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파란 3
* * *
발타고가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그러고는 뭐가 어째? 날 사랑해? 세상에 믿을 사내는 나 하나뿐이라고? 이런 독사같이 교활한 년 같으니라고. 내 네년의 요사스러운 말에 속아 넘어가 그걸 진심이라고 믿었으니…….”
“…….”
“대체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었나? 아니, 버러지만도 못한 네년에게 진실이란 게 있을 리 없지. 그래, 네년의 고갯짓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날 보는 기분이 어땠지?”
“…….”
“좋아 죽겠던가? 짐승처럼 어리석은 놈이니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생각했나? 어서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다!”
“…….”
목을 졸린 요희가 말을 잇지 못하고 깔딱거렸다.
광분한 발타고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앵속을 먹인 것이냐? 날 죽이려고? 아님, 강제로 널 품은 것에 대한 복수였나? 아니지. 네년, 처음부터 날 유혹해 우리 기탄을 망칠 작정이었던 게지?”
“…….”
“내 절대 네년을 고이 죽이지 않을 것이다. 양을 잡듯, 날 농락한 네년의 그 더러운 몸뚱이를 하나하나 조각내 주지. 제일 먼저 그 혀를 잘라 소금을 치고, 다음으로 눈을 뽑아…….”
“태, 태……. 내, 내…… 마, 말 좀…….”
어느새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그녀가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왜, 이번엔 또 무슨 간사한 말로 날 속이려고? 내가 두 번이나 속아줄 만큼 아둔한 놈으로 보이……!”
순간, 발타고의 손이 느닷없이 느슨해졌다. 앵속의 부작용 때문에 힘이 빠지면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성을 낸 발타고가 요희를 밀쳐내고 사정없이 부들거리는 자신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아, 하아.
겨우 죽다 살아난 요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황후가 그새 다 불어 버린 건가? 왜 내내 참다가 지금에야…….
이유야 어떻든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여차하다간 이 무식하고 무자비한 짐승 같은 놈 손에 당장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다. 남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죽는 건 요희의 계획엔 전혀 없는 일이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그녀가 놀랍도록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날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니…… 정말 실망이네요.”
요희가 원망 섞인 눈으로 발타고를 노려보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내를 믿지 말라 한 모양이군요. 좋으면 다가왔다가 싫증이 나면 헌신짝처럼 버리니……. 겨우, 이제야 겨우 진정으로 은애하는 이를 만났다 여겼건만…….”
요희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래요, 죽이고 싶으면 죽여요. 이렇게 의심받고 버림받을 바에야 살아 무엇하겠어요? 내게 더는 무슨 희망이 있다고……. 아니.”
재빨리 탁자로 달려간 그녀가 거기 놓여 있던 칼을 집어 들었다. 고기 요리를 잘라 먹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당신 손을 빌릴 필요도 없어요. 내가 알아서 사라져 줄 테니까. 내게 죄가 있다면…… 그건 당신을 사랑한 것뿐. 그 죗값을 묻겠다면 기꺼이 치르겠……!”
눈물범벅이 된 요희가 두 손으로 칼을 들어 배에 찔러 넣으려는 순간.
“당신 미쳤어!”
탁. 그녀를 붙든 발타고가 칼을 멀리 쳐냈다.
“어디서 감히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죽으려 들어?”
요희가 미친 듯 고개를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왜…… 왜 말려요, 왜? 난 당신을 속인 계집이잖아요. 양을 잡듯 죽이겠다면서요? 당신 원대로 해 주겠다는데, 왜…… 흐읍.”
그녀가 끝내 절규하며 무너져내렸다.
“더 이상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죽이란 말이에요.”
요희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서, 설마. 내가 뭘 잘못 안 건가?’
너무도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발타고가 오히려 당황했다.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꿀꺽, 마른침을 삼킨 발타고가 주춤거렸다.
“다, 당신이 기탄에 앵속을 들여온 건 사실이잖아? 내 상태가 나빠진 것도 사실이고. 그, 그러니 당신을 의심할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지 않나?”
흐읍. 요희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변명 따윈 하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내 말 같은 건 믿지 않을 거잖아요. 누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니, 그 말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황후마마겠죠.”
“그, 그게…….”
“당신 어머니야말로 누구보다 내가 죽어 없어지길 원할 테니까. 날 죽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니까요.”
“이봐…….”
“당신 어머니 말이 맞아요. 내가 당신을 앵속에 중독시켰어요. 됐죠? 원하는 말을 들었으니 그만 날 죽여요.”
“그, 그러지 말래도. 내, 내가 잘못했어. 내 성미가 워낙 더럽고 급해서 그만. 그러니 제발 날 위해 설명해 봐. 응?”
발타고가 마치 똥줄이 탄 강아지처럼 애원했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덤볐던 조금 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가 한참을 매달리고서야 요희가 마지못하는 척, 입을 열었다.
“내가 앵속을 가져온 거 맞아요. 하지만 그건 안야국에서 널리 쓰이는 좋은 약재이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 앵속을 썼냐고요? 그래요.”
그녀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안야국 황실에선 다들 그렇게 하니까요. 부부 사이가 좋아지는 데 그만한 게 없으니까. 생각해 봐요. 당신이 마신 앵속이 든 술. 나도 몇 번이나 마셨잖아요.”
