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파란 4
* * *
마치 나락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뼈를 얼릴 듯 차가운 음성이었다.
“……!”
너무 놀란 나머지 발타고도 요희도 숨을 멈췄다. 어찌나 두려운지 차마 뒤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주 느린 동작으로, 발타고가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흰 수염을 한 근엄한 얼굴이 격노에 사로잡힌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 아버……!”
세상 두려울 것 없던 발타고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자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전장을 누비며 수도 없는 적을 베었다는, 원수에겐 한 줌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는 기탄의 지배자. 대칸 만이 있을 뿐이었다.
일말의 연민마저 사라진 경멸의 시선, 그런 눈과는 대조적으로 한없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네놈은 절대 대칸의 그릇이 아니라던 선대 천군이 말이 사실이었구나.”
대칸의 음성은 무서우리만큼 침착했다.
“내 그래도 아비라고…… 모자란 놈을 어떻게든 가르쳐 이 자리를 물리려 하였던 것이 잘못이었다. 능력은커녕, 아비의 눈을 피해 그 후궁과 놀아나는 못된 놈을…….”
“대, 대칸…….”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어도 이 지경이니 내가 죽으면 이 나라가 어떤 꼴이 될지 눈에 선하구나. 내 대칸이 되어 더는 내 손으로 이 나라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
대칸이 싸늘한 얼굴로 청천벽력의 선고를 내렸다.
“너는 오늘부로 더 이상 기탄의 태자가 아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안 됩니다, 대칸!”
이제 막 요희의 방에 들어선 황후가 날 선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황급히 대칸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못나도 발타고는 대칸의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발타고가 아니면 누가 대칸의 뒤를 잇는단 말입니까?”
대칸이 모멸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두 황자들을 죽인 것이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
황후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방금 저 두 사람이 그러더군. 이번에 두 황자를 죽인 것도, 그 이전에 황자들을 죽인 것도, 당신의 사촌 언니였던 전 황후를 죽인 것도 모두 당신이라고.”
“마, 마, 말도 안 됩니다, 대칸.”
당황하여 말을 더듬던 황후의 시선이 이내 요희를 향했다.
“네, 네년. 네년이 내 아들을 꼬인 것으로 모자라 그 세 치 혀로 대체 대칸께 무슨 헛소릴 지껄인 것이냐? 네년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황후의 입에서 평소 들을 수 없는 악다구니가 쏟아져 나왔다.
순간, 요희의 입매가 비릿하게 휘어졌다.
‘그러게, 날 함부로 건들지 말랬잖아.’
아까 칼을 집으러 탁자로 달려갔을 때. 요희는 미세하게 열린 문밖으로 대칸의 그림자를 보았다. 발타고가 급히 들어오느라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 이래서 사람 죽으란 법은 없다니까.
그제야 안도한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황후, 당신이 날 죽이려 들었겠다? 그럼 이번엔 당신이 당해 보시지.’
이후, 요희는 작심하고 황후의 비위에 대해 까발렸다.
발타고와의 불륜이 드러났다 해도 자신이 죽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발타고가 그녀를 덮치지 않고서야, 요희 자신이 태자의 처소에 찾아가 유혹하는 일은 불가능했으므로.
기껏해야 자신은 안야국으로 돌려보내지는 정도에서 끝날 터. 황실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질 일을 대칸이 밖으로 떠벌릴 리도, 크게 키울 리도 없었다.
그걸 알기에 요희는 마음 놓고 연약한, 멋모르고 사랑에 빠진 순진한 여인의 연기를 할 수 있었다.
‘네년이 기어이……!’
요희와는 반대로 황후는 완전히 죽을 맛이었다. 대체 저년이 어디까지 떠벌린 것인지, 대칸이 무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네년이 나와 내 아들로 모자라, 기어이 기탄을 끝장낼 작정이구나.’
요희가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러니까 진작 내 말을 들었으면 좋았잖아, 할망구. 이건 다 자업자득이라고.’
두 여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사이, 대칸이 말했다.
“천군까지 황후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 사실이오? 하면 오늘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은 두 사람이 작당하여 벌인 일이란 뜻이구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대칸. 저년에게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몰라도 절대 믿으시면 안 됩니다. 황후인 저를 두고, 기탄에 앵속 같은 험한 것을 들여온 저년의 말을 믿으시다니요.”
그녀가 애가 타 말을 이었다.
“속히 아랫것들을 시켜 이 방을 살펴보라 하십시오. 틀림없이 앵속이 나올 것입니다. 이게 다 저년이 기탄을 망치고자…….”
“물론 살펴볼 것이오. 하지만 동시에 황후와 그곳 궁녀들의 처소도 살펴볼 것이오. 이미 단사관들이 조사하러 갔으니 곧 밝혀지겠지. 만약 거기서 단 한 조각이라도 앵속이 나온다면……, 아니.”
