안에 안긴 효령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반쪽이 된 얼굴로 축 늘어져 있었다.
“효령아!”
“세, 세상에, 효령아!”
시타와 산시가 동시에 호독니를 향해 달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호독니? 대장은요?”
호독니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다와는?”
“아, 안에…….”
호독니는 다른 말 없이 곧장 궁려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불길한 예감을 느낀 시타와 산시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호독니…… 효령아!”
오늘도 어김없이 발리안의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다와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상 곁으로 다가간 호독니가 효령을 거기 눕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 효령이가 이 지경이 되었어? 왕자님은?”
“이놈, 사막에서 전갈에 물렸던 모양이오.”
호독니가 뚝뚝하게 대답했다.
“뭐?”
다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하지만 이젠 괜찮소. 기력이 부족하긴 해도 어제부턴 정신도 돌아오고. 한데…….”
호독니가 말끝을 흐렸다.
“대장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릴 듣더니 다시금 기절해서 내내 이 지경이오.”
“뭐…… 뭐라고? 왕자님 행방이 묘연하다니. 지, 지금 그게 무슨……?”
다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황한 것은 시타, 산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호독니? 대장 행방이 묘연하다니?”
“제길, 그러니까 그게…….”
호독니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쉬지 않고 사막을 빠져나온 호독니는 창지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세웠다.
「너, 그리고 너. 너희 두 놈은 나를 따라나서고, 나머지 놈들은 효령일 데리고 주도로 돌아가라.」
수하들이 놀라 물었다.
「예? 그럼 천장은요?」
「난 대장에게 가 봐야겠다.」
에누리 없이 발리안을 두고 올 때는 언제고. 이제야 돌아가겠다는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전에 서역 상단을 따라다니던 매복자(점쟁이)가 대장을 보고 한 말이 있다.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만나겠지만, 목숨을 담은 주머니가 여럿이라 여간해선 안 죽는다고.」
호독니가 말을 이었다.
「대장은 틀림없이 살아 있다. 놈들에게 잡혀 고생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죽지 않아. 그러니 내가 구하러 가야지.」
그것이, 호독니가 발리안의 명을 순순히 따른 이유였다.
어차피 그의 곁에 있어 봐야 도움이 되기는커녕 개죽음이나 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럴 바엔 발리안의 말마따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막을 빠져나와 여기까지 왔으면 더는 효령이나 남은 수하들이 생명을 위협당할 일은 없을 터. 발리안과의 약속은 지켰으니 이젠 그를 구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