그러고 보니 요희도 자주 자신과 같이 술을 들었다. 주량이 세지 않아서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내가 만약 기탄을 멸망시킬 작정으로 여기 온 거라면 대칸을 노리지, 왜 당신을 죽이겠어요? 태자가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대칸께서 강건하신데 기탄이 당장 무너지기라도 하나요?”
“…….”
“내 입장에선 대칸이 죽고 당신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게 훨씬 더 이득이잖아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날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고. 내가 영악하고 못된 계집이라면 그쪽을 택하지 않겠어요?”
“…….”
“더구나 기탄에 앵속을 들여온 게 누구예요? 나잖아요. 누군가가 앵속에 중독되면 제일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난데……. 내가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닌 다음에야 그런 짓을 하겠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요희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발타고로서는 이제 뭐가 뭔지 도통 모를 지경이었다.
“내가 앵속을 사용한 것은 맞지만,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정말 조심스럽게 사용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날 의심하는 것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럼 대체 누구야? 당신 말고 누가 날……. 그거 아나? 조금 전 내 아우 놈들이 죽었다. 어머니 말씀으론 앵속을 너무 많이 먹어서라는데……!”
설마!
순간 발타고의 눈이 커다래졌다. 왜 이제껏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우들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
「앵속은 기침과 설사를 멈추고 통증을 없애는 약, 목과 뼈, 장이 아픈 데도 잘 듣는 귀한 약이지요. 하지만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단 한 번만으로도 중독이 되고 죽을 수도 있소.」
「얼마 전, 멋모르고 앵속을 먹은 아랫것들이 죽고서야 저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앵속이 사람을 죽일 만큼 위험하다는 걸 안 이상 그냥 둘 수 없어……. 아랫것들이 죽은 날 바로 창고에서 끌어내 모두 불태웠습니다.」
아까 회의장에서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이 황궁 안에서 요희를 제외하고 앵속을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 아버지 대칸이나 두 아우가 마실 유주에 손을 쓸 능력이 되는 사람…….
그건 바로 어머니인 황후였다. 처음부터 그녀를 의심했으면서 왜 유독, 자신의 일만은 요희의 짓이라 섣불리 단정했을까.
‘그럼, 어머니가……!’
아니, 그럴 리가. 설마 어머니가 나에게까지…….
한 번 마음을 침범한 의혹은 곧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럼에도 발타고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이 아니라면 그럼 누구지? 누가 내 아우들과 날 이렇게…….”
“그, 그건…….”
요희가 발타고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 봐. 당신은 나보다 머리가 좋으니까.”
“저, 정말 화내지 않는 거죠?”
뜸을 들인 요희가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황후마마가 아닐까요? 황후마마라면 앵속의 효능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데다 그걸 가지고 계실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역시나. 이 사건의 중심에 황후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황자들이 죽으면 제일 먼저 태자나 황후마마가 의심받지 않겠어요? 하지만 태자도 중독이 되었다면 어느 누가 당신이나 황후마마를 의심하겠어요?”
“당신 정말…… 정말로 내 어머니의 짓이라 생각하나? 나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날 망가뜨릴 리가…….”
“당신이 그랬죠? 당신 어머닌 사촌 언니를 죽이고 황후가 되었다고. 당신 위아래 형제들을 모두 죽인 것도 그분이라고요. 이미 천군까지 자기 편인데 그분이 두려울 게, 못하실 게 있을까요?”
발타고의 얼굴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가슴 깊숙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었다. 어떻게 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구보다 믿었던 어머니가.
거기에 요희가 불을 질렀다.
“어쩌면…… 모든 건 다 나 때문일 거예요. 황후마마께서 우릴 떼어 놓으려 그러신 거라고요. 날 죽일 구실을 만들고, 당신이 날 미워하게 만드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테니까요.”
그녀가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발타고를 바라보았다.
“곧 황후마마가 사람들을 이끌고 날 죽이러 올 거예요. 여기 있는 걸 들켰다간 당신마저 황후마마 눈 밖에 날지 몰라요. 그랬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파르르, 몸을 떤 그녀가 이내 비장한 얼굴로 아까 발타고가 쳐낸 칼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발타고의 손에 쥐여 줬다.
“당신이 살길은 하나뿐이에요, 태자. 당신 손으로 날 죽여요. 그럼 적어도 황후마마께서 당신을 버리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어서 날 죽여요.”
“이, 이봐.”
요희의 간청에 발타고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제발…… 날 다른 사람 손에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음 따위, 난 두렵지 않아요.”
요희가 손을 들어 발타고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살아야 해요. 그래서 더 좋은 여자도 만나고 훌륭한 대칸도 되고……. 당신이 대칸이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요희가 끝내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순간, 발타고가 손에 들린 칼을 내던지고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말했지? 당신을 반드시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고. 당신은 안 죽어. 죽어야 할 인간들은 따로 있는데 당신이 왜 죽어? 무슨 수를 써서든 당신을 지킬 테니 그딴 약한 소린 그만……!”
바로 그때.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한 말…… 모두 사실이냐?”