대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무시무시했다.
“이제껏 죽은 황자들의 일에 단 하나라도 황후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오.”
“대, 대칸!”
황후의 얼굴이 마치 시체처럼 변했다.
설마 대칸이 황후인 자신의 처소까지 뒤지라고 할 줄이야.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어 앵속을 그곳에 숨겼건만. 융단 아래 바닥에 묻어 두었으니 쉽게 들키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전하다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구석에 몰린 그녀가 대칸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대칸. 대칸께서 저 요망한 년의 말만 믿고 정녕 저와 태자를 내치시려는 겁니까? 이런 말씀 송구하지만 대칸의 나이 내일모레면 일흔입니다. 태자 없이 어찌 기탄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녀가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태자에게 아들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코흘리개 어린아이입니다. 뒤를 받쳐줄 사람도 없이 그 아이로 태손을 삼았다가 대칸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뒤를 받쳐줄 사람이라…… 설마 그게 황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들인 발타고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황후 자리는 포기 못 하겠다는 거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황후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혈육의 정이라……. 말이야 좋지. 하지만 내가 오늘 이 참담한 지경을 당한 것이 바로 그놈의 혈육의 정 때문이 아니오? 대칸은커녕 칸의 자리에도 못 미치는 놈을 아들이랍시고 태자로 삼았으니.”
대칸이 무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선대 천군의 말을 따랐어야 했소. 진정 기탄의 번영을 위한다면 제일 먼저 내 욕심을 버리라 했던 말. 하늘이, 천신이 택한 다음 대칸은 무부무성(無父無姓)이라는 말.”
“……!”
황후와 발타고가 흠칫했다.
다음 대칸은 아비도 성도 없는 자라니. 그것이 누굴 이르는 것인지 모를 그들이 아니었다.
‘발리안 이 때려죽일 놈. 평생 내 발목을 붙든 걸로 모자라 감히 내 자리까지 가로채려 들어?’
치욕이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말에 발타고가 치를 떨었다. 그러나 대칸은 처참하게 짓밟힌 그의 심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착한 겉모습과는 달리 대칸의 노여움과 배신감도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가 아니면 기탄의 미래는 없을 거라 했건만. 그런데도 난 애써 그 말을 무시하며 어떻게든 저 모자라고 무지한 놈으로 내 뒤를 잇게 하려고 했소.”
“…….”
“번번이 싸움에 패하고 힘들여 일군 땅을 적의 손에 넘기고. 포악한 성격으로 아랫것들을 괴롭히고 핍박해도…… 애써 모르는 척 눈을 감았소. 나이가 들면 나아지겠지. 혹…….”
“…….”
“발리안을 저놈 곁에 붙여 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고 말이오. 한데 저 멍청한 놈은, 울며 매달려도 시원찮을 발리안을 못 밟아 안달이나 부리고, 계집질에나 정신을 팔고 있으니…….”
“…….”
“거기다 황후는 그나마 저놈보다는 나은 두 황자들마저 죽여 없앴으니. 태자고 황후고 내 더는 보아줄 수가……!”
분노에 차 말을 잇던 대칸의 눈이 일순 커다래졌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뒤에서 충격이 느껴진 것도 잠시. 등을 뚫고 들어온 칼이 그대로 폐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대칸이 천천히 뒤를 향해 돌아섰다.
“……!”
핏발 선 눈을 한 발타고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아버지 입에서 모자라다, 무지하다는 소리가 나온 순간,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아래 내장에서부터 욱하니 울분이 끓어올랐다.
그렇게도 내 꼴이 보기 싫거든 죽어, 죽어 버리라고!
발타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렇게도 발리안 그놈이 좋으면 같이 가십시오. 마침 그놈도 제 손에 목이 달아났으니, 저승길이 외롭진 않을 겁니다.”
“발타고 네, 네놈이……!”
“제가 대칸은커녕 칸의 자리에도 못 미치는 놈이라고요? 그런 아버진 얼마나 잘나셔서 겨우 그딴 놈에게 이런 꼴이나 당하고 계십니까? 예?”
발타고가 증오심으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선대 천군의 말은 틀렸습니다. 기탄의 다음 대칸은 발리안 그놈이 아니라 바로 나, 발타고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하. 제가 역겨워 못 견디시겠다는 표정인데……. 이제 더는 저도 아버진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 제 인생에서 꺼져 주십시오.”
발타고가 대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딴 눈으로 날 보지 말라니까요.”
자신을 노려보는 대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발타고가 급기야 대칸을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대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잖아도 폐의 피가 빠져나오면서 더는 숨을 쉬지 못하게 된 대칸이 마지막으로 발타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
툭. 그러나 그 손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릅뜬 채 멈춰 버린 대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대, 대칸……!”
“태자!”
황후와 요